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강 정해룡은 소작인에게도 땅 다 나눈 진짜 어른”
[짬] 평전 집필한 문영심 작가, 봉강 막내아들 정길상씨
‘정해룡 평전-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문영심 저, 도서출판 길).
일제 강점기에 사재를 털어 민족교육 운동을 펼쳤고 해방 이후엔 일관되게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따르며 분단과 맞선 봉강 정해룡(1913~1969) 선생의 생애를 정리한 책이다.
봉강은 전남 보성의 3천석 대지주 집안의 종손이었으나 말년에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곤궁했다. 일제 말 한옥 고택(거북정·2005년 전남도문화재 지정)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까지 직접 설계해 꾸민 봉강은 상해 임시정부에 거액을 지원했고 직접 4년제 사립학교 양정원을 세워 무상으로 민족교육을 했다. 해방 뒤엔 여운형이 만든 근로인민당 재정부장을 맡아 당의 돈줄 노릇을 했고 그 뒤로도 통일을 추구하는 진보정치의 길을 걸으며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사익 대신 국가와 민족의 대의를 추구하는 이런 행로는 결국 가세 몰락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빌어먹는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독립운동에 통일운동까지 하면 5대가 빌어먹습니다.”
지난 11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자택에서 문영심 작가와 함께 만난 봉강의 6남 길상씨 말이다. 학비 낼 돈이 없어 중학을 중퇴하고 국비로 운영되는 목포해양고에 다녔던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80년 11월 ‘가족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7년 옥살이를 했다.
이 책은 길상씨가 국망과 분단의 역사에서 풍비박산된 집안과 부친의 참모습을 알려야겠다고 맘먹은 지 30여년 만에 나왔다.
임진왜란 때 뛰어난 무공을 세우고 이순신 장군 종사관을 지낸 반곡 정경달의 후손인 봉강 집안에서 해방 이후 빨치산 활동 등을 통해 분단에 맞서다 희생된 이가 8촌 이내만 8명이라고 한다. 봉강 사후 11년 지나 터진 가족간첩단 사건 때 정보기관에 붙들려 가 곤욕을 치른 혈족만 37명이다.
가족간첩단 사건은 1965년 북한 조선노동당 대남사업부 부부장이던 봉강의 아우 정해진의 고향 방문에서 출발한다. 봉강은 아우 요청에 따라 아들(4남 춘상)을 북에 다녀오게 했고 봉강 사후 6년 뒤 길상은 뒤늦게 이 사실을 형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6년 뒤 정해진의 남파 사실이 공안당국에 드러났고 춘상은 사형을 당했다. 대한민국에서 춘상 이후 사형집행자는 딱 1명이다. 한홍구 교수는 책 해제에서 “(가족간첩단 사건 연루자들은) 가족 간의 인정과 도리 때문에 남쪽 공안당국에 자수하지 않았을 뿐, 북의 지령에 따라 활동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썼다.
길상씨는 1990년대 초부터 부친 평전 출간을 염두에 두고 일가 수십 명을 인터뷰했다. 왜 평전이었을까? “제가 어릴 때 우리 집 한옥에 사람이 우글우글했고, 너희 아버지 그리고 경성제대와 동경제대 대학원을 나와 한국전쟁 발발 후 월북한 너희 삼촌(정해진)은 어떤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고 살았어요. 그런데 저는 학교도 못 다니고 굶고 살았잖아요. 그 의문을 풀려고 1993년 무렵 우리 집 집사 노릇을 한 친척 할아버지를 만나 물으니 우리 집 재산이 없어진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충격이었어요. 우리 집안이 우리 민족의 모범적인 모델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군요. 이를 국가나 민족,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자료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에만 이 이야기가 머물지 않도록요.” 친척 할아버지는 그에게 봉강이 해방 이후 가노 17명에게 먹고살 수 있는 논을 거저 등기 이전해주며 ‘신분해방’을 시켜주었고 소작인들도 원하면 땅을 다 나눠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보성 3천석 대지주 종손으로 나 일제 때 독립운동 지원과 민족교육
해방 뒤엔 좌우합작 정치운동 힘써
분단 역사 휘말리며 집안 풍비박산
아들, 30년 전부터 일가 인터뷰하며
아버지 삶 알리려 평전 출간 추진
앞서 소설 나오고 다큐영화도 예정
문 “봉강은 보통 너그러운 부자와 달라
가장 큰 가르침은 신념 끝까지 지킨 점”
이런 봉강의 삶은 길상씨 해양고 선배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소설(‘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로 3년 전 세상에 드러났고 앞으로 다큐영화로도 나올 예정이란다.
지난달 31일 평전 출판기념회에는 함세웅 신부,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 등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했다. 진보 쪽 명망가가 총출동한 출판기념회 소회를 묻는 말에 길상씨는 “나라가 정치적으로 참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27년 방송작가 출신인 문영심 저자는 2013년 ‘김재규 평전’을 비롯해 ‘간첩의 탄생-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2014), ‘이카로스의 감옥-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의 진실’(2016) 등 분단과 국가폭력을 정조준하는 묵직한 책을 잇달아 펴냈다. ‘김재규 평전’은 14쇄까지 찍었다.
그는 봉강 평전 집필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가 개인적으로 식민지 시대부터 해방 공간까지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분단에 이르게 된 역사가 압축된 시기여서죠. 그때 좌우합작을 시도하며 통일을 위해 노력한 분들이 훗날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생애가 이 시기와 밀접하게 연결된 봉강과 그 일가의 이야기는 제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 소재였죠.”
