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 견딘 조승우 vs 거장들의 연기쇼 vs 여성 햄릿 [고승희의 리와인드]
‘미완의 혁명가’ 조승우vs거장 배우들 ‘연기쇼’
기대감 컸던 ‘여성 햄릿’은 연출 의도 모호
폐허를 향해가는 왕국. 어둠을 뚫고 은은히 빛나는 넓다란 계단 한 켠에 햄릿이 걸터 앉는다. 창백하게 빛나는 거대한 벽면에 포위된 햄릿. 매일을 견디고 분노하다 비로소 혼자 남아 ‘나’ 자신을 마주한다. 치기 어린 상념과 들끓는 분노를 덜어낸 자리는 깊어진 고뇌는 찾아온다.
‘사느냐 죽느냐 죽느냐 사느냐,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여기서 끝낼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이 곳에 있다 없다.’ (연극 ‘햄릿’ 중)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하지만 단 한 글자도 버리지 않는다. ‘햄릿의 고뇌’였던 문장들은 변주돼 자신을 객관화한 또 다른 자아를 통해 ‘인간의 고뇌’로 새긴다. 존재는 고통을 안고 살고, 인간은 ‘고통의 고리’를 끊기 위해 언제나 갈등하는 존재라는 점을 드러낸다. ‘존재의 고통’을 끊어낼 고리는 결국 ‘죽음’ 뿐인 것인가, 동의하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알기에 인간은 고뇌한다. 세기를 넘나들며 회자된 명대사는 조승우를 통해 이렇게 태어났다.
올 한 해 세 편의 ‘햄릿’이 관객과 만났다. 신시컴퍼니가 올린 거장 배우들의 ‘햄릿’과 국립극단이 올린 ‘여자’ 햄릿에 이어 예술의전당이 제작한 조승우의 ‘햄릿’은 마지막 주자로 이름을 올렸다.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일 지라도 같은 연극이 한 해에 세 번이나, 그것도 각기 다른 해석으로 관객과 만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신유청 연출가는 ‘햄릿’이 이토록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요즘처럼 책임이라는 단어가 엄중하게 다가온 적은 없다”며 “햄릿은 언제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한 달간의 여정을 마친 ‘햄릿’(예술의전당 토월전통연극)은 배우 조승우의 첫 도전작으로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됐다.
‘햄릿’은 영예로운 왕관이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수도 없이 무대에 올랐다. 권력과 암투, 체제 전복과 항거를 담은 정치극이자 사회극인 ‘햄릿’은 배우들이 표현할 수 있는 연기폭이 넓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장르를 아우르며 존재를 증명해왔던 조승우는 이번에도 뜨거운 반응을 가져왔다. 10분 만에 한 달치 연극의 전석, 전 회차를 매진시켰고, 한 달간 2만여 명의 관객을 자신의 연기로 설득했다.
조승우의 ‘햄릿’은 올해 무대에 올려진 세 편 중 분량이 가장 길었다. 장장 185분(인터미션 20분 포함). 긴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무대는 압도적이었다. 방대한 대사를 단 한 자도 머뭇거리지 않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선은 무대 위에 무지개처럼 찬란히 내려앉았다.
‘햄릿’은 배우 조승우가 성취한 ‘(연기)예술의 경지’를 보여준 무대였다. 조승우의 햄릿은 죽음으로 새 세계를 세운 ‘미완의 혁명가’였다.
그는 구시대에 맞서 새 세상을 열고 싶었지만, 단호하게 세계를 설계하기엔 복잡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 부왕을 잃은 슬픔, 아버지의 동생과 한 침대를 공유하는 어머니, 형의 아내와 국왕의 자리를 동시에 차지한 삼촌…. 험악한 가정사에선 어머니의 치정에 분노를 쏟아내고, 삼촌의 간계엔 통탄하는 아들이었다. 감정의 깊이를 표현할 장면마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객석에선 조승우의 입술과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포착됐다.
그는 황당한 현실 속에서도 진보한 시대를 열망하며 덴마크의 멸망을 예견했다. 연극 곳곳엔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혁신가 햄릿의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시대의 관절이 모두 어긋나 버렸어. 그걸 바로잡는 일, 그 저주가 내 운명이었다니…”라며 탄식한다.
길고 깊은 계단에 서 음모와 암투의 무리들을 굽어보면서도, 그는 책 한 권을 손에 쥔 채 사색하는 이상주의자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지금은 뒤틀린 시대의 전복을 위한 웅크림의 시간일 뿐, 굳건한 의지가 빚어내는 카리스마가 시종 연약한 내면을 갈갈이 찢고 나왔다. 우유부단함의 대명사이던 햄릿이 매력적인 인물로 변모한 이유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로젠크란츠(이강욱 분)와 길덴스턴(전재홍 분)이다. 두 사람은 햄릿의 오랜 친구이면서 그를 염탐하는 배신자이나 코미디를 하는 광대들처럼 어리숙한 모습으로 나온다.
‘문학의 시대’가 도래한 이래 가장 복잡한 인간인 햄릿은 조승우를 통해 실감나게 살아났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와 삼촌의 부적절한 재혼을 마주하는 햄릿의 트라우마는 불안한 눈동자에 실렸다. 혼탁한 시대를 향한 통곡, 그 시대를 바로잡아야 하는 처절한 의지를 새기면서도 준비되지 않은 미숙한 왕자의 절망도 함께 드러낸다. 시대 개혁을 꿈꿨던 햄릿의 이상은 그의 유훈으로 실현된다. 세 편의 ‘햄릿’ 중 유일하게 원작 햄릿의 유언을 살린 무대다.
