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심판은 늘 늦기에…문학으로 먼저 심판한 나림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11. 1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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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18> 이병주의 사랑과 화(和) ‘비창’

- 세 번째 문학상 안긴 작품 ‘비창’
- 신문에 연재되고 영화로도 제작

- 남부러울 것 없는 역사철학 교수
- 출생에 얽힌 아픔과 부부 갈등
- 개인 이야기를 역사 차원서 서술
- 초시대적 철학과 연결하는 시도

- 운명을 받아들이는 최고의 태도
- 나림은 ‘용서·포용의 和’라 믿어

상을 받는 건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다. 성취를 인정받는다는 뜻이니 뿌듯한 일이다. 노벨문학상은 글로벌 문단에서 인정한다는 의미다. 한국 작가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반갑고 고맙다. 다만 한국 문학의 축적과 격으로 볼 때 만시지탄이다.

나림 이병주는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나림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많은 작품이 영화화된 작가 이문열은 자신처럼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는 노벨문학상에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굳이 택할 수 있다면 노벨상보다는 오히려 미국 독서 시장을 휩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더 낫겠다고도 했다.

사실 상은 받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시운(時運)의 작용도 필요하고, 상복도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다들 톨스토이가 노벨문학상을 가장 먼저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쉴리 프뤼돔이란 프랑스 시인이 수상했다. 톨스토이가 생존해 있던 1910년까지 ‘쿠오바디스’를 쓴 시엔키에비치와 ‘정글북’의 키플링은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나, 톨스토이는 10번 후보에만 올랐을 뿐 결국 수상하지 못했다. 미국 대외 영향력을 크게 키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받은 노벨 평화상조차 비폭력 평화 사상가 톨스토이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이병주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져 1987년 개봉한 영화 ‘비창’(감독 유영진) 한 장면. 출처-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나림 ‘대중문학’의 전형

나림은 문학상을 세 번 받았다. ‘비창’은 나림이 세 번째 상 받은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된 대중성 높은 소설이 문학상을 받은 다소 이례적 경우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림은 대중소설과 통속소설을 이렇게 구분한다. 통속소설은 독자에 영합하는 것이고, 대중소설은 대중이 쉽게 이해하게끔 가독성(可讀性)을 높인 것이다. 일없이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넣어 통속적 취향에 아부하는 것과 쓴 약을 당의정에 싸서 단맛에 먹게 하는 것은 다르다. 경계가 다소 모호하지만 그래도 독자는 알고 읽는다. ‘비창’은 역사철학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가 탐독하는 ‘로마 제국 쇠망사’ 등 묵직한 책 여러 권이 소개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원론적 신정관도 언급되며, ‘대구 10월 사건’ 같은 역사 사건도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나림 대중문학의 한 전형이다.

소설은 이야기다. 무거운 사건 가벼운 어조가 나림 소설의 공통된 특징이다. 때로 질펀하고 때로 농담·풍자가 지나치기도 하지만 그 경쾌함 안에는 역사책 행간에 감춰진 상처와 신음이 묻어 있다. 개인 이야기를 역사적 차원으로 서술하며, 시대의 특수한 사건을 초 시대적 철학 문제와 연결해 보려는 시도다. 나림 소설의 즐거움 중 하나는 특출한 자질과 품성의 남성과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이 풍성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나림은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는 믿음이 있다. 작가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독자에게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인상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인물이다. 역사철학 분야 독보적 스콜라(scholar)다. 재벌 집안 장남에 미모의 피아니스트 아내와 딸까지, 세상에 걱정이란 없을 것 같은 외양이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실상은 생부를 죽게 한 의부의 호적에 얹혀 있는 것이고, 아내의 불륜에 전전긍긍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무우(無憂) 상태란 없다. 우(憂) 즉 근심 걱정은 사람을 날 서게 만든다. 그럼에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혐오를 느껴 도피하듯 출생의 비밀을 찾아 대구로 온다. 도망치는 것, 그것도 때로 성실한 작업일 수 있다.

▮‘실존’이란 언제인가

이병주문학관에서 만난 ‘비창’의 비디오 테이프 표지. 국제신문 DB


구인상은 고향에서 ‘10월 사건’ 주모자 생부의 흔적을 찾는다. 스무 살에 만나 손 한번 잡지 못했으나 연모의 정을 품은 인연으로 짝사랑 남성의 묘를 쓰고 비석을 세우고 가족을 돌본 대구 권번 기생 방화의 순애보 덕분에 조손(祖孫)의 만남이 이뤄진다. 영락없는 낙백(落魄) 신세로 낯선 거리를 홀로 걷다가 우연히 만난 완숙한 미모의 여성 명국희 덕에 운명을 감당하며 사람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는 의지도 배운다.

