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돗물로는 맛을 낼 수 없어 일본서 필터까지 공수…“흑백요리사 시즌2 불러만 주세요” [푸디人]
일본 옛 수도인 교토는 고대의 전통과 현대의 삶이 조화를 이룬 공간으로 손꼽힙니다.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본의 황실이 머문 곳이기에 도시에 품격도 자연스레 배어 있죠. 아름다운 정원과 그림 같은 경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방문자에게 위안을 선사합니다.
미식문화도 빼놓을 순 없죠. 특히 일본 고급 요리의 정점인 가이세키(懐石)의 정수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사실 가이세키는 다도에서 다과회를 할 때, 주최자가 손님에게 대접하는 간단한 식사의 형태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계절의 변화와 신선한 재료를 반영한 일본의 전통 요리로 서양의 오트 퀴진, 지금의 파인 다이닝과 비교된다고 볼 수 있죠.
이런 곳에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입문해 외국인 최초 부주방장까지 올라간 한국인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 중에서 가장 오래 기쿠노이에서 일해 가장 기쿠노이를 잘 아는 인물이기도 하죠. 그리고 요리를 배우러 온 외국인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던 시기에 일본에서 최초로 문화활동비자를 받은 개척자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바로 유성엽 산로(三露) 셰프입니다.
유 셰프는 일본에서 ‘전통에 뿌리를 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요리사’로 불리는 무라타 요시히로의 수제자 중 한명입니다. 무라타 요시히로는 1912년 교토에서 창업한 기쿠노이의 3대째 오너 셰프죠.
유 셰프는 작년 10월 중순 작은 교토를 서울에 그대로 가져다 놓겠다는 작심을 하고 ‘산로(三露)’를 서울 청담동에 열었습니다. 기쿠노이에서 배웠던 대로 음식은 물론 그릇, 인테리어, 오브제 등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하네요. 그런데 문제는 물이었습니다.
“도쿄는 고두밥이 많은데 밥이 퍼지지 않습니다. 반면 교토로 가면 두부 요리라든지 물로 풀어내는 요리들이 많죠. 예를 들어 두유를 끓이면 표면에 막이 생기는데 그걸 말린 게 유바(湯葉·湯波)이고 요리에 많이 씁니다. 도쿄랑 교토랑 물을 비교하면 도쿄가 좀 더 딱딱한 느낌이에요.”
그의 이런 생각은 경수와 연수의 차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칼슘염 마그네슘염의 함유량을 산화칼슘으로 환산해 물 100㎖ 중 1㎎을 함유할 때 물의 경도를 1도라고 하고 10도 이하는 연수, 20도 이상은 경수라고 합니다. 그의 경험상 교토의 물이 도쿄의 물보다 연수에 가깝다는 것이죠.
“다시가 맛있으면 조미료를 안 쓰고도 모든 요리가 맛있게 되죠. 그래서 필터를 만드는 미쓰비시 케미컬에 교토의 물과 비슷하도록 연수기를 제작해줄 수 있냐고 얘기했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산로를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고 물이 우리 산로를 좌지우지할 포인트라 생각했죠.”
그는 일식의 묘한 매력에 빠져 국내 일식당서 일하다가 세계 3대 요리학교인 일본 오사카의 츠지조리사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운명적으로 기쿠노이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죠.
약 6년여간 기쿠노이에서 수련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교토의 요리를 한국 식재료와 일본의 조리 기술로 풀어내려 합니다. 어찌 알고 작년말에 축구선수 손흥민도 다녀갔었네요.
그와의 일문일답을 통해 인생과 요리에 대한 철학을 자세히 담아 보았습니다.
- 요리를 시작한 배경은?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사진을 전공했었어요. 그때 당시 필름 카메라의 소리가 좋았죠. 이후 군대에 가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중 저희 어머니가 전라도 여수 출신으로 가정 요리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요리들을 많이 해주셨어요. 항상 사골 국물이 냉장고에 젤리처럼 들어가 있었고 그 국물에다가 라면을 끓여 먹었던 기억이라든지…
또 사진을 하면서 완성된 요리를 찍어주는 아르바이트를 몇 번 했었는데 ‘요리사라는 직업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 말년 휴가 나와서 아버지가 자주 다니시는 일식가게에 면접을 봤어요. 제가 대구 출신이라 대구에서 시작했는데 그때가 1998년쯤이었던 거 같습니다.
- 일식을 택한 이유는?
