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배추밭, 우뚝이 낱알 틔운 저 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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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뷔'.
배추밭을 살피던 막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어, 이거 토마토 아니에요?" 가을 농사를 위해 눈 딱 감고 멀쩡한 방울토마토를 걷어내고 배추밭을 일궜다.
배추밭 한가운데 토마토 다섯 주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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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 편
‘데자뷔’. 기시감이라 한다. 이미 ‘기’, 볼 ‘시’, 느낄 ‘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니,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이라고 풀었다. 대통령이 드문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건 국어사전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했으니, 나도 다시 정리해보련다. 데자뷔,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다. 9월 중순이 지나서야 찾아온 가을이 한 달 반 만에 그야말로 ‘쑥’ 지나갔다. 기상청은 2024년 11월6일 “북쪽에서 찬 공기가 남하하고 밤사이 맑은 날씨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서울을 포함한 중부내륙을 중심으로 첫서리와 첫얼음이 관측된 곳이 있다”고 밝혔다. 비슷한 예보가 나온 1주일 전, 텃밭 동무들이 앞다퉈 “배추를 비닐로 덮어줘야 한다”고 했다. 꼭 그래야 할까? 기상청 예보를 자세히 보니 하루 추워지고, 다시 기온이 올라간단다. 예보를 믿기로 했다. 기상청 예보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슈퍼컴퓨터를 사주면 뭐 하냐”는 수준이지만, 한국의 농어민은 여전히 그 예보에 기대 산다. “다시 따뜻해진다는 예보를 믿지 못한다면, 갑자기 추워진다는 예보도 믿어선 안 된다”는 게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나? 온통 에프(F)인 텃밭에서 독야청청 티(T)다. 훗.
“형님, 이거 덮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에프인 막내는 끝까지 불안한 기색이다. “나도 덮는 게 나을 거 같소.” 밭장도 거들고 나선다. 이럴 줄 알았다. 하나같이 배추밭에 비닐터널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지난해의 쓰라린 경험 탓이다. 망설이다 뒤늦게 비닐을 덮어줬지만, 추위에 이른 눈발까지 날리면서 반쯤 언 배추를 수확해야 했다. 무는 지상으로 올라온 부분이 꽁꽁 얼어 반 이상 수확을 포기했다.
모두의 불안 앞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그럼 차라리 상추를 덮어주세.” 가을 농사 시작과 함께 심은 모종은 이미 꽃대를 올렸지만, 씨 뿌린 상추는 여전히 성하다. 추위만 피한다면 한 달은 더 수확이 가능할 터다. 지난해 쓰고 보관해둔 비닐을 가져다 상추밭에 터널을 만들었다. 동무들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가지는 쌩쌩하다. 아기 팔뚝만 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배추밭을 살피던 막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어, 이거 토마토 아니에요?” 가을 농사를 위해 눈 딱 감고 멀쩡한 방울토마토를 걷어내고 배추밭을 일궜다. 걷어낸 토마토 줄기를 옮기다 열매가 떨어진 모양이다. 배추밭 한가운데 토마토 다섯 주가 자라고 있다. 생명은 위대하다.
호박도 멀쩡하다. 올해 호박은 날씨만큼 기이했다. 잎은 더없이 무성한데, 열매를 거의 내주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호박잎쌈으로 긴 무더위를 넘겼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날 차가워지기 무섭게 열매를 내주기 시작했다. 연초록 봄 열매와 달리 가을 호박은 처음부터 진초록이었다. 집으로 데려와 도마 위에 올리니, ‘조직’도 좀 달랐다. 뭔가 단단한 느낌이랄까. 요리해 밥상에 올리니, ‘맛’도 달랐다. 뭔가 깊은 느낌이랄까.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주중 추위가 물러간 뒤 밭이 달라졌다. 가지도, 고추도, 호박도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스로 자란 토마토 줄기도 흐물흐물해졌다. 풀이 물러갈 계절이다. 이제야 속이 차기 시작한 배추는 어쩌지. 밀려오는 걱정 속에 상추를 떠올렸다. 비닐을 걷어내니 습기 듬뿍 머금은 상추가 방글방글하고 있다. 금세 수확한 게 다섯 집이 한 끼씩 먹을 정도나 됐다. 뿌듯해졌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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