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돌아온 빨간 땅에서 ‘파란 우정 팔찌’ 차는 백인 여성 [워싱턴 아나토미]
“트럼프 안 찍었다” 틱톡발 연대 운동
여성해방 vs 여성혐오 극단 치닫기도
“상대 악마화 변화 추동 무망” 자제론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백인 여성 동지 여러분, 우리가 어느 편인지 서로에게 어떻게 신호를 보내야 할까요?”
2024 미국 대선 이튿날인 6일(현지시간) 아침 미네소타주(州)에 사는 리비가 이렇게 묻는 쇼트폼(짧은 동영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틱톡에 올렸다. 차 안에서 찍은 영상이었고 카메라에 담긴 그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학교에 아이를 데려다줬는데, 이 빌어먹을 여자들을 더는 못 믿겠어요.”
대선 승부는 예상보다 일찍 결정됐다. 선거전 내내 남성에게 구애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접전이 예상되던 경합주에서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리비의 원망 대상은 트럼프 당선자에게 투표한 백인 여성이었다. 백인 여성 52%(최종 53%)가 트럼프, 45%는 해리스를 찍었다는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가 6일 새벽 공개된 터였다. 리비는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 ‘파란 우정 팔찌’(blue friendship bracelets) 같은 거라도 끼어 볼까요?” 우정 팔찌는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팬덤이 만든 문화다. 스위프트는 9월 대선 TV 토론 직후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다.
리비의 영상은 당장 호응을 이끌어냈다. 한 해리스 지지자는 “나 같은 (백인) 여성 52%가 그(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다른 이들이 나를 그들의 일부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게 창피하고 싫다”고 털어놨다. 영상은 하루 만에 3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들불처럼 퍼졌다. 실망했을 유색인종 여성에게 연대감을 표시해야 한다는 주장, 흑인 여성이 운영하는 보석 업체에서 팔찌를 구매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미국 패션잡지 글래머는 “트럼프 지지자와 자신을 구별하려는 해리스 지지자의 시도가 소셜미디어 운동으로 커졌다”고 평가했다.
백인 여성 내전, 젠더 대결 2라운드
미국 대선 후유증은 백인 여성 내전에 그치지 않았다. 투표가 끝나자 ‘젠더(성별) 대결’도 2라운드에 돌입했다. 7, 8일 영국 가디언,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뉴욕타임스(NYT) 등 진보 성향 언론들이 트럼프 승리에 좌절한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의 급진적 페미니즘(여성해방주의) 운동인 ‘4B 운동’에 눈을 돌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앞다퉈 소개했다.
‘4B’는 네 가지 ‘비(非·거부)’, 즉 비연애·비성관계·비혼·비출산을 의미한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2018년 널리 퍼진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불법 촬영 △교제 폭력 △성별 임금 격차 등을 배경으로 2019년쯤 태동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5일 미국 대선 직후 구글에서 ‘4B 운동’ 키워드 검색이 5,000% 넘게 급증했고, 6일엔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많이 검색된 문구가 됐다. 조지아주에 거주하는 미셸라 토머스(21·여)는 7일 WP에 “젊은 남자들은 성관계를 바라면서도 우리가 임신중지(낙태)를 하지 못하기를 원한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 등장한 극단적 반응은 ‘여성 혐오’로도 표출됐다. 8일 미국 싱크탱크 전략대화연구소(ISD)는 5일 대선 직후 24시간 동안 SNS 엑스(X)에서 여성 혐오 표현으로 분류되는 ‘네 몸, 내 선택’(your body, my choice), ‘부엌으로 돌아가라’(get back to the kitchen)가 4,600% 증가했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전형적 ‘백래시’(진보적 변화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다. 여성 재생산권(스스로 출산을 결정할 권리) 지지 구호 ‘내 몸, 내 선택’을 비꼰 ‘네 몸, 내 선택’은 백인우월론자로 유명한 극우 논객 닉 푸엔테스의 5일 엑스 게시물 ‘네 몸, 내 선택. 영원히’가 발원이다. 성폭행 위협을 담은 유사 메시지도 나돌았다. ‘부엌으로 돌아가라’는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담고 있다. ISD는 “매노스피어(Manosphere·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 인플루언서들이 트럼프 당선을 재생산권과 성평등 요구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며 대담해졌다”고 해석했다.
