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존경·신뢰를 위한 리더의 사과
반성·쇄신·성찰의지 약해…尹 후반기 국정동력 의문
연인이나 부부가 싸울 때 흔히 오가는 멘트가 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그냥 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께.” 이쯤 되면 주로 여성 쪽에서 부아가 치민다. “뭘 다신 안 그러겠다는 거야?” 그럼 남성도 덩달아 목소리가 올라간다. “사과했으면 됐지, 뭐가 문젠데.”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인 언급 없이 ‘어쨌든 사과했다’ 식의 사과는 상대방에게 이해도, 감동도 주지 못하고 화만 돋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고, 또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사과에도 품격이 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명확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필요하다. ‘진정성’과 ‘겸손함’이 있는 사과여야만 상대방의 용서를 받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더욱이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공인으로서 부정적 여론이 많다면 더욱 전략적으로, 똑똑하게 사과를 해야 한다.
말머리에서는 사과를 꺼냈다가, 계속 변명을 늘어 놓으면서 자기 방어만 한다면 누구도 그것을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가 딱 그랬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시작한 대통령의 담화는 “제 주변의 일로 국민께 염려를 드렸다”고 했다. 윤 대통령 본인과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이러이러한 논란에 심려를 끼쳤다고 ‘콕 찍어’ 말하는 대신, ‘주변의 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게 찜찜한 사과의 서막이었다.
어찌됐든 초반부에서는 윤 대통령이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했다. 하지만 후반부 언론과의 질의응답이 진행될수록 대통령은 분노와 억울함을 토로했고, 결국은 ‘뭘 잘못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국민이) 속상했다니 (거기에 맞춰) 미안하다’ 정도로 마무리했다. 기자회견 내내 윤 대통령은 부인을 감쌌으며 제기되는 여러 의혹은 ‘침소봉대’ ‘악마화’로 해석됐고, ‘순진한 면이 있는’ 김 여사의 역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청와대 야당’ 역할과 같았다고 자평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와의 통화에서 “김영선 (공천) 좀 해줘라 했는데, 당에서 말이 많네”라는 대통령 육성의 녹음파일을 전 국민이 들었음에도 “누구를 공천을 줘라 이런 얘기는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바이든 날리면’에 이어 또다시 전 국민의 청력 테스트가 필요해졌다.
알맹이 없는 기자회견 말미에 “두루뭉술하고 포괄적인 사과에 국민은 무엇에 대해 사과했는지 어리둥절할 것 같다” “사과할 수 있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등의 질문이 나왔고, 윤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말하기 좀 어렵지 않느냐. 어쨌든 제가 사과를 드리는 것은 처신이 올바르지 못했고 과거에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의 소통 프로토콜이 제대로 안 지켜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런 것으로 국민께서 속상해하셨기 때문에 (사과한다)”라고 답했다. 올바르지 못한 처신에 대한 해법은 ‘검사시절 쓰던 휴대전화를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명 씨의 공천개입 의혹으로 두 달여간 온나라가 들썩였음에도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 ‘휴대전화를 안 바꿨기 때문’이라는 신박한 해석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시절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자 SNS에 자신의 돌 사진을 올리며 사과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거나,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게시하면서 사과를 희화화했던 전력을 생각해보면, 이번 사과에 박한 점수가 대통령으로선 억울할까?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섰던 당시는 임기 반환점(지난 10일)을 사흘 앞둔 시점으로, 대통령 지지율 10%대로 모든 국정동력이 상실된 상태였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늘 강조하는 4대 개혁(의료 연금 노동 교육)의 성공을 확신하는 국민은 극소수고, 국정 전반기동안 기억나는 것은 대통령의 격노와 당정갈등, 김 여사 관련 의혹이 대다수다. 여권에서는 이번 회견에서 제대로 된 반성과 국정 쇄신 의지를 강력히 밝힌다면 지지율 반등과 후반기 국정 동력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가 중론이다.
책 ‘쿨하게 사과하라’(김호 정재승 공저)에서는 사과는 패자가 아닌 승자의 언어라고 했다.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리더의 언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국민에게 고개 숙이면서 시작한 140분의 회견동안 리더의 언어로 국민의 마음에 제대로 와 닿았는가. 국민적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은 채 ‘김 여사 특검법’이 세 번째로 발의된 지금,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에 몰린 윤 대통령이 2년 6개월의 후반기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가려는 것인지 의문이다.
임은정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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