평전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뭔지 물었다. “흔히 해방이 우리 힘이 아니라 갑자기 우연에 의해 얻어진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전에서 썼듯 봉강을 비롯해 많은 분이 해방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하며 헌신했어요. 일제 때 국내에서도 해방을 위한 분투가 있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봉강은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질문에 문 작가는 “진짜 양반”이라고 받았다. “한홍구 교수는 봉강을 ‘양반 빨갱이’라고 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일족 대부분이 남로당에 가입할 때 봉강은 여운형 노선을 지켰고 1960년대에도 통일 논의에서 비교적 온건한 영세중립국화론을 펼치셨거든요. 한번도 유교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셨죠. 사람들이 참 좋은 분이나 인격자를 가리킬 때 ‘그 사람 참 양반’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봉강은 진짜 양반이고 어른이었다고 봐요.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이런 게 아니라 민중 속에 있었던 대동세상을 꿈꾼 분입니다. 봉강은 동네에서 선비로서 애민 사상을 계속 실천하며 살았어요. 신분제를 타파하며 재산까지 다 나눠주잖아요. 보통의 너그러운 부자와 달랐어요.”
길상씨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봉강이 역사에서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냐는 말에 “천하의 덕가”라고 했다. “여운형 개인비서 이임수 선생님은 아버지를 한국의 톨스토이라고까지 하셨어요. 여순사건과 6·25 때 옥에 갇힌 아버지가 풀려난 것도 아버지를 존경한 우익이 손을 쓴 덕이죠.”
문 작가는 봉강의 생애에서 얻는 가장 큰 가르침은 “신념을 끝까지 지킨 점”이라고 했다. “봉강은 60년대까지도 혁신계 정당활동을 통해 통일운동을 하셨어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정신을 그대로 고수하신 거죠. 단정에 반대한 사람 중 그 태도를 끝까지 고수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나중에 현실 정치에 다 타협합니다. 하지만 봉강은 끝까지 지조를 지키셨어요. 통일을 위해 뭐든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봉강 생애에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1965년 대남 공작을 위해 고향으로 밀행한 아우의 청에 자신을 대신해 아들 춘상을 북으로 보낸 결정이다. 봉강은 해진의 월북 전까지 비록 정치 노선은 달랐지만 아우를 신뢰하고 존중했다. “저는 아들에게 북으로 가라고 한 것보다 아들이 부모 말을 바로 따랐다는 게 더 납득이 안 갔어요. 반공 교육이 철저한 시절이라 북을 다녀온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았을 텐데 어떤 반문도 없이 바로 갔다는 게 납득이 안 갔어요. 그런데 정길상 선생님이 ‘저라도 아버지 말을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납득이 되었어요.”(문영심) “저에게는 아버지의 어떤 말도 잘못된 것일 수 없다는 신뢰가 있었어요. 만인이 아버지를 존경하니까요.”(정길상) “국가보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는 가문의 가르침이 더 앞섰던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통일을 위해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셨다고 봐요. 단정 수립 이전에 삼팔선을 베고 죽더라도 분단만은 막겠다고 북으로 간 김구나 김규식 선생 같은 분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은 거죠. 당시 남과 북이 꽉 막혀 있는데,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죠. 이쪽이 옳다 저쪽이 옳다 그런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문영심)
길상씨는 ‘거북정 사람들’ 중 유독 역사의 희생자가 많이 나온 배경을 두고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가훈이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자’였어요. 우리 어렸을 때 방마다 이순신이나 또 이준, 이상설, 민영환 등 애국지사 글이 쓰인 족자가 있었어요. 또 거북정에 경성제대 출신 수재 삼촌(해진)의 사회주의자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집안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태평양 전쟁 돌아가는 상황이나 일본이 곧 망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집안사람들이 삼촌 일행 이야기를 귀동냥하면서 물이 많이 들었다고 봐야죠. 우리 집이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는데요. 사당에서 제사를 하면 종손인 아버지가 지손 100명 앞에서 시국 이야기를 했어요. 박정희는 세 살 먹은 아이가 입에 칼을 물고 빙판을 걸어 당기는 형국이다, 우리나라 정치 돌아가는 것은 전부 미국 장난이다 그런 말을 하셨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문 작가에게 다음 책 계획을 묻자 여건이 되면 동학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동학에는 자유민주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고 우리만의 민주주의가 있어요. 오랜 세월 우리 민중 속에 있었던 정신이 발현된 게 바로 동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단과 국가폭력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말을 이었다. “분단과 국가폭력의 역사를 보면서 국가는 개인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굉장히 큰 의문을 품게 되었어요. 심지어 국가는 개인의 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무슨 뜻을 품은 사람도 아닌데 국가폭력으로 희생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제주4·3이나 여순을 보세요. 박종철이나 이한열도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간첩죄로 사형을 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베테랑 소방관, 52명 구했다
- 낙선한 이재명 ‘민의 왜곡’ 유죄…“그 논리면 당선한 윤석열도 처벌”
- [단독] “김건희, 명리학자에 ‘저 감옥 가요?’…첫 만남에 자택서 사주풀이”
- 한국 부유해도 한국 노인은 가난…78%가 생계비 때문에 노동
- ‘입틀막’ 경호처, 윤 골프 취재하던 기자 폰 강제로 뺏어…경찰 입건도
- [단독] 용산-김영선 엇갈리는 주장…김 “윤·이준석에 명태균 내가 소개”
- 곰인형 옷 입고 ‘2억 보험금’ 자작극…수상한 곰 연기, 최후는
- 월요병도 놀랄 내일 아침, 서울 -2도…전국이 0도 안팎
- KBS 기자 495명이 반대한 박장범, 권력 아부 비판에 “동의 못 해”
- 홍준표, 오죽하면 ‘민주당 손 잡으시라’…윤, 그 조언 들어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