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응강
기자 2024. 11. 17. 21:44
그늘이나 응달이 고향에서는 응강인데 꼭 응강이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시래기는 뒤란 처마 밑 응강에서 꼬들꼬들 말라갔으며 장두감을 설강 위 응강에 오래 두어야 다디단 홍시가 되어갔는데, 무엇보다도 어릴적 마루청 밑 짚가리 응강 속에서 달걀을 훔친 내가 흠씬 종아릴 맞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잠들어버린, 고향에서는 정지라고 부르는 부엌 구석 어둑한 응강의 찬 기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하였으니 거기가 서늘하고 깊고 시퍼런 물줄기를 가진 강 중의 강이기는 하였던 모양
이봉환(1961~)
“응강” 하고 발음하면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강가에 서 있는 것 같다. 시인의 고향에서 응강은 “그늘이나 응달”이었다. 그늘은 춥기도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곳. 시인을 늘 따라다니는 눈물 자국 같은 것.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기억의 문을 열면, “마루청 밑 짚가리 응강 속에서 달걀을 훔친” 시인이 “흠씬 종아릴 맞고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잠들어” 있다. 기억의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시인은 잠이 든 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너무 슬프면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응강은 꼭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만은” 아니었다. 김장하고 남은 무청들은 그 서늘한 응강에서 시래기로 꼬들꼬들하게 말라갔고, 장두감(대봉)은 말랑하고 다디단 홍시가 되어 겨울 한철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부엌 구석에 모인 “어둑한 응강”의 “찬 기운”으로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했으니, 그 서늘하고 깊은 그늘, 응강이야말로 “시퍼런 물줄기를 가진 강 중의 강”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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