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 현실화…한국 저성장 늪에 빠지나
차 IRA 존폐 위기·232조 적용 촉각·더 많은 국가에 관세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한국 경제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와 재정 확대가 촉발할 고환율·고금리·고물가에 따른 ‘신3고’가 시작될 거라는 우려에서다. 지난 11월 13일 원달러 환율은 장중 1410원을 넘어 2년여 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당선인이 재집권하면 한국 경제가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코스피는 2417선까지 밀려 최근 1년 중 최저로 떨어졌다. 다음날인 지난 11월 14일에는 ‘블랙먼데이’(폭락장이 나타난 지난 8월5일) 사태 이후 처음으로 장중 2400선이 깨졌다. 트럼프노믹스(트럼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우려가 선제적으로 반영되면서 통화가치와 주가는 다른 나라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졌다. 한국은행은 환율을 고려해 금리 인하 속도를 조절하는 만큼 최근 이어지는 고환율은 오는 11월 28일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 동결 압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원달러 환율은 미국 대선 개표가 시작된 지난 11월 6일 1404원까지 뛰며 약 7개월 만에 다시 1400원대를 밟은 후 11월 13일에는 장중 1410원 위에서 거래되며 2년 중 최고점을 찍었다. 11월 14일 금융 당국이 구두개입에 나섰지만 1400원대 안팎에서 변동을 거듭하고 있다. 외환시장에선 원화 약세 흐름이 당분간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트럼프의 관세 부과와 감세, 반중국·반이민 정책 등이 미국의 금리 상승을 자극해 달러 강세가 지속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 재무부는 지난 11월 14일(현지시간) ‘주요 교역 대상국의 거시경제 및 환율 정책’ 반기 보고서에서 한국을 ‘환율관찰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미국이 한국을 환율 조작 가능성이 있는 요주의 국가로 꼽았다는 의미다. 대상국에는 중국·일본·싱가포르·대만·베트남·독일 등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한국은 2016년 4월 환율관찰 대상국에 올랐고 7년여 만인 2023년 11월 명단에서 빠졌다가 1년만에 다시 포함됐다.
한국은 평가 기준 중 ‘150억달러 이상의 대미 무역 흑자’, ‘경상수지 흑자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에 해당해 대상국으로 분류됐다. 다만 환율관찰 대상국은 ‘모니터링’ 대상일 뿐 제재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미 대선 후 통상 정책 변화로 수출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어 대상국 지정은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정부가 풀어야 할 경제 정책의 난도가 더 올라갔다.
■ 트럼프 취임 앞 환율관찰대상국 지정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중국산에 60% 관세를 부과할 뿐만 아니라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 관세를 매기겠다고 했다. 트럼프 정부 출범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에 미국 국고채 금리는 상승했다. 수입 관세 인상과 이민자 추방 등 트럼프 당선인의 공약 실행으로 인건비와 물가가 높아지면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기준금리 인하 속도를 늦추거나 중단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지난 11월 14일(현지시간) 댈러스에서 열린 연방준비은행 주최 행사에서 “인플레 압력을 감안해 금리를 신중히 내리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낮추면서 3년 2개월 만에 통화 정책 방향을 전환한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인하를 서두르기가 어려워진다. 미국이 인하를 머뭇거리는데 한국만 금리를 더 낮추면 현재 1.50%포인트인 한국(3.50%)과 미국(4.50∼4.75%)의 금리 격차가 벌어져 외국인 자금 유출과 환율 상승 압박이 더 커진다. 환율이 뛰면 국내 수입 물가가 올라 소비자 물가를 다시 들썩이게 할 수 있다. 한은의 금리 인하가 늦어지면 침체한 내수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JP모건과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애초 2%대로 전망한 내년 한국 성장률을 트럼프 당선 후 1%대로 일제히 하향 조정한 이유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한국에 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할 경우 대미 수출액은 304억달러(약 42조원), 총 수출액은 448억달러(약 62조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한다. 지난해 한국 수출액(6322억2600만달러)의 8%가 줄어드는 것이다. 트럼프 1기 때는 2018년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은 2019년 총수출액이 전년보다 10% 감소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소득세, 법인세 등 각종 감세 정책으로 줄어든 세수를 관세로 메우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내우외환에 빠진 한국 경제의 숨통을 트이게 하기 위해선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 교수는 “미국이 다른 나라 기업과 공장을 데리고 오기 위해 법인세 등의 각종 세제 혜택으로 감세를 하면 한국도 장기적으로는 법인세를 내려야 할 수 있다”며 “내수를 살리고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보조금 지원, 법인세 감소 등에 따른 세수를 마련하기 위한 종합적인 세제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율 관세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도 한국에 상당 기간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중국산 수입품에는 60%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트럼프 당선인의 공약이 현실화하면 중국도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1기 때도 중국은 농산물 등 무역장벽을 도입하고 보복 관세를 매긴 데 이어 희토류 수출을 통제했다. 미국의 견제로 중국 완제품의 대미 수출이 줄면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한국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 한은이 지난 8월 발표한 ‘공급망 연계성을 고려한 대중국 수출 평가와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트럼프 당선인 공약대로 관세가 인상되면 한국의 대중 수출연계생산이 6% 이상 감소한다. 수출연계생산은 중국의 최종 생산에 쓰일 목적으로 한국에서 생산된 모든 단계의 중간재를 포괄하는 지표다. 게다가 트럼프 2기는 1기에 비해 더 많은 국가를 대상으로 공격적인 통상정책을 예고했다. 베트남과 멕시코, 인도 등 신흥국을 대상으로 관세 전쟁이 확전할 수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1기 때와 달리 2기 때는 중국 외에도 미국이 무역적자를 보는 신흥국들에 대해 다양한 보호무역주의 통상 정책을 펼칠 것”이라며 “특히 베트남은 IT(정보기술) 부문을 중심으로 한국산 중간재를 가공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산업 구조가 자리 잡아 한국 기업에도 큰 타격이 될 수 있고 1기 때보다 (무역전쟁으로 인한 위협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어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 관세 전쟁에 성장률 1%대로 하락
수출 주력 업종인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업계도 불확실성 확대로 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반도체 지원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축소 또는 폐기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인 IRA의 골자는 청정에너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수백억달러의 보조금을 세액공제 등의 형태로 지급하는 것이다.
