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배울걸” 바이든의 후회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11. 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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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캐나다를 방문한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퀘벡주(州) 몬트리올에서 프랑스어로 “자유 퀘벡 만세”를 외쳤다.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은 캐나다 영유권을 놓고 전쟁까지 벌였다. 1763년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이긴 영국이 캐나다 전체를 집어삼키며 프랑스계 주민이 많이 살던 퀘벡도 영국령이 되었다. 그러니 드골의 ‘자유 퀘벡’ 운운이 캐나다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당연했다. 영국계 주민이 주류인 캐나다에서 프랑스 색채가 짙은 퀘벡이 분리돼 새 독립국이 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논란이 확산하자 드골은 수도 오타와 방문 일정을 취소한 채 프랑스로 돌아갔다. 사실 드골의 돌출 발언과 상관없이 캐나다 정부는 퀘벡에 주로 거주하는 프랑스계 시민들의 마음을 얻고자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캐나다를 영국·프랑스 두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로 가꿔 온 것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퀘벡에선 영어를 못해도 프랑스어만 할 줄 알면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은 미 대선 직전인 11월2일 성조기 옆에서 상념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스위스는 1815년 이래 영세중립국이다. 자연히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비롯해 유럽 대륙을 휩쓴 숱한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런데 얼마 전 제네바 주재 프랑스 영사관 앞에서 스위스 출신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전사자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려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한 스위스 주민들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스위스는 다민족·다언어 국가다. 독일어를 쓰는 인구가 62.6%로 가장 많고 이어 프랑스어(22.9%), 이탈리아어(8.2%) 등 순서다. 특히 3면이 프랑스 영토로 둘러싸인 제네바는 스위스 내 프랑스어권 주민들의 구심점과 같은 곳이다. 마음속으로 ‘모국’처럼 여기는 프랑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제네바 등에 거주하던 프랑스계 스위스인들이 자발적으로 프랑스군에 들어가 전투 임무를 수행하던 중 목숨을 잃은 것이다.

캐나다, 스위스 같은 다언어 국가와 달리 미국은 영어가 사실상 국어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국 내 히스패닉·라틴계 주민이 점차 늘어나면서 스페인어의 비중도 그만큼 커지는 모습이다. 오늘날 3억4000만명이 넘는 미국 인구 가운데 약 5분의 1이 히스패닉·라틴계 주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히 스페인어가 미국에서 영어 다음으로 널리 쓰이는 언어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스페인어 사용자들은 스페인어권 국가인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주에 특히 많이 산다. 이들 주는 스페인어를 영어와 대등한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관공서 서류나 주민들에게 발송하는 공문 등에 영어와 스페인어를 병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A)에서 오래 거주했다는 어느 한국인은 “마트 등 어디를 가든 백인보다 훨씬 많이 보게 되는 인종이 히스패닉·라틴계”라며 “주변에서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들릴 때가 더 많다 보니 ‘미국 오기 전 스페인어를 공부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15일(현지시간) 페루에서 열린 에이펙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과 만나 양자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5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참석차 페루 수도 리마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말이 눈길을 끈다. 그는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과의 양자 정상회담 결과를 언론에 설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스페인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히 털어놨다. 바이든은 “내가 젊은 상원의원이던 시절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는) 텍사스 출신의 선배 상원의원으로부터 ‘당신, 언젠가 대선에 출마하게 될 수 있으니 스페인어를 배우는 게 좋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며 “하지만 난 영어밖에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얼마 전 끝난 미 대선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이던 히스패닉·라틴계 유권자들이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버리고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져 커다란 화제가 됐다. 그래서일까, ‘스페인어를 모른다’는 바이든의 말이 ‘진작 스페인어를 배웠더라면 히스패닉·라틴계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란 후회처럼 들린다. 미국이 사실상 영어·스페인어 ‘이중 언어’ 국가가 된 만큼 앞으로는 스페인어 구사 능력이 대권 주자의 핵심 자질로 요구될 지 모를 일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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