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삶 의무화 ‘팍스’… 사회적 보호 통해 출생률 높인다 [심층기획-저출생 시대 ‘결혼 공포증’]
윤준호 2024. 11. 19. 06:06
(2회) 미혼·기혼 징검다리 놓는 프랑스
미혼·기혼 중간단계 역할
결혼한 부부처럼 세제혜택 등 제공
결합·경제적 부담 적어 청년층 주목
佛 팍스 커플, 결혼 커플 비율과 유사
결혼 아닌 또 하나의 틀
팍스 중 절반 정도가 결혼으로 연결
“같이 사는 연습… 출생률 제고도 도움”
“결합이 쉬운 만큼 해체 쉬워” 우려도
파리=글·사진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미혼·기혼 중간단계 역할
결혼한 부부처럼 세제혜택 등 제공
결합·경제적 부담 적어 청년층 주목
佛 팍스 커플, 결혼 커플 비율과 유사
결혼 아닌 또 하나의 틀
팍스 중 절반 정도가 결혼으로 연결
“같이 사는 연습… 출생률 제고도 도움”
“결합이 쉬운 만큼 해체 쉬워” 우려도
프랑스 파리의 패션업계에서 일하던 이승연(40)씨는 동거 3년이 되던 해인 2014년 당시 남자친구 줄리앙과 시민연대계약(PACS·팍스)을 맺었다. 취업비자로 체류하던 그는 회사와 상관없이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싶었다. 줄리앙과 함께한 지 오래됐지만 그와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서 부모님을 설득하고 양가 상견례를 거쳐 결혼식을 올리는 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큰일’이었다.
팍스는 성인 두 사람에게 공동의 삶을 꾸려갈 의무를 지우는 대신 결혼한 사이에서처럼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는 제도다. 시장의 주례가 필요해 최대 몇 달이 걸리는 결혼과 달리 시청에 가서 출생증명서와 신분증 등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면 일주일 만에도 승인받을 수 있다.
이씨는 2018년 결국 부모님이 원해 줄리앙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팍스가 남편과 함께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팍스 후 동거하면서 불같이 싸우며 서로의 경계선을 알아 가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며 “이렇게 서로를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건 그와의 동거가 결혼을 했다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결과라는 생각이 컸던 덕”이라고 말했다.
19일 프랑스 국립인구문제연구소(INED) 등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팍스 비율이 결혼 비율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 비율에는 팍스에서 결혼으로 전환한 커플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팍스가 결혼보다 청년 세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팍스가 사실상 미혼과 기혼의 중간단계로서 역할을 하며 결합의 부담을 낮추고 궁극적으로 출생률 제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의 잠정 합계출산율은 1.68명으로 한국의 2배 수준이다.
◆‘공동의 삶’이라는 대안
팍스는 결혼을 거부하거나 결혼이 어려운 커플에게도 법률적 테두리를 부여하기 위한 취지로 1999년 도입됐다. 당장 파트너와 결혼하기에는 두려움이 있거나 이혼 경험, 종교적 상징성 탓에 반감이 있는 이들이 팍스를 택하는 식이다.
INSEE가 발표한 최근 통계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팍스를 선택하는 커플이 결혼을 선택하는 이들만큼 많다. 2022년 결혼 커플은 24만1710쌍(53.5%)이었는데, 팍스 커플은 20만9827쌍(46.5%)이었다. 해마다 생기는 법적 결합의 절반 정도가 팍스인 셈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이동제한령이 발동된 2020년에는 사상 처음 팍스(17만여건)가 결혼(15만여건) 건수를 앞지르기도 했다.
크리스토프 베르니에 파리1대학 판테온 소르본 법학대학 교수는 팍스가 목적에서부터 결혼과 다르다고 말했다. 프랑스 시민법(Code Civil)은 결혼을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두 사람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한편 팍스는 ‘공동의 삶을 조직하기 위해 맺는 계약’으로 정의한다. 베르니에 교수는 “결혼한 관계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연금이 자동으로 파트너에게 승계되는 반면, 팍스에선 그렇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며 “한 사람이 죽으면 두 사람의 관계도 끝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9년 팍스를 맺은 박선정씨는 “프랑스에서 결혼은 보수적인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누이도 팍스를 맺고 있는데 ‘결혼이 왜 하기 싫냐’고 묻자 ‘보수적인 제도’라서 싫다고 하더라”라며 “체류 등의 이유로 남편과 2022년 결혼했는데 팍스와 달리 온 가족의 일이 됐다”고 했다.
팍스를 택하는 데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올해 팍스를 맺은 세드릭(35)과 알렉시(36)는 결혼식 비용을 차라리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하는 데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세드릭은 “결혼이라는 행사는 여전히 ‘성대한’이란 형용사가 붙는다”며 “결혼하는 친구들을 보면 돈을 빌려서 할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팍스는 행정적인 절차라 비용이 필요 없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부담이 없다”며 “팍스는 결혼이라는 값비싼 ‘의식’을 소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출생률도 높일 수 있어”
일각에선 팍스가 결합이 쉬운 만큼 해체도 쉬워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팍스가 사실상 약혼을 대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파리 5구청에서 팍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발레리 바쇠르 행정관은 “팍스를 맺은 뒤 얼마 뒤에 결혼하는 이들이 많다”며 “결혼 전에 약혼하는 것처럼 팍스를 통해 마치 같이 살아보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파리에서 팍스 커플 수가 결혼 커플에 버금갈 정도인 만큼 앞으로도 팍스는 유지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윌프리드 로 INED 선임연구원은 2019년 발표한 글에서 “팍스 중 절반 정도가 결혼으로 이어진다”며 “팍스는 시기상조로 보일 수 있는 결혼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커플들이 결혼을 더 먼 미래의 목표로 삼고 우선 팍스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솔라즈 선임연구원은 팍스와 같은 제도가 도입된다면 한국의 출생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아이를 낳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결혼 안에서만 가능하다”며 “결혼이 아닌 다른 형태의 커플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출생도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인구학자로서 판단”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도 결혼과 비혼 사이 간편하고 가벼운 무언가가 생긴다면 청년층의 선택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제언했다.
베르니에 교수도 의견을 같이했다. 그는 “법이라는 건 사회 변화에 맞춰 따라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진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며 “프랑스에서 팍스 그 자체가 출생률을 증가시켰다고 보긴 어렵지만 결혼이 아닌 또 하나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한국에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팍스가 출생률 제고에 만능이 아니라는 당부도 이어졌다. 솔라즈 연구원은 “한국 정부가 출생률을 염려하는 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민 정책이나 성평등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아이들이 아이들로서 즐겁게 존재할 수 있도록 압력을 덜어주고 정당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파리=글·사진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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