‘여혐 대통령’ 트럼프 재등장 공포
트럼프 당선자는 ‘여성의 적’에 가깝다. 여성 비하·혐오 발언뿐 아니라 성범죄 이력이 있는 데다 임신중지권에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1996년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패션 칼럼니스트 E 진 캐럴의 주장은 지난해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됐다. 성추문 입막음 건으로 재판도 진행되고 있다.
패닉은 가시적이다. 7일 AP통신은 트럼프 승리 뒤 미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닷컴에서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1985년 펴낸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가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전했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집권으로 극단적 남성 가부장제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가상 미국을 그린 소설이다.
내년 1월 트럼프 당선자 취임을 앞두고 임신중지약을 비축하려는 이들도 늘었다고 WP가 11일 보도했다. 트럼프는 근 반세기 임신중지권을 보장하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연방대법원이 2022년 폐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집권 1기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임명해 대법의 이념 지형을 재편했기 때문이라고 자랑해 왔다.
엑소더스 조짐마저 보인다. WP는 트럼프 당선 직후 ‘해외 이주’ 검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며 유망한 이주 대상 국가를 추천하는 기사를 11일 실었다. 트럼프 당선 일등 공신인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의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딸 비비언 제나 윌슨도 6일 SNS 스레드에 “내 미래가 미국에 있을 것 같지 않다”며 해외 이주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당선자는 성소수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트럼프 시대’를 맞는 여성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정서는 공포다. WP가 10일 공개한 여성 5,600명 대상 설문 결과를 보면 641명이 ‘두렵다’(scared)고 반응했다. 980명이 언급한 ‘권리’(rights) 다음이지만 감정 중에는 맨 앞이다.
2016년 힐러리 패배 데자뷔
대선 당일인 5일 NBC 등 4개 미국 방송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에디슨리서치가 실시한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성별 대결 양상이 뚜렷하다. 여성은 53%가 해리스, 45%가 트럼프에게 각각 투표했다. 반면 남성의 경우 55%가 트럼프, 42%가 해리스를 찍었다. 규모 면에서 1, 2위 인구 집단인 백인 여성(53%)과 백인 남성(60%)에는 트럼프 편이 더 많았다.
두 후보 모두 성별 결집을 시도했다. 공통적으로 활용하려 한 감정은 공포였다. 해리스는 임신중지 금지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여성에게 경고했고, 트럼프는 권력이 여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며 남성을 포섭했다. 성공한 편은 트럼프였다.
결정적으로 백인 여성 집단이 해리스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았다. 트럼프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상대했던 2020년 대선 때보다 여성 대상 지지율 격차를 15%포인트에서 8%포인트로 줄이고, 남성 대상 격차는 8%포인트에서 13%포인트로 늘렸다.
배경은 논란거리다. 진보 성향 영국 매체 프로스펙트는 페미니즘 운동의 위기로 진단했다. “피로감이 쌓이는 와중에 트럼프가 백래시를 노골적으로 구현했고, 성 역할에 관한 한 미국이 보수적 국가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8일 분석했다.
파란 팔찌류 운동은 응어리 해소를 위한 카타르시스용일 뿐이라는 게 일각의 비판이다. 투표 설득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곧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2016년 대선 전후 여성 사이에서 유행했던 안전핀이나 ‘푸시햇’(분홍색 고양이 모자) 착용의 반향도 크지 않았다.
NYT는 6일 “미국은 248년 동안 남성이 이끌어 왔고, 앞으로 최소 4년은 더 그렇게 될 것”이라고 개탄했다. 여성은 2016년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 대통령을 배출할 기회를 놓쳤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패한 상대에게 해리스 부통령도 졌다.
미국 페미니즘 진영이 전략을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NYT 칼럼니스트 카미 리크는 10일 “남성을 악마화하고 여성 참여 저변을 좁히는 4B 운동식 대응으로는 변화를 추동할 수 없다”며 불평등한 가사 의무를 거부하거나 차별적인 회사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이는 방식이 더 낫다고 조언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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