판소리 명창 부친과 소리 기생 모친 슬하에서 자란 명국희는 음악 재능이 탁발했으나 바람둥이 연하남과 재혼한 모친 탓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기구한 청춘을 보낸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2년 후를 살았다”는 나폴레옹의 각오를 실천하며 산 결과 맵시와 교양이 밸런스를 취한 모습으로 새로운 인연을 맞게 된다.

실존은 무색투명한 물리적 시간이 돌연 운명적 시간으로 내용을 바꾸는 찰나다. 그 운명적 시간은 인생 시간일 수도 역사적 시간일 수도 있다. 실존을 두 번이나 절감한 뒤, 관용을 위해선 그 자리를 피할 필요도 있다며 번번이 현장을 외면한 구인상은 자기 상상으로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자기 원래 성을 되찾고 아내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쾌한 고비도 견뎌야 한다. 대학을 사직하기로 한 것도 체면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마침내 내 안에 굴복하지 않는 여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뮈의 말이다.

▮시점의 원근법을 익히는 게 지혜

나림은 역사의 심판은 언제나 늦는다는 데 주목한다. 역사는 일월이 조명하는 법정이지만 그 판결은 늘 늦다. 역사의 심판 전에 문학으로 심판이 가능하다는 게 나림의 뜻이고, 많은 실록소설은 그 뜻을 실천하는 시도였다. ‘비창’에선 역사철학 교수를 내세워 역사에 묻는다. 역사철학은 역사적 사실보다 역사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어느 부분은 신뢰하고 어느 점은 신뢰할 수 없는지, 역사의 심판이란 게 있는지 따져 보는 학문이다.

인과 관계, 심판, 신뢰성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언제나 문제만 있고 해답은 없는 학문이라는 게 나림의 해석이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보려는 시도는 꼭 필요하다. 동시대인에겐 절대적인 권력자가 시간·공간의 여유를 조금 두고 보면 만화처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림이 즐겨 인용하는 히틀러 사례나 스탈린 사례가 그것이다. 시점의 원근법을 익히는 게 지혜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과거는 어디에 있나. 기록과 인간 기억 속에 있다. 기록을 지배하면 기억도 지배하게 된다.” 조지 오웰이 1949년에 경고한 디스토피아 ‘1984’의 한 대목이다.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 그런 작업을 하는 빅브라더가 있고 그 빅브라더를 응징하는 건 언제나 더디다. 다만 역사의 심판은 연착하는 기차 같다. 늦더라도 도착한다. 그걸 믿어야 하는 게 딱하다.

▮‘비창’에 흐르는 음악

‘비창’엔 다양한 음악이 흐른다. 장면과 어울리는 아주 은근한 곡들이 겸손한 볼륨으로 흐른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부터 베토벤 ‘심포니 3번’, ‘춘향전’과 ‘흥타령’, 자넷 멘체스터의 소울풍 디스코곡 ‘Tomorrow‘s Memories’까지 18곡이다. 나림이 자동차에서 늘 듣는 곡이고, 주석(酒席)에서 흥이 나면 북채 잡고 뽑는 노래도 있다. 나림 마니아 정두환 지휘자는 소설 장면과 음악의 조화가 절묘하다며 나림의 음악적 소양을 상찬한다.

나는 ‘비창’을 읽으며 참 많은 경구를 얻었다. 특히 기억하고 싶은 대목은 “사람은 평생 살며 징크스 하나쯤은 가져야 한다. 운명에 대한 최소한의 겸손이다”와 “세상에 굳이 남에게 권할 수 있는 신앙이나 사상이 있을 수 있을까. 어째서 자기 좋다는 주관만으로 남의 정신세계에 비집고 들어서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역사 공부의 의미 하나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 고치려는 소박함이다”이다.

‘비창’에서 얻은 최고 배움은 역시 ‘화(和)의 의미’다. 화는 조화 친화 또는 화합을 뜻한다. 용서하고 포용해 손해를 보더라도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림은 소설 말미(末尾)에 볼테르의 인간론을 언급하며 운명 이야기를 덧붙인다. 운명이란 비리(秘理)는 지구 멸망 때까지 기다려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운명은 쉬이 꺼내서는 안 되는 단어다. 그럼에도 운명적 순간에는 운명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태도는 우리 자유 영역이다. 그나마 괜찮은 운명애(運命愛) 방법이 화라는 게 나림의 생각이다. ‘비창’ 원제목이 ‘화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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