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국내 첫 비영리 ESG기관 키운 주역…"트럼프 시대 와도 변화는 없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2007년 대한민국에서 국내 최초로 ESG 비영리 기관을 발족한 사람이 있다. 영국의 비영리기구 CDP(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로부터 '한국위원회' 설립 승인을 끌어낸 것을 시작으로 ESG 경영의 중요성을 국내에 널리 알린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가 그 주역이다.
'최초 단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국내 기업들이 투자 결정을 내릴 때 금융적 수익뿐만 아니라 ESG를 고려하는 사회책임투자(SRI)를 촉진하는데 기여하고자 설립한 비영리 기관이다.
양 상이이사는 "2006년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주도적으로 유엔 산하에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를 만들었다"며 "이들의 첫 번째 투자 원칙이 'ESG 투자'였습니다. 여기서 '금융의 흐름이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당시 ESG 투자를 강조하는 활동이 있었지만 한국은 없었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금융부분에 집중해 ESG 투자를 장려하는 기관은 저희가 유일합니다"며 "자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따라 기업의 행동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이 결정되는 만큼 기후 위기에 금융의 역할을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 같은 변화의 신호탄은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CDP 한국위원회' 자격을 얻는 성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CDP는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로 전세계 7000개가 넘는 기업이 CDP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량, 탄소경영전략 등을 공개하고 있다. 한국에 2008년부터는 국제적 이니셔티브인 CDP를 한국에 처음 도입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CDP를 국내에 처음 도입하게 된 이유는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의 재정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국민연금과 국내 자산운용사들의 큰 지원으로 출범할 수 있었지만 2008년 정권이 교체되면서 모든 지원이 하루아침에 썰물처럼 끊겼습니다."
그는 한국에 ESG 전문 기관을 만드는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기존 금융권 회원사들이 ESG를 진보적 이슈로 생각해 모두 탈퇴했고 급료까지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며 "은행 대출과 신용으로 직원들 월급과 퇴직금을 해결하고 저는 월급을 받지 않는 생활을 약 10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양 상임이사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CDP 본부를 수차례 두들겼다. 그는 아시아 일부에 지나지 않던 한국을 일본처럼 독립시키는 제안을 했고 설득에 성공해 CDP 사업을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CDP의 초기 응답 기업수는 2008년 20여개에 불과했지만 이달 집계 기준 928개로 약 46배 증가했다.
또 국내에 CDP를 정착하는데 국내 수출기업들의 도움도 컸다고 회상했다. 국내 수출기업들 역시 초기에는 CDP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해외 바이어들의 요구에 따라 참여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CDP 시상 제도를 국내에 도입되면서 기업들은 환경 성과를 인정받게 되는 사례가 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공 사례가 됐지만 이 일을 계기로 비영리 단체로서의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선 경제적 자립성을 항상 마련해 둬야 한다는 원칙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그 뒤로 저희는 마치 전통처럼 정부 돈을 단 1원도 쓰지 않게 됐다. 지금도 정부 비판에 자유로운 이유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의 방향성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모토는 변함이 없습니다. 국민연금이 국민들의 건강을 해치는 옥시크린 같은 기업에 몇조원씩 투자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기업들이 아직도 많은 자금을 석탄과 화력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기후변화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국민의 돈을 가지고 국민의 복지와 건강을 해치는 데 투자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보람된 일 중에 하나로 2022년부터 매년 발간하는 '화석연료금융 백서'를 꼽았다. 화석연료금융 백서는 국내 금융기관들의 화석연료 기업 지원 규모를 전수조사해 발표하는 프로젝트로, 금융기관의 화석연료에 대한 관성적 지원이 탈석탄 선언과 자산건전성을 모두 위협하는 상황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6월말 기준 국내 금융기관의 화석연료 기업 지원 규모는 331조5000억원으로, 이는 올해 정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는 "2022년 화석연료금융 백서를 처음 발간했을 때 국내 1등 보험사에서 호주 탄광에 투자를 하려던 것을 포기했다"며 "단기적으로 수익을 돌리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금융기관들이 여전히 투자처 공개를 안 하려고 한다"며 "저희가 백서를 발간하고 있지만 향후 법제화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정부기관이나 금융사들은 여전히 잘못된 시장 맹신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ESG의 선순환 생태계 구축을 위한 법과 제도 구축을 위해 '국회 ESG포럼'를 발족했다. 국회ESG포럼에는 여당 22명과 야당 23명 의원 등 총 45명의 여야 의원이 참여했다. ESG 기본법을 만들고 ESG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은행에 자금을 빌릴 때도 가까운 곳이라고 가지 말고 의식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며 "이 은행이 가지고 있는 투자 원칙이 무엇인지, 펀드 투자시 어떤 철학을 가지고 하는지를 의식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에 따른 ESG 지연 우려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외 역시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출범으로 ESG의 후퇴를 우려하는 시각도 많다"며 "트럼프 당선인 역시 이미 제도화를 통해 세계적 주류가 되고 있는 ESG 흐럼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속가능성은 누구한테나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등 각 주정부가 연방정부와는 별개로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추진 중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화당이 지배하는 텍사스 등은 재생에너지 투자가 활발해 오히려 이것으로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양 상임이사는 이제 생물 다양성과 SBTi(과학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 등 다음 이티셔티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규모 정예요원들로만 꾸려진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다시 한번 성장할 수 있도록 구상 중인 것이다.
그는 "SBTi는 기업들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도록 돕는다"며 "국가별로 NDC를 발표하면 그 다음 수순이 기업별로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데 과학적인 검증 여부를 평가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후변화의 심각성으로 SBTi 의무화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텐데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만들고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을 더 집중하고 싶다"고 포부를 내놓았다. 글·사진= 박한나기자 park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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