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보다 더한 진리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 시인 2024. 11. 1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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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진이정 시인의 시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존재의 시작이자 끝을 품은 것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하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저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량겁 후에 단지 한 줄기 미소로밖엔 기억되지 않은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 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나>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년.

1993년 11월 19일, 폐결핵으로 타계한 진이정 시인. 그때 나이 서른네살이었다. 이렇게 좋은 시를 쓴 시인이 그렇게 일찍 가다니!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애통해서 한숨을 내쉬게 된다.

시간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서양에서는 14세기 때 누군가가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이라는 말을 했다. 시간과 계절(혹은 조수)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는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이라는 시를 썼다. "젊은이가 늙기는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려우니 촌음의 시간도 가벼이 보내서는 안 될 터, 연못가 봄풀의 꿈이 채 깨기도 전에 계단 앞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지 않느냐"는 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시간을 화살이나 흐르는 물에 비유했다. 그만큼 황급히 달아나는 게 시간이라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진 | 문학동네 제공]

진이정은 시간이라는 존재에 어떤 이름을 붙일까 고민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라고 했으니, 자신의 이른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듯하다. 종교마다 '사후 세계'의 견해가 다른데, 시인은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가 당신에게로 다가갈 좋은 날 있을 것일까요" 하면서 사후를 '안식'의 세계로 인지했다. 시인은 의인화한 시간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부른다.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나>의 슬픈 반짝임,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하고 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둥그런 자궁 안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며 열달을 살다가 세상에 나왔다. 이리 치이고 저리 돌리다 움직임이 멎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것보다 더한 진리가 어디 있으랴. 그 어떤 권력과 영광도, 부귀와 명성도 죽음 앞에서는 "솜털 연기 나비"가 아니랴. 진이정 시인 자신이 이 진리를 말해주고 갔다.

이승하 시인 | 더스쿠프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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