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해고자야말로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니까 [은유의 ‘먹고사는 일’]
본명 김주휘. 구슬 주, 빛날 휘를 쓴다. 우리 딸, 장군 되라며 아버지가 지어주셨고, 이름대로 그는 싸움터를 누빈다. 무기는 쇠붙이로 된 총칼이 아니라 따끈한 밥이다. 복장도 굽힘 없다. ‘노 사드(NO THAAD)’, 한반도에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는 구호 같은 사회 현안이 새겨진 슬로건 티셔츠를 갖춰 입고 손목에는 노란팔찌를 차고 머리는 질끈 묶어 챙모자를 뒤로 눌러쓴다. 관절 마디마디가 닳은 손으로 적게는 몇십 인분에서 많게는 1000인분 넘는 식사를 솜씨 좋게 차려내는 밥 출동 장군. 그는 참사 생존자, 유가족, 해고자 등 일상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 현장으로 찾아가는 ‘우리밥연대’ 활동가 ‘짜긍곰(별명)’이다.
“100인분 밥만 해도 밥통이 안 들어질 정도로 무거워요. 반찬이랑 가스통 등등 장비를 다 싣고 운전대를 잡으면 손이 덜덜덜 떨려요. 며칠 전부터 메뉴 짜고, 싸고 좋은 재료 찾느라 식자재 마트랑 새벽 시장 돌며 장 봐다 나르죠, 쌀 씻어서 밥해야지, 반찬 해야지 그거 다 들고 와서 차에 싣고 운전대 딱 잡으면 ‘더는 못 한다. 하···’ 자동으로 숨이 이렇게 쉬어져요. 근데 농성장에 갔는데 동지들이 밥을 십 분, 십오 분이면 다 드세요. 준비하는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니까 빨리 먹으면 엄청 허탈한데, 동지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면 진심을 드셨다는 표정이 보여요. 그래서 다시 빈 그릇 싣고 갈 땐 운전대 신나게 돌리면서 ‘다음에는 뭘 해가지고 오지?’ 해요(웃음).”
그를 밥에 빠뜨린 건 세월호다. 2014년 김주휘씨는 국화 한 송이 바치는 마음으로 경기도 안산 화랑공원 분향소에 갔다. 희생자 숫자는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막상 수백 명 아이들의 영정 사진과 미수습자의 빈 액자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시야를 메우자 큰 충격에 빠졌다. 집으로 가다가 저도 모르게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혼미한 상태에서 하나의 생각만 선명했다. ‘팽목항에 가야겠다.’ 그는 일하던 곳 근무를 주 3회로 돌리고 무작정 달려갔다.
처음에는 유가족 숙소에서 청소부터 했다. 냉장고를 여니 안이 너무 지저분했다. 유가족이 뭘 못해 드시는데 시민들이 주고 가고 각지에서 택배가 오니까 음식과 재료가 죄다 썩어가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누가 컵라면에 물 부어 갖다주면 조금 있다가 소화제를 한 주먹씩 삼켰다. 컵라면은 반이 남아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그는 미나리 한 박스를 데쳐 무치고 시어 꼬부라진 김치로 칼칼한 찌개를 끓였다. 같이 간 초등학생 딸아이한테 어머니 아버지들 모시고 나오라고 시켰다. 좀 드시라고 해도 꿈쩍 않더니 아이가 가니까 마지못해 나왔다. 다 같이 둘러앉은 밥상에서 다윤이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모여서 먹으니까 너무 좋다고···.”
그 모습을 보는 게 그는 너무 아프면서도 너무 좋았다. 3년의 시간이 야속하게 흐르고 3년의 밥정이 무심하게 쌓였다. 세월호 미수습자 허다윤, 조은화 양이 올라올 때까지 팽목항에 남은 최후의 시민 봉사자는 열 명. 그들이 우리밥연대가 되었다. 동료 ‘킁곰’이 “우리가 더 이상 목포에 가지 않아도 될 때가 오면 계속 누군가에게 밥을 대접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짜긍곰은 ‘대접’이라는 말에 꽂혔다. 국그릇에 밥 한덩이 넣어 김치 얹고 수저 꽂아 나가는 간편식도 농성장에선 귀한 한 끼니지만, 이왕이면 격식을 갖춰 밥과 찬을 차려드리고 싶었다. 입안에 모래가 있는 듯 껄끄럽고 혀가 쓴 유가족, 집 밖 생활에 지치고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된 해고자야말로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고공농성장에 시래기밥 올려 보냈더니
농성장 요리사인 그가 가장 중시하는 건 동지들의 입맛이다. “유가족분들에게도 고향을 물어요. 또 평소에 뭘 맛있게 드시는지 물어보면 처음엔 다들 아무거나 잘 먹는다,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해요. 김치만 있어도 된다. 그러면 김치가 신 게 좋아요, 갓 한 게 좋으세요? 집요하게 물으면 답해요. 물고기 좋아하세요, 육고기 좋아하세요? 고기도 빨간 고기냐, 간장 고기냐 좋아하는 게 다르죠. 어떤 분은 김치가 요만큼만 쉬어도 못 먹기도 해요. 연대자들이 와서 뭘 해줬는데 그걸 못 먹으면 민망한 거죠. 그래서 겉절이도 만들고, 비건이 있으니까 두부도 굽고 그러다 보면 반찬이 아홉 가지도 돼요. 길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주면 주는 대로 먹어야 하나요.”
