[취재파일] 26살 된 태백선수촌 방치할 것인가?
권종오 기자 2024. 11. 19. 09:12
현재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주로 2017년에 문을 연 충청북도 진천 선수촌에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1966년 개장해 진천 선수촌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한국 스포츠의 요람'으로 불렸던 서울특별시 태릉선수촌에도 일부 훈련 시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선수촌의 '대명사'였던 태릉선수촌이나 진천 선수촌과는 달리 강원도 태백시에도 선수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1998년 6월에 개장해 올해로 만 26살이나 됐지만 태백선수촌의 인지도는 크게 떨어집니다.
태백선수촌의 주소는 강원도 태백시 서학로 266(소도동). 백두대간의 중추인 함백산(1,573m)의 해발 1,330m 고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만평에 가까운 대지에 숙소동, 관리동, 실내체육관이 있고 400m 우레탄 트랙(4레인)이 깔려 있습니다.
태백선수촌은 고지대 훈련을 통해 심폐 기능을 강화하고 지구력을 증강해 경기력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그동안 복싱, 태권도, 유도, 트라이애슬론 등 다양한 종목에 걸쳐 국가대표 선수들의 고지대 산악 훈련장으로 각광 받아 왔습니다. 또 '지옥의 코스'로 불리는 '소로골 코스'(7.1㎞)와 '사내골 코스'(7.9㎞), 2가지 크로스컨트리 코스가 있어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력 단련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곳의 기온은 서울에 비해 크게 낮습니다. 제가 태백선수촌을 방문한 11월 14일, 태백시의 기온은 서울보다 3도쯤 낮았고 해발 1,330m 고지에 있는 태백선수촌은 이보다 3-4도가 낮은데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기록적 폭염을 보였던 올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밤에 이불을 덮고 자야 할 만큼 서늘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10년 전만 해도 여름철에는 종목별 대표팀과 프로구단들 간에 입촌 경쟁까지 벌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곳을 찾는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2024년의 경우 태백선수촌에서 훈련한 팀은 복싱, 트라이애슬론, 에어로빅 고작 3팀에 불과합니다. 1월부터 5월까지 사용한 팀은 하나도 없고 10월 이후 지금까지도 훈련 일정이 비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1년 12개월 가운데 10개월 이상 훈련하는 팀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낙후된 시설에 있습니다. 스포츠 취재기자로 35년을 활동했던 저는 뉴스 제작을 위해 이곳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처음 태백선수촌에서 취재했던 2000년 봄 이후 2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나아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시설은 눈에 띄게 낡아졌습니다.
육상 트랙은 고작 4레인. 1998년 개장 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실내 체육관의 크기입니다. 핸드볼은 고사하고 농구장 규격도 나오지 않을 만큼 작아 연습도 경기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한마디로 체육관이라는 명칭을 쓰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숙소 규모는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방이 고작 17개에 불과합니다. 3인 1실 기준으로 최대 51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하지만 남녀 선수 분리, 임원/선수 분리를 감안하면, 실제 2인 1실 기준으로 단체 종목 1개 팀을 받으면 다른 팀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태백시와 태백선수촌의 거리는 자동차로 20분. 해발 1,300m가 넘는 태백선수촌을 매일 왕복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태백선수촌을 찾는 선수들이 뜸해지다 보니 이곳에서 근무하는 인원도 턱없이 적습니다. 대한체육회 국제본부장을 역임했던 박인규 촌장 외 체육회 직원 3명과 교대 근무하는 용역 직원 6명만이 칼바람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사실상 '무용지물'이 돼 가고 있는 태백선수촌을 없애야 할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러닝을 즐기는 저는 고지대 훈련 효과를 체험하기 위해 11월 14일 오후, 태백선수촌 트랙을 달리며 기록을 측정했습니다. 해발 고도 100m 이하에서 2,000m를 달릴 경우 제 기록은 평균 8분 30초입니다. 그런데 태백선수촌 트랙에서는 1,200m가 지나자 숨이 급격하게 차면서 페이스가 떨어졌고 결국 9분을 훨씬 넘기고 말았습니다. 산소 밀도가 확실히 평지보다 낮아 산소 섭취가 어렵다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태백선수촌에서 적절하게 훈련할 경우 선수들의 적혈구 수치를 증가시켜 산소 운반 능력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태백선수촌을 완전히 없앨 경우 이를 대체할만한 곳을 찾아 새로 건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으로 나온 것이 낙후된 숙소동, 관리동, 실내체육관을 헐고 다목적 체육관을 신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농구, 배구는 물론 경기장 규격이 훨씬 큰 핸드볼도 할 수 있는 체육관을 비롯해 체력 단련실, 저탄소실, 실내트랙이 들어서는 체육관을 짓는 것입니다. 이 안에 따르면 선수 숙소도 16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대폭 확대됩니다. 이 정도 규모의 다목적 체육관이 신축될 경우, 선수촌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있어 이곳을 찾는 선수들이 예전처럼 대폭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런 기대감으로 지난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다목적 체육관 신축이 추진됐고 현재 건립 주체인 대한체육회와 해당 지자체인 태백시가 기본 계획 수립에 다 합의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입니다. 490억 원의 건립 예산안이 지금까지 기획재정부의 문턱을 넘지 못해 몇 년 동안 표류 중입니다.
태백선수촌이 필요한 시설이라는 점은 대다수의 국내 체육계 인사들이 동의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26년 전보다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낙후돼 가고 있는 태백선수촌은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폐가'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국가대표 선수는 물론 프로 선수들도 활용할 수 있는 태백선수촌을 '폐가'가 될 때까지 그냥 방치하는 것은 여러모로 더 큰 손실임이 분명합니다. 다목적 체육관 신축의 열쇠를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전향적인 태도 전환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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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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