올해 공연한 ‘햄릿’ 중 원작을 가장 충실하게 살린 이 무대는 오롯이 조승우를 위한 것이었다. 원작이 표현한 대로 햄릿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해석의 방향성을 따라 조승우는 무대 위에서 공작처럼 화려한 날개를 폈다. 햄릿이 돋보이도록 무대 중앙에 23m 길이의 긴 계단을 뒀다. 그를 ‘패션쇼 런웨이의 주인공’처럼 보이기 위한 장치다. 햄릿을 위한 무대였던 만큼, 햄릿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정반대의 무대는 지난 9월 3개월의 대장정을 마치고 막을 내린 ‘연극계 거장’ 손진책 연출가의 ‘햄릿’이다. 이 무대는 연기 인생 60여 년의 배우 이호재(83)·전무송(83)을 필두로 박정자(82)·손숙(80)·김재건(77)·남명렬(65)·박지일(64) 등 중견 배우와 3040 젊은 배우들이 함께 어우러진 무대였다.
무대는 거장들의 ‘연기 차력쇼’를 방불케 했다.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직조한 ‘햄릿’의 세계에선 무대에서 일생을 바친 배우들의 아우라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왔다. 빈틈없이 채워진 연기 호흡은 연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기존 배우들과는 또 다른 기운을 전달한다. 숨막히는 긴장감이라기 보다, 거대한 아우라였다. 깊고 검은 심해로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은 힘이었다. 부지불식 간에 속절없이 빠져든 곳에 명배우들이 남긴 연기의 여운이 자리했다.
배삼식 작가가 각본을 맡고 손진책 연출가가 진두지휘한 ‘햄릿’은 ‘삶과 죽음’의 관점으로 다시 쓴 ‘햄릿’이다. 산 자의 시선으로 죽은 자를 바라보며 생의 의미를 돌이킨다. 선왕, 클로디어스, 거트루드, 폴로니우스, 광대들은 물론 햄릿, 오필리어, 레어티즈까지 저마다 존재감을 발했다. 놀랍게도 이 배우들은 서로를 밀고 당기고 배려하며 힘의 균형을 맞췄다.
이 작품은 연극이 언제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대중문화계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일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은 이 작품 속 거대악과 다름 없는 클로디어스의 독백을 통해 속내를 드러냈다. “내게도 길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한 줄의 대사는 막다른 길에 몰려 저마다의 생을 찾으려다 서로를 흠집내는 아귀 다툼 속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손진책 연출가는 ‘삶과 죽음’을 응시한 이 무대를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만들었다. 연극의 시작과 끝을 거대한 원형 무대에 산 자와 죽은 자를 뒤섞여 세운 뒤 생사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에게 ‘삶의 의미’를 질문한다. 인간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연극이었기에 이 무대에선 포틴브라스의 존재는 지워졌다.
비슷한 시기 함께 무대에 오른 ‘햄릿’은 국립극단의 작품이다. 정진새가 각본을 쓰고 부새롬이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배우 이봉련이 햄릿을 연기했다. 작품은 한국 최초의 ‘여성 햄릿’이라는 점에서 더 많은 관심을 모았다. ‘여성 햄릿’의 등장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작품 곳곳에 던져진 여성혐오성 대사(‘인간은 나의 기쁨일 수 없어. 여자 역시 나에겐 기쁨이 아니야’,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 등등)가 다른 방식으로 적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극중 햄릿은 구시대의 악습과 관행에 항거하려는 치기 어린 젊은 공주였다. 공주는 어머니를 품은 삼촌에게 덴마크를 빼앗겨 ‘자기 것’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관계의 설정과 햄릿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를 향해 “당연히 ‘네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는 클로디어스의 대사는 햄릿의 저항보다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설정은 ‘꼰대’처럼 보이나 그의 말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나한테서 배운 걸 네 말이라고 착각하는 거지? 너의 말들, 생각들, 힘들이 나한테서 온거다”라는 클로디어스의 대사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햄릿을 향한 팩폭(팩트 폭행)’이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 사상, 말은 시대를 거쳐간 사람들의 의견과 그들의 세계를 빌려온 것이라는 시대불변의 진리가 이 안을 관통한 것이라 할만 하다.
주변 인물들이 공주 햄릿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이 작품에 다소 물음표를 던지는 장면이다. 삼촌과 어머니는 물론, 절친이면서 감시자인 두 친구 등 햄릿의 주변인들은 모두 햄릿을 안하무인 천방지축에 철부지로 바라본다. 작가와 연출가는 이 작품을 통해 “극명한 세대 갈등을 드러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빼앗긴 권리’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연출 의도가 선명히 전달되진 않았다. 연출가의 디렉션, 각본의 의도가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아서다.
무대가 끌고 간 방향은 정치극이다. 두 세대를 통해 구시대와 새시대의 대립, 그들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한 왕조는 결국 새로운 혁명가(포틴브라스)의 점령으로 완전히 몰락한다. 현재 유럽 무대에서 많이 보여주는 해석의 방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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