팽목항을 나와 우리밥연대가 가장 먼저 출동한 곳은 서울정부청사 앞 공동투쟁단이다. 콜트콜텍, 세종호텔, 아사히, 하이테크 등 전국에서 올라와 싸우는 동지들에게 뜨신 밥을 대접했다. 2018년 파인텍 해고노동자 투쟁은 그에게 잊지 못할 현장이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미터 굴뚝에서 400일 넘는 고공농성이 이어졌다. 그해 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도시락을 올리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사이 반찬이 다 얼었어요. 언 반찬을 보고 엄청 울었어요. 농성하는 동지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고기를 먹여야지 해서 고기 반찬을 올렸어요. 그러다가 한번은 시래기밥을 올렸더니 신나서 전화가 왔어요.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그 비싼 안심을 올릴 때보다 더 좋아해(웃음). 하물며 콩나물밥도 신난다고 먹고요. 이거구나 싶었죠. 음식의 7할은 추억이에요.”
비정규직 잔혹사로 기억될 2019년 톨게이트 수납원 여성 동지들의 긴 싸움에도 밥으로 힘을 보탰다. 2022년 여름엔 무려 1500인분 식사 대접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거제 대우조선소 하청지회 유최안 동지가 0.3평짜리 철창에 스스로 갇혀 있는 사진을 본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처럼 달려온 시민들을 위해 우뭇가사리 콩국과 도토리묵밥, 그리고 껍질 벗겨 손질한 옥수수 수백 개를 6시간 반을 삶아서 준비한 것이다. 요리하는 사람에게 불지옥이 따로 없는 삼복더위에도, 음식에 잔얼음이 끼는 엄동설한에도 사람 입에 밥은 들어가야 하기에 어떻게든 무엇이든 차려낸다. 우리밥연대의 시그니처는 코스 요리다. 장기 농성장에만 내놓는 특식으로 식전 요리(샐러드·전복죽·굴국), 메인 요리(생선가스·안심스테이크·회), 후식(떡볶이·과일)을 계절에 따라 정한다. 우리밥연대에서 지난해 사용한 나무젓가락만 8000개를 웃돈다.
최근엔 9년 만에 복직하는 ‘아사히글라스 승리 보고대회’에도 밥을 날랐다. 그렇게 우리밥연대는 세월호 이후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증인이 되어가고 있다. “어디서 농성장 차렸다고 하면 저희가 먼저 밥해다 드릴까요? 김치 담가 드릴까요? 했는데 이제 해줄 수 있느냐고 요청이 오기 시작한 거죠. 의외로 밥 연대 받는 걸 ‘상’처럼 생각하세요. 우리한테도 밥차가 온다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밥이 뭐라고. 없으면 안 되는 매일 먹는 이게···. 뭐라도 자꾸 더 해가게 돼요. 요즘은 이런 건방도 있어요. 우리가 간다고 해야 (투쟁 사업장이) 소문이 난다. 그렇게 됐어요.”
김주휘씨는 입시학원에서 23년간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아이들을 만점 받는 기계로 만드는 일”을 접고 경기도 광명에서 전남 곡성으로 내려갔다가 이태 전 바다도 있고 동지도 있는 경남 통영에 정착했다. 서울에서 먼저 내려간 ‘킁곰’, 복직 후 퇴직하고 이주한 쌍용자동차 문기주 동지 등, 활동 초기엔 서울 경기권에 살던 멤버들이 하나둘 통영에 모여 우리밥연대 남부팀이 결성됐다. 그는 ‘짜긍곰의 작은 부엌’을 꾸리며 연잎밥이나 반찬을 팔아 활동 자금을 마련하고, 킁곰은 9년째 월급날이면 칼같이 돈을 낸다. 이렇게 우리밥연대는 후원을 받지 않고 직장을 다니는 구성원들이 각자 사비를 털고 일손을 보태는 방식으로 “신기하고 희한하게 운영이 되고 있다”. 의무감이나 부담감 없이 멤버들과 논의해 해낼 수 있을 때만 한다. 그는 “사람이 좋은데 사람이 싫은 사람들이 우리밥연대에 있다”라는 아리송한 문장으로 후원 없는 연대의 비결을 정리했다.