▶한식, 중식, 양식, 프렌치, 이탈리안 레스토랑들은 주방에서 요리만 내는 시스템이었는데, 손님들이랑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면서 얼굴을 보고 요리하는 것은 일본 요리밖에 없었거든요. 손님들 눈앞에서 멋있게 조리하는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 일본 유학을 결심한 배경은?
▶한식은 한국에서 배우는 게 맞듯이 일본에 가서 좀 더 세밀하게 배워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제가 사진 할 때 만났던 일본 친구가 셰프들이 주방에서 쓰는 칼은 ‘사카이’라는 지방에서 나오는 칼이 제일 좋고 요리사 학교는 ‘츠지‘라는 오사카에 있는 학교가 좋다는 말을 해줘서 결정하게 됐습니다. 유학 학원에다가 서류를 맡기고 유학 하러 가기 보름 전까지 일하다가 떠났죠.
▶맛있는 레스토랑에 먹으러 가는 것도 하나의 큰 공부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타베아루키(たべあるき)’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다니며 많이 공부했는데, 교토의 ‘사쿠라다’라고 그 당시 미쉐린 2스타였는데 요리가 너무 섬세하고 그릇 같은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가게였어요. 거기에 너무 취직하고 싶어 여러 번 이력서 들고 찾아갔고 ‘오케이’까지 받았는데 비자가 나올 방법이 없었죠.
그러던 와중에 도쿄의 노부 마쓰히사라고 유명한 셰프가 있는데, 지금은 호텔, 리조트 비즈니스까지 하시는 분입니다. 어느 날 노부 스시 레스토랑에 공부하러 갔는데 우연히 노부상을 만났습니다. 저를 비롯해 남자 3명이 정장을 입고 먹으면서 열심히 적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니 귀여워 보였나봐요.
“너네 어디서 왔냐, 뭐 하는 놈이냐?” 이렇게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서 온 유성엽이라고 하는데 일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뭘 하고 싶어?”라고 물으시길래 “어떻게든 일본에서 취직을 해서 요리를 하고 싶은데 비자를 해결하는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더니 “니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쿠라다 그 가게는 내가 모르겠고 내 친구 중 교토에 무라타가 있는데 그 친구 가게에 한번 가볼래?”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저는 기쿠노이에 대한 존재도 몰랐고 사쿠라다보다 훨씬 유명한 가게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너무 기뻐서 노부상과 같이 찍은 사진과 “일본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는 편지를 스승님께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일주일 정도 뒤에 전화가 온 거예요.
스승님께서 “너네 학교에 취업 설명회를 매년 가고 있는데 그때 너를 부를 테니까 한번 나와줄 수 있니”라고 하셔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스승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는 너무 무섭기도 하고 제가 한국말을 하고 있는지 일본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했었죠.
▶그게 2007년쯤이죠. 당시에는 일하고 싶은 유학생들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 츠지학교 관계자분들 앞에서 “이 유성엽이라는 친구가 비자를 받을 수 있게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얼마든지 도장 찍어서 줄 테니까 우리가 한번 만들어보자”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제가 비자를 4개월만에 받았습니다. ‘문화활동비자’라고 하는데 제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받았어요. 무용, 바둑 등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비자인데 요리도 일본 문화의 하나라서 그런 카테고리에 넣은 것 같습니다.
- 기쿠노이는 어떤 곳?
▶기쿠노이는 일본의 가장 정점인 요리와 일본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레스토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리 하나를 담는 그릇이라든지 분위기라든지 서비스하시는 분들의 움직임이라든지 모든 게 함축된 작은 일본 같은 느낌이에요.
스승님께 제가 “조그마한 가게를 열려고 하는데 가게 이름 좀 지어주세요”라고 했는데 흔쾌히 지어주셨어요. 스승님이 젊었을 때 로안 기쿠노이 지점을 열었거든요. 오픈 직전에 아주 오래된 절의 노스님을 찾아가서 상담하셨대요.
“제가 아버님의 그늘에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어렸을 때 작은 가게를 오픈하고 싶은데 기쿠노이 본점 이름 그대로 쓰면 좀 그러니까 좋은 이름 없겠습니까?”라고 물으셨대요. 그때 이슬 ‘로(露)’자를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미쉐린 2스타를 유지하고 있는 ‘로안’의 ‘로’자도 저희 산로의 ‘로’자거든요.
‘산로(三露)’는 석 삼(三)자에 이슬 로(露)인데, ‘물을 세 번 뿌리다’는 의미입니다. 일본 레스토랑은 손님이 들어올 시간에 먼지 날리지 않게 바닥에 물을 뿌려놔요. 그리고 커튼 같은 ‘노렌‘을 걸어놓거든요. 그러면 저희가 흔히 알고 있는 카페 오픈이라는 팻말이랑 똑같은 의미예요. 한마디로 손님을 극진히 맞이하고 대접하라는 의미이죠.
