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대신 ‘액셀 7번’ 밟았는데…급발진 논란, 왜 유독 한국선 끝없이 터지나 [세상만車]
성급한 일반화 오류에 도피심리 작용
한국인 “억울함과 불편함은 못 참아”
논란 해결 통해 한국을 더 안전하게
올해 하반기 자동차 사고를 낸 뒤 급발진을 주장하는 운전자가 참 많아졌습니다. 포털사이트에 ‘급발진’이라고 검색어를 쓰면 관련 기사가 셀 수 없이 쏟아집니다.
서울 시청역에서 9명이 숨지는 역주행 참사가 발생한 뒤 사고를 낸 운전자가 급발진을 주장한 게 영향을 줬습니다.
이 사고를 두고 자동차·교통 전문가들이 격렬하게 찬반 대립을 하면서 사회적 관심사가 됐습니다.
덩달아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전문적인 조사도 진행됐습니다. 현재까지 나온 조사 결과는 급발진이 아니라 페달 오조작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2019년부터 올해 6월까지 발생한 자사 자동차보험 가입 차량의 자동차 사고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연구소에 따르면 페달 오조작 관련 사고 발생은 총 1만1042건에 달했습니다. 연간 2008건, 매월 167건 발생한 셈입니다.
페달 오조작 사고는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하다가 액셀을 밟거나, 주차 중 갑자기 급가속하는 등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는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주차구역 내에서 주차·후진·출차 중 전체 페달 오조작 사고의 48.0%가 일어났습니다.
도로 주행 또는 교차로 좌·우회전 중 운전자 의도와 다르게 브레이크를 밟으려다가 액셀을 밟아 발생한 사고도 30.1%로 집계됐습니다.
차량정체 때 교통신호로 감속이나 정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조작으로 일어난 사고는 21.9% 나왔습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61세 이상부터 페달 오조작 사고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전체 페달 오조작 사고 10건 중 4건 가량은 61세 이상 운전자가 일으켰습니다. 65세 이상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사고는 2718건으로 전체 오조작 사고의 25.7%로 조사됐죠.
전체 교통사고 중 고령 운전자의 사고 점유율(16.7%)과 비교하면 페달 오조작 사고의 65세 고령 운전자 사고 점유율은 1.5배 수준이었습니다.
70세 이상의 오조작 사고 점유율은 14.6%로 국내 운전면허 소지자 중 70대 비율(5.9%)보다 2.5배 많았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지난 10월29일 강원도 원주에 있는 실험실에서 급발진과 관련한 재연 시연을 진행했습니다.
국과수는 시청역 사고에 대해 급발진을 주장한 운전자 주장을 토대로 이번 상황을 꾸몄습니다.
사고 운전자는 수사·재판 과정에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페달이 딱딱했고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죠.
김종혁 국과수 법공학부 교통과 차량안전실장은 급발진 논란에 대해 “브레이크 시스템에 전자적인 문제가 있어도 수동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경우 차는 반드시 서게 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제동 시스템이 무력화돼 브레이크가 딱딱하다는 느낌이 있는 상황에서도 브레이크를 충분히 밟으면 차는 완전히 정지한다”며 “시청역 사고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열심히 밟았지만 딱딱했고 제동등조차 들어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전혀 맞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실장은 “제동시스템은 최후의 안전장치여서 엔지니어는 어떤 상황에서도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서게 설계한다”며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도 가속 페달이 무력화되는 ‘브레이크 오버라이드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실장은 브레이크 자체에 기계적인 결함이 있다면 제동되지 않을 수 있지만, 시청역 사고는 모든 제동시스템에 문제가 없어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급발진 주장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밝혀질 때마다 떠오른 문구입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유명한 ‘리어왕’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죠.
심리학에서는 이를 외부귀인(外部歸因)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만 찾는 것을 뜻합니다.
사고 나면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운전자들이 급증하는 원인은 외부귀인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몇 가지 사례나 경험만을 가지고 그 전체 또는 전체의 속성을 섣불리 단정짓거나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를 때 씁니다.
우리 속담에 있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도 이 오류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여기에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밖의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도 한몫합니다.
잘못을 저질렀거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는 도피·회피 심리도 작용합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인식한 뒤 이를 부정하려는 시도죠.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음주뺑 소니 사고를 낸 뒤 무책임하게 도주한 것은 물론 매니저에게 자신을 대신해 허위로 자수하게 한 것도 도피·회피 심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자기합리화도 작용합니다. 비합리적인 이유를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하죠.
화병, 들어보셨을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인 고유의 질병이라는 분석이 있죠.
화병의 원인 중 하나는 ‘억울함’입니다. 한국인은 자신이 받아들이기에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면 억울함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객관적 상황이 어떤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운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억울하다고 여긴다고 하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억울할 게 전혀 없는 사람도 억울하다고 외칩니다. 사극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자주 “억울하옵니다”를 외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억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책임을 묻거나 전가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자신은 면죄부를 얻어야 하니까요.
여기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도 덧붙여지면서 급발진 논란이 확산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 셈입니다.
급발진 주장 확산을 가속화시키는 한국인의 심리 성향이 또 하나 있습니다.
불편하거나 잘못된 일이 발생하면 참지 못하고 남 탓, 제품 탓으로 여기는 ‘프로불편러’ 성향입니다. ‘외부귀인’의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지금까지는 급발진 주장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급발진이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되레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급발진 논란이 확산되면서 사고 원인을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나라보다 철저히 분석하게 됐습니다. 페달 오조작을 예방할 수 있는 대책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조사가 차량 결함 원인 규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제조물책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프로불편러 ‘탓’이 아니라 ‘덕’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편한 나라’가 됐습니다.
‘불편·불평·불만’이 한국인들의 행복만족도를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더 편리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데도 기여했기 때문이죠.
급발진 논란은 한국이 ‘안전한 나라’ 타이틀까지 확보하고, 한국 자동차 브랜드가 ‘안전 대명사’가 되는데 큰 힘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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