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11월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독일 성별 스스로 결정… 한 달간 1만5000명 신청.” 최근 나온 기사들의 헤드라인이다. 독일에서 어떠한 조건도 없이 등기소에 신고만 하면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성별자기결정법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이러한 법률이 성범죄자에 의해 악용되어 여성, 청소년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고 스포츠의 공정성도 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얼핏 건조하게 다양한 입장들을 전하는 기사 같지만 핵심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어떻게 독일이 이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독일은 이 사안에 있어 후발주자이다. 2012년 전 세계 최초로 성별자기결정법을 만든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그 후 현재까지 덴마크, 아일랜드, 콜롬비아, 우루과이 등 전 세계 20여개국에서 어떠한 조건도 없이 성별을 변경할 수 있다.
이들 20여개국의 인구수를 고려하면 12년간 아마 수백만명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성별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로 인해 세상이 더 위험해졌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정체성에 따른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할 권리를 보장받았고, 아마 인류 전체의 행복도는 조금 더 올라갔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들을 보며 독일은 뒤늦게 인권을 위한 변화에 동참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 달간 1만5000명이라는 숫자는 마치 독일의 결정으로 기존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위협을 준다. 숫자가 주는 왜곡이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을 적극 활용하는 이도 있다. 지난 10월17일 조배숙 국민의힘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지난해 법원의 성별 정정 처리 허가율이 84.5%(169건)에 달하며, 성확정 수술 없이도 허가 결정이 나오는 등 성별 정정이 쉬워졌고, 이로 인해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실상은 조 의원의 지적과 전혀 다르다. 물론 몇몇 법원에서 성확정 수술 없이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기념비적인 판결이 나오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법원에서는 외과 수술, 혼인 중이 아닐 것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한다. 여전히 많은 트랜스젠더는 소위 ‘잘 되는 법원’에 신청하지 않는 한, 본인의 자유의사와 상관없이 신체침해적인 수술이나 이혼을 요구받는다. 국정감사에서 나온 169건의 상당수는 엄격한 조건을 간신히 만족시킨 이들의 숫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성별 분리된 세계에서 갈등을 겪는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얼마 전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신분증을 검사하고 탈의실로 안내받았을 때, 한 직원은 나의 외견을 보고 여성 탈의실로, 다른 직원은 신분증에 따라 남성 탈의실로 안내했다. 짧은 고민 후 남성 탈의실로 가서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이 고민되는 상황에서 건강검진도 제대로 못 받겠지 하는.
오는 11월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다. 3월31일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 있음에도 추모를 해야 하는 기념일이 또 있다는 것에,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만큼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어려움이 떠올라 복잡한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날이 있기에 함께 떠나간 이들을 그리며 서로를 돌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추모의 날을 앞두고 내가 만난 수많은 트랜스젠더들을 떠올려 본다. 몰개성한 통계가 아닌 각기 다른 개성, 성격, 꿈을 가진 얼굴을 떠올려 본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한번쯤 주변의 트랜스젠더를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설령 직접 아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고(故) 변희수 하사처럼 기사로 만났던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내가 있음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숫자가 주는 함정에서 벗어나 수많은 트랜스젠더가 그저 곁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떠나간 모든 이들을 애도한다.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이들에게 함께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건넨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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