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사회, 존엄사에 대한 진지한 논의 필요하다 [배정원의 핫한 시대]
(시사저널=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보건학 박사))
최근 죽어가는 것에 대한 영화 《룸 넥스트 도어(Room next door)》를 보았다. 인기 있는 소설가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작가 사인회에서 친구였던 마사(틸다 스윈튼)가 암에 걸려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사를 찾아간 잉그리드는 절친이었던 그녀와 함께했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암 말기환자였던 마사는 여러 번의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에 희망을 걸지만 결국 길어야 1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만다.
마사는 효과 없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육체적으로 쇠락해 가다가 죽음을 마주하느니 자신이 죽을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겠다면서 잉그리드에게 동행을 부탁한다. 자신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옆방에 같이 있어 달라는, 길어야 한 달 안에 끝내겠다는 간곡한 마사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던 잉그리드는 마사의 죽음길을 배웅하기로 한다.
마사는 숲속에 아름답고 한적한 별장을 구해 잉그리드와 함께 평온하게 지낸다. 마사는 자살약을 불법으로 다량 구입하고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숨겨 놓은 채 충실하고 완벽하게 죽음을 준비한 후 천천히 가고 있지만,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살아있다는 친구의 신호를 확인하며 두려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다 햇살이 정말 아름다운 날, 잉그리드가 외출한 날을 택해 마사는 세상을 떠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사는 이미 죽음을 선택했고, 주도적으로 실행을 결정했던 탓인지 오히려 안정적이었지만, 그 곁에서 속절없이 떠날 친구랑 불안한 시간을 보내는 잉그리드가 너무 딱한 느낌이었다. 한편 자신이 죽어간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함께 있어 달라는 마사의 요구가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락사나 존엄사로 죽음을 맞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가족이나 친구 곁에서 죽기를 원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사람이라는 존재가 외로움에 취약하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떤 죽음이 존엄하고 품위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필자를 사로잡은 채 놔주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가 20%가 넘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필자 주변을 봐도 건강한 90~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많다. 아마도 우리는 사이보그가 되어가며, 건강하게 기대수명이 120세를 훌쩍 넘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 기대수명은 이렇게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이 수명 연장만큼 모든 이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의 장수 숭배와 젊음의 찬양은 때로는 혐오스럽고 우려스럽기도 하다.
안락사와 존엄사 개념 명확히 구분할 필요
2000년 전,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친구여, 우리는 일생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네.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은 우리는 일생 동안 계속 죽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는 거라네." 이제는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며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안락사'와 '존엄사'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안락사란 "현재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죽음에 처한 경우, 고유한 생존적·정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도움 없이 죽는 행위"를 의미한다. 반면 존엄사는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현재 유럽의 여러 선진국은 이미 안락사에서 더 나아간 존엄사에 대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 등에서는 엄격한 요건하에 안락사 혹은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다.
올해 2월, 가톨릭 신자인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의 동반 안락사 소식은 '존엄한 죽음에 대한 선택이 더 이상 터부시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의 결정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존엄사를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채 무의미하게 연명하거나, 오랫동안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죽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품위와 존엄을 지키면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존엄사 법제화에 긍정적 인식
최근 한국의 연명의료 결정제도 이용 현황을 보면, 올해 6월 기준으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작성자가 244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국립 연명의료 관리기관 시스템 등록자가 2018년 10만529명에서 2023년 57만3937명으로 5.7배나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사람이 이미 존엄한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으며, 자신의 생애 말기 의료결정권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가 단순히 현재 말기환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 건강한 사람들도 미래에 임종 과정에서 소생 가능성이 없을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표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에 대한 높은 관심은 우리 사회가 죽음을 더 이상 터부시하지 않고,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2022년 7월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남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력 존엄사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2%가 법 제정에 찬성하는 의견을 밝혔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찬성 비율이 높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존엄사 법제화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존엄사 법제화 과정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생명윤리와 관련된 복잡한 철학적·종교적 논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제도의 오남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이 논의 자체를 미룰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존엄사 법제화는 결코 죽음을 강요하거나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신의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 가치의 조화로운 실현을 지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익숙한 환경에서 자신의 '마지막 퇴장시간'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다정한 작별인사를 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기를 바란다.
한국의 현행 연명의료 결정법은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발적이고 분명한 의사로 존엄사를 선택하고자 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계속 외면할 수는 없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생명 연장보다는 평온하고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는 적극적 존엄사에 대한 법제화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죽음은 해답도 없고, 우리가 싸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죽음, 존엄한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정부는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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