앞서 트럼프 당선인은 IRA를 ‘그린 뉴 스캠(Green New Scam·신종 녹색 사기)’이라고 비판하며, ‘전기차 의무화’를 끝내겠다고 밝혔다. 지난 11월 15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트럼프팀이 미국의 IRA에 근거한 전기차 세액공제의 폐지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감세 공약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면 전기차 세액공제를 폐지해 예산을 절약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최대 전기차 판매업체인 테슬라 측은 정권인수팀에 보조금 폐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전기차 보조금이 폐지되면 전기차 판매에 영향을 미치고, 전기차 판매가 줄면 전기차 생산업체는 물론 배터리 제조업체에도 영향을 받는다.
다만, 자동차·배터리 업계는 IRA 전면 백지화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IRA 혜택을 받기 위해 타국 업체들이 공장을 지은 조지아·미시간·오하이오 등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공업지역이다. 이 때문에 공화당 내부에서도 지역구 이해관계가 달라 반발이 적지 않다. 또 IRA 폐지로 현지 공장 설립이 무효가 되면 일자리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시행을 위한 세부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외부에선 IRA 폐지 여부를 놓고 말이 많은데, 속도와 시간의 문제일 뿐 전동화로 가는 장기적인 큰 틀의 방향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는 IRA보다 보편관세에 더 긴장하고 있다. 미국은 글로벌 최대 자동차 시장이다. 한국산 자동차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육박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1∼9월 미국 자동차 수출 무역수지 흑자는 248억달러(약 35조원)로 한국의 전체 수출 품목 중 가장 많다. 무역협회가 지난 11월 13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개최한 ‘2024년 미국 선거와 글로벌 경제통상환경 변화 세미나’ 에서는 한국이 대미 무역에서 큰 흑자를 내는 자동차 분야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트럼프는 집권 1기 시절인 2018년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근거로 연방의회 승인을 거치지 않고 수입 철강·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했고, 자동차에도 부과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62년에 제정된 무역확장법 제232조는 미국의 통상 안보를 해친다고 판단될 경우 수입량 제한, 고율 관세 부과 등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제232조 적용은 한·미 FTA 위반 소지가 있어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1기 때도 관세를 올리려 했을 때 현대차가 미국 내 공장 설립이나 신규 투자를 약속해 관세를 낮춘 것처럼 2기 때도 한국 기업들의 추가적인 투자나 조건을 내걸고 미국 자동차 산업을 부활하려는 협상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칩스법도 전면 폐기보다는 미국 반도체 업체 지원 비중을 더 높이거나 동맹국에 보조금 지원 요구 조건을 높일 가능성이 거론된다. 하지만 지원금 규모 축소나 현지 투자에 대한 요구 조건 강화는 생산설비 투자자금과 운영비용 증가로 기업들에 수익성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 2030년까지 총 45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인디애나주에 인공지능(AI) 메모리용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는 데 38억7000만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 대중국 제재로 반사이익 전망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대중국 제재를 강화할 경우 한국 기업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중국 메모리 기업들의 약진으로 삼성전자가 레거시(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매출 타격을 입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첨단 반도체 성장 지체로 이어져 한국에 반사이익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에 대한 제재가 심해지면 레거시 분야 장비 도입 허용 등이 전부 차단되고 메모리 시장에서 중국의 추격 속도에 제동을 걸 수 있어 한국엔 기회가 될 수 있다”며 “반도체 산업은 (트럼프 재집권 후에도) 큰 틀의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반면 조선과 방산, 원전, 정유 등 미국이 산업적으로 필요로 하는 업계는 활황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화석 경제를 부흥해 자국 내 에너지 가격을 확 낮추고, 에너지 수출도 늘려 미국의 무역수지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미 무역수지 균형을 위해 가스를 중심으로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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