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오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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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에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보통 놀란다.
'위 문학 작품을 읽고 느껴야 할 감정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글을 읽고 느껴야 할 감정이 뻔하지 않냐는 거였다.
비록 그 감정의 오지선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답을 빠르게 골라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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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 | 홈스쿨링생활백서 대표
열다섯에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보통 놀란다. 다음 말을 이어가기 조심스럽다는 눈치다. 중학교 과정은 의무교육이니까, 웬만큼 대단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중퇴하지 않으리라 예상하는 것이다. 대학 진학률이 70퍼센트가 넘는 이 나라에서 중학교조차 다니지 않았다는 건 분명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런 대화 뒤에는 보통 궁금증 가득한 눈빛이 뒤따른다. 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학교 밖으로 이끌었을까. 제 발로 나간 것일까? 아니면 학교에 다닐 수 없던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자퇴의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운데요….”라는 문장으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학교에 대한 실망이 쌓여가는 과정을 겪은 뒤 자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퇴사를 결심하는 직장인이 드물 듯, 오직 한 가지 이유로 자퇴를 결심하는 학생도 드물다.
그러나 언제 ‘처음으로’ 자퇴를 고민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간결하게 답할 수 있다. 중간고사 시험지를 읽던 순간이라고.
무릇 작가들이 그렇듯, 학창 시절 나는 국어를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새 학기 교과서를 받으면 어떤 작품들이 수록되었는지 미리 읽어보고, 아무리 시험이 싫어도 국어 과목만큼은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시험지에 적힌 이 한 줄의 문장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위 문학 작품을 읽고 느껴야 할 감정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친구들은 이 문항을 ‘거저 주는 문제’라고 불렀다. 글을 읽고 느껴야 할 감정이 뻔하지 않냐는 거였다. 비록 그 감정의 오지선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답을 빠르게 골라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을 읽고 ‘느껴야 할 감정’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찾아내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그날 이후로는 국어 과목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해 다섯 개의 보기 위를 빠르게 오가는 일이 항상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늘 객관식 문항은 서둘러 풀어버리고 서술형 문항에 몰두하곤 했다. 작품을 읽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작가가 왜 이런 표현을 썼다고 생각하는지. 꼭 쓰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빼곡하게 적어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답지를 채우다 보면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된 지금은 안다. 그 답답함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문학은 독자의 감정을 단정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존재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차가운 몸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 울컥 치미는 뜨거움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밀려오는 좌절감을, 창가의 먼지를 닦다가도 문득 찾아오는 처절함을 다섯 개의 보기 안에 나열할 수는 없다.
국어 시간은 아이들이 ‘읽고 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배우는 첫걸음이다. 그러니 그 시간이 더 폭넓은 감정과 다채로운 언어로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많은 학생이 내 마음에 꼭 맞는 단어를 찾아낼 때의 환희를 알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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