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수탁받다'란 말은 없어요
점입가경, 가관, 천고마비, 청천벽력, 요령, 횡설수설, 장광설, 엉터리, 주책, 독불장군…. 전혀 연관성이 없는 말들을 나열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의미변화를 일으킨 말이란 점이다. 특히 그것도 거의 정반대 쓰임으로 굳어진, 독특한 우리말 유형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 중 ‘점입가경’의 중복표현 여부에 대해 살펴보자.
‘갈수록 점입가경’은 중복 표현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들어갈수록 점점 재미가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더욱 꼴불견일 때 “점입가경이다”라고 한다. 이를 흔히 “갈수록 점입가경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대개는 무심코 이렇게 말하지만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쓰기도 한다. 점(漸)이 ‘차츰, 점점’이란 뜻의 말이다. 그러니 앞에 ‘갈수록’을 붙이는 것은 중복 표현 아니냐는 지적이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같은 표현은 ‘겹말’을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대표 사례다. 겹말이란 처갓집이나 전선줄, 고목나무, 역전앞, 전단지, 동해바다와 같이 같은 뜻의 말이 겹쳐서 된 말이다. 사전에서는 이들 가운데 단어화한 말을 따로 올려 공식적으로 표준어 대접을 하고 있다. 처갓집을 비롯해 전선줄, 고목나무 따위가 그것이다. 이에 비해 역전앞, 전단지, 동해바다 같은 말은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같은 유형의 말이지만 아직 단어로 처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들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쓴다면 ‘오류’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런 것들은 단어 차원에서 드러나는 중복(잉여) 표현이라 비교적 눈에 잘 띈다.
구(句) 차원의 중복은 눈치채기가 훨씬 어렵다. 앞에 예로 든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같은 유형이 그런 예다. 글쓰기에서 범하기 쉬운 이런 중복 표현 중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더 살펴보자. ① 허송세월을 보내다(한일 간에는 과거사 논쟁으로 꼭 필요한 협력체제조차 외면한 채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 허송세월한) ② 과반을 넘다(국회 동의 못 받은 장관 ‘과반 넘을’ 듯 → 절반 넘을) ③ 심도 깊은(○○○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 깊은) ④ 수혜를 보다(글로벌 경기회복으로 원자재가 강세 흐름을 보이면 브라질이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됐다. → 혜택을 볼) ⑤ 수탁을 받다(이 연구소는 중소기업의 ‘수탁을 받아’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한다. → 위탁(의뢰)을 받아)
‘위탁생산-수탁생산’ 구별해 써야
이들은 ‘간결함’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 기사 문장에서 웬만하면 기피하는 표현들이다. ① ‘허송세월’은 하는 일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내는 것을 뜻한다. 무심코 ‘보내다’를 덧붙이기도 하는데, 불필요한 군더더기다. 다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용례에 있다. 처갓집·전선줄 같은 말이 사전에 올랐듯 이 정도의 중복 표현은 허용한다는 뜻이다(이 대목에서 그 ‘기준’에 대한 논란이 생긴다. 다음 호에서 이를 살펴보자). ② ‘과반(過半)’은 ‘절반이 넘음’을 뜻한다. ③ ‘심도 깊다’란 말은 요즘 잘 쓰지 않는 문어체 표현이다. 딱딱한 한자어에 중복 표현의 오류가 더해져 기피하는 말이 됐다. ‘깊이 있는’ 또는 ‘깊은’을 쓰는 게 좋다. ④ ‘수혜(受惠)’는 ‘혜택을 받음’이란 의미다. 단어 자체에 ‘받다/보다/입다’란 뜻이 들어 있다.
⑤ ‘수탁(受託)’은 ‘다른 사람의 의뢰나 부탁을 받음’을 뜻한다. 그러니 ‘수탁하다’로 충분하다. ‘이 연구소는 중소기업의 연구개발 사업을 수탁해 수행한다’가 맞는 것이다. 또는 ‘이 연구소는 중소기업의 의뢰를 받아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한다’라고 하면 된다. 특히 제약업계와 반도체업계에서 ‘수탁’을 써야 할 자리에 ‘위탁’을 쓰는 관행이 있는데,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할 우리말 오용이다. 위탁은 ‘남한테 (무엇을) 맡기는 것’이고, 수탁은 ‘남한테서 (무엇을) 맡는 것’이다. 그러니 위탁생산과 수탁생산은 엄연히 주체가 서로 다른 말이다. 관행이란 이름으로 두루뭉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방치하다가는 자칫 우리말 질서와 체계가 흐트러지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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