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여러분은 쓸모 있는 어른이 되셨나요, 영화 ‘연소일기’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01번째 레터는 지난 13일 개봉한 홍콩 영화 ‘연소일기’입니다. 오프닝을 보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될까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제 생각엔 이 오프닝은 이중의 함의가 있습니다. 안심시켰다가 뒤에서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거죠. 이건 영화를 끝까지 보셔야 무슨 말인지 아실 수 있어요. 주인공은 열 살 소년인데, 언젠가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서 자신을 다독이며 일기를 씁니다. 그런데 소년이 자신에게 하는 말은 듣고 있기에 가슴이 아파요.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야.” “이 쓰레기 자식아, 정신 똑바로 차려.”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아이는 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게 됐을까요. 그 얘기 전에, 이 영화를 소개해드려야겠다 생각이 들게 한 기사를 먼저 하나 말씀드려야겠네요.
지난 4일이었어요. 휴대폰으로 여러 기사를 읽다가 어떤 제목에 눈길이 갔습니다. ‘’난 조직에서 필요 없는 사람' 영주시청 50대 계장 숨져'. 그 며칠 전 ‘연소일기’ 시사를 보고 주인공 소년의 ‘쓸모 없는 사람’ 대사가 마음에 남아있던 저는 곧바로 기사를 클릭했습니다.
‘4일 경북 영주경찰서 등에 따르면 지난 2일 오후 10시 30분께 문수면 한 도로에 세워진 자동차 안에서 영주시청 소속 공무원 A(53)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휴대전화에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에 유서 형태의 글을 남겼다.’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는 11월2일 오후 4시48분, 고인이 휴대폰에 남겼다는 글이 보였습니다. ‘직원들이 나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너무나 부끄럽고 직원들의 차가운 눈총과 말 행동들, 비아냥거림 너무 힘들다. 사무실에 나가기가 너무나 두렵고 무섭다. 난 조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이제 그만 영원히 쉬는 걸 선택. 직원들께 미안합니다.’
죽음의 사연을 타인이 어찌 안다할 수 있을까요. 다만, ‘난 조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오래 울렸습니다. 쓸모와 필요. 과연 세상 누가 다른 누구를 쓸모 없는 인간이라거나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지.
‘연소일기’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열 살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저 위의 포스터에서 보시는, 옥상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소년이 오유제인데요, 오프닝에서 저를 놀라게 한 주인공입니다. 전 저 포스터만 봐도 어쩐지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워서 애가 탔어요.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요.
일이 생길지 말지는 오유제의 가족에게 달렸습니다. 아빠는 자수성가한 아주 잘 나가는 사업가이고, 엄마는 그런 아빠에 어울리는 우아한 여성이며, 동생은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치고 학교와 집에서 칭찬만 받는 우등생입니다. 문제는 오유제가 동생과 반대로 공부도 못하고 피아노도 못 치고 학교와 집에서 혼만 나는 열등생이라는 사실이죠. 오유제는 일기를 쓰면 똑똑해져서 홍콩대(일류대)에 간다는 말을 듣고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아빠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약속도 합니다. “이번엔 10등 안에 들게요.” 하지만 아빠는 비웃습니다. “너한텐 너무 높은 목표야.” 아빠가 틀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아빠 말이 맞습니다. 잔인한 세상의 꿈들이 늘 그렇듯이. 오유제는 국어 61점, 수학 48점을 받고 반에서 29등을 하면서 유급을 하게 됩니다. 아빠의 매질이 날아옵니다. 형이 얻어맞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옆에서 공부하는 우등생 동생. 아, 읽으시면서도 답답하시죠.
아니, 아빠는 망나니라고 쳐도 그 집 엄마는 뭐하는 건가요, 물으신다면, 그 엄마도 막상막하입니다. 아들이 공부 못해서 힘들다며 “엄마가 너땜에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혼하면 네 탓이야” 이러거든요. 아빠는 오유제를 몰아세우며 “예쁘게 생긴 거 말고 잘하는게 뭐가 있느냐”며 “조금이라도 더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고 질책합니다. 교사가 되고 싶던 오유제의 일기는 점점 암담해집니다. “해적이야기에서는 항상 힘을 내라고 했어. 노력해도 소용없는 것 같아. 나는 진급도 못했어. 피아노도 잘 못치고. 알고 있었어. 어른이 된다고 해도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거라는걸.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라.”
열살 소년 오유제는 과연 바라는 대로 쓸모 있는 사람,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고 확인해주시길.
영화는 오유제의 이야기와 어느 고등학교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주인 모를 유서의 사연을 교차해 보여주며 전개됩니다. 그 유서에도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있고, 그 문장이 불러낸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교사가 등장하고요.
두 이야기의 줄기를 엮어가는 ‘연소일기’는 어린 시절의 상처, 어른이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 회한을 헝클어트리며 다시금 쓸모를 돌아보게 합니다. 다정함의 쓸모, 헤아림의 쓸모, 포옹과 위안이라는 쓸모가 어쩌면 누구도 모르는 사이 한 존재를 다시 일어서게 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의 쓸모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발견하고 찾아내고 인정해주면서 키워가는 것은 아닐지. 그런 한 사람이 없어 누군가는 지금 어딘가에서 몰래 울고 있지는 않을지. 이번 레터가 영화의 위로를 찾는 구독자 여러분께 아주 자그나마 쓸모가 있었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레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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