▶시그니처 요리라고 해서 매달 같은 요리가 나가는 건 없고요. 맛있고 정성스럽게 우려낸 다시를 가지고 밑간을 들이고 제철 식재료로 조리하는 게 저희의 가장 큰 무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 같으면 국내 자연산 송이버섯이 시즌 아웃되는 시기인데 송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하고 있어요. 제철의 식재료를 저희 산로의 조리 방법으로 내놓는 것이 다른 레스토랑과 차별화된 것이지 않을까 싶네요.
- 점심에 장어덮밥만 선보인 이유는?
▶맨 처음 장어를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요. 자주 오시는 단골 손님분들이 “장어덮밥 잘하는데 점심에 그거 좀 해줘”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은 거예요. 대한민국 파인다이닝 시장이 어렵고 월세도 높고 다른 것도 비용이 들어가는 게 많잖아요. 그래서 한 달 월세 정도는 벌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어요. 제가 열심히 잘 구우면 되니깐요.
- 가게를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산로는 코로나 이전부터 준비해 2023년 10월 18일에 문을 열었다.)
▶화덕이라든지 도자기로 만든 찜기 같은 거는 작가님들이 유명하다 보니까 오래 걸렸어요. 가장 오래 걸렸던 거는 그릇인데 8~9개월 걸렸어요. 인테리어도 손님들과 직원들의 동선을 분리하고 연기가 나는 것들은 백 사이드로 넣고 신경 쓴 게 많았죠.
▶서울의 작은 교토를 만들고 싶었어요. 서울은 어딜 가도 빌딩 뷰잖아요. 교토에 가면 ‘유키미마도(雪見窓)’라고 해서 눈이 왔나 안 왔나 밑에만 보이게 하는 창문이 있거든요. 그런 거를 만들어서 건너편 빌딩보다는 녹색을 좀 보여 드리면서 손님들이 식사하시게 하는 게 저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귀뚜라미 소리를 들려드리는 것도, 일상생활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다 보면 이런 소리를 귀에서 놓치게 되거든요. (산로는 실제로 귀뚜라미를 키우고 있다.)
- 최근 인기인 흑백요리사에서 일식이 다른 요리보다 덜 보이는 느낌인데?
▶ 식재료 등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차이를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셰프가 없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어요. 너무 훌륭한 명장님께서 튀김 덮밥도 하셨는데 그 외의 거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지 않았을까. 지금 서울에서는 일본 요리를 잘하는 셰프도 많고 스시의 레벨은 거의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하고요. 저를 포함해 많은 셰프님들이 일본 현지에서 일을 하고 귀국하고 있고 그 프로그램 취지에 걸맞은 셰프님들이 항상 기다리고 있는데 접촉을 아직…
- 흑백요리사 시즌2 참가 의향이 있으신지?
▶ 네, 불러만 주시면 열심히ㅎㅎㅎ
▶ 지난달 10일 스승님이 학동역 인근에 있는 나카무라 아카데미에 개원 15주년 기념 특별 강연을 하셨어요. 제가 기쿠노이에 들어간 최초의 외국인이자, 최초의 외국인 수제자이기 때문에 기쿠노이에서 근무할 때도 스승님을 모시고 나카무라 아카데미에 몇 번 왔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오랜만에 옆에서 조수 역할도 했습니다. 스승님이 오시니 기쿠노이 출신 셰프 8명이 모여 인사도 드렸죠. 아난티 앳 강남 겐지의 송우종 셰프, 무니 김동욱 셰프도 기쿠노이의 후배들이죠.
- 일식 셰프를 꿈꾸는 후배들한테 조언한다면?
▶ 무엇인가를 판단하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얘기하면 ‘나이 많은 사람이다’고 얘기할 수 있는데 요리만큼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거든요. 일본 요리에 대한 조리 기술은 상황에 맞게끔 조금씩 변하는데 그거에 대한 눈과 귀를 갖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 앞으로의 꿈은?
▶스승님이 기쿠노이 출신들을 모아 얼굴 보는 시간을 갖자라고도 하시고, ‘기쿠노이인’이라는 표현도 쓰거든요.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거죠. 저는 산로를 거쳐간 셰프들이 조금이나마 교토에 대한 맛을 배워가고 조금씩 퍼져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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