짜긍곰의 몸은 삐걱거린 지 오래다. 만나는 의사들마다 ‘아니, 어떻게 살았느냐’는 말부터 할 정도다. 반찬 가게 5개월 만에 어깨가 고장났다. 통증이 심해서 녹색병원에서 급하게 수술을 했다. 재활 때문에 어깨에 힘을 안 주고 움직였더니 이번엔 손이 상했다. 손가락 세 개를 다음 달에 수술할 예정이다. “처음엔 허리가 아파서 갔어요. 싸우는 동지들에게 자연스러운 병원이잖아요. 제가 간 모든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는데 녹색병원에서는 하지 마라, 지금 수술하면 오십, 육십에 어떻게 살 거냐, 수술하면 안 아플 거 같냐고 했죠.” 그는 걷기부터 서서히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점핑 등 근력과 유산소운동으로 체력을 키운다. 통영에서부터 서울까지 거리가 만만치 않지만 “과잉 진료를 안 한다는 믿음, 이익을 생각하기보다 환자를 아껴준다는 믿음”으로 녹색병원을 다니고 있다. 일을 줄이기 위해 반찬 가게도 포장배달 전문으로 바꾸었다. 아프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난 6월 그는 믿고 의지한 선배인 ‘십시일반 식사연대 밥묵차’ 유희 대표를 먼저 떠나보냈다.
자본주의 언어도 막지 못하는 것
“제가 곡성 내려가기 전날에도 밥을 했어요. 유희 쌤이 저를 꼭 안아주시면서 그러더라고요. ‘아프지 마라. 우리는 동지들 밥 해먹이려면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된다’고. 유희 쌤이 췌장암이라는 걸 제가 SNS에 올렸어요. 유희 쌤한테 아무것도 보내지 마라, 출동 요청하지 마라. 전화 와서 미친년이 까발렸다고 뭐라고 하는데, 제가 쌤한테 화를 냈죠. 나한테 아프지 말라고 해놓고···(눈물). 병원은 맨날 내가 가니까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지···.”
고인이 된 유희는 말했다. 밥은 사랑이고 하늘이다. 김주휘는 말한다. 밥은 일상이다. 밥 연대는 일상을 돌려주는 일이다. 그래서 내 몸의 통증을 잊을 만큼 기쁨이 강력하다고.
“이게 마약이에요. 마약 중독자들이 못 끊는 거랑 똑같아요(웃음). 내 자식도 아닌데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처럼 어쩜 이렇게 좋으냐고. 길게 생각 안 해요. 당장만 봐요. 농성장 나왔대, 파업한대 하면 ‘언제 가니?’ 딱 올라와요. 투사가 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일상과 가족을 빼앗기면서 투사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너무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하면서도 좋죠. 가서 받아오는 힘이 어마어마해요.”
남들은 걱정부터 한다. 그 많은 양을 끓이고 튀기고 삶고, 힘들어서 어쩌냐고. 행위의 고단함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멀리서는 못 보는 것을 가까이서 본다. 거대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의 의연함, 아무도 죽지 않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려는 유가족의 질긴 노력, 어떤 게 인간다운 행동인가를 질문하며 흔들리는 유약하고도 강인한 인간의 면면을 밥을 사이에 두고 본다. 그래서 두고두고 말한다. “그분들에게 밥을 해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1973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중2 때 다니던 성당 신부님이 광주학살 사진전을 열었다가 경찰에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신부님을 지키기 위해 초를 켜고 걸었다.
첫 시위의 기억이다. 이사를 가서 만나는 신부님이 “다 빨갱이 하는 분들”이었다. “내 자존감의 (10할을 넘어) 만 할인 아버지”는 늘 ‘행동이 가장 진심이 담긴 말’임을 강조했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참돔을 튀기고 빨간 실고추로 고명을 얹어 딸에게 밥을 차려주는 사랑의 요리사였다. 원래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던 그에게 지금의 밥 연대는 자연스럽다.
자신이 쓰임이 있는 것, 예쁘게 차려서 먹는 것, 남이 오해하든지 말든지 나대로 사는 것이 그는 좋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돈을 모아 늙고 병들었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언어는,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 돈을 쓰는 일에 단단히 꽂힌 그를 막지 못한다.
“노후 걱정이요? 제가 생각 꼬리가 길지 않아서 뭐가 들어오면 몸이 움직여요. 막연한 생각으로는 죽는 날까지 일한다. 한 번도 집을 갖고 평수를 늘리고 이런 걸 꿈꿔본 적 없고 죽는 날까지 하루에 술을 두세병 마시는 게 껌인 삶을 살고 싶어요(웃음).”
고백한 대로 그의 ‘솔 푸드(soul food)’는 컵라면과 팩 소주다. 마치 커피와 스위츠(달콤한 디저트)처럼 같이 먹어야 제맛인 짜긍곰의 세트 메뉴다. “우리 동지들이 길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게 컵라면이고 우리밥연대 식구들도 라면을 다 좋아해요. 저희는 밥을 하는 동안 음식 냄새를 맡으니까 못 먹겠는 거예요. 동지들 드시는 동안 우리는 컵라면에 소주 한잔 딱 마시면 그때가 너무 좋죠. 또 해냈구나.”
[캠페인] 전태일의료센터, 여러분의 이름으로 채워주세요
아픈 몸 너머 사회를 치료하는 이 병원의 이름은 ‘전태일’입니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안전 문제가 꼭 숨겨져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덜 아프고 덜 다칠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사회와 함께 행동하는 병원을 만듭니다. 전태일의료센터는 2027년 건립을 목표로 시민들의 건립기금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여 문의 : taeilhospital.org)
은유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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