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욕망에 분노하다가 굴복하게 되는 인간이여 [박찬일의 ‘칼과 책’]

박찬일 2024. 11. 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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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펴냄
ⓒ최산호

지금도 부산이나 포항, 울산에서는 고래 고기가 팔린다. 맛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어떤 신화적 미각에 기대기 때문이다. 고기를 맛본 사람들 다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특유의 향이 강하다. 고래는 상업 포경을 하지 않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신화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알다시피 ‘우연히’ 그물에 걸린 고래는 이를 증명하는 절차를 거쳐야 시중에 일부 나온다.

고래는 원래 고기보다는 기름을 얻기 위해서 잡았다. 석유가 없던 시절에 고래기름은 아주 훌륭한 원유였다. 서방세계는 산업화의 길을 걸으며 많은 기계를 만들어냈다. 기계는 윤활유를 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석유가 없을 때 고래기름은 가장 질 좋고, 싸고, 구하기 쉬운 윤활유였다.

미국이 한창 성장하던 1800년대 초반, 포경업은 5대 산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허먼 멜빌은 그때 하급선원으로 750대 1의 이익 배분을 계약하고 포경선을 탔다. 미국 동부의 포경 기지에서 출발하는 장거리 포경선이었다. 그 경험이 〈모비 딕〉을 탄생시켰다. 노벨위원회의 추천 100대 소설 같은 어마어마한 헌사가 붙는 이 작품은 출간 당시엔 초판도 다 못 팔고 혹평을 받은, 말하자면 저주받은 걸작이었다. 멜빌이 무척이나 존경하여 심지어 〈모비 딕〉을 헌정한다고 밝혔던 당대 유명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추천도 소용없었다. 출간 이후에 한동안 어떤 도서관에서는 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 코너에 책이 꽂혀 있었다는 일화처럼 당시 소설 문법과는 다른 몹시 난삽하고 백과사전적인 서술, 방백과 독백이 등장하는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영향일) 희곡적 구성, 오페라라고 해도 될 노래도 등장해서 독자를 당황시켰다. 무엇보다 출간 당시만 해도 예민한 문제인 신성모독적인 묘사들이 흥행 참패를 가져왔다고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걸작의 서사가 그렇듯이 정작 저자가 죽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각광을 받았다. 소설 속 에이해브 선장이 끝내 모비 딕을 잡지 못하듯 작가도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모비 딕〉은 한국에도 ‘꼭 읽어야 할 고전’으로 소개되었고, 〈백경(白鯨)〉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달고 팔렸다. 어릴 때 내가 읽은 책도 그랬다. 〈백경〉은 대체로 일어 중역본이었고, 축약판이었다. 이 책의 물리적 볼륨을 보면 이해가 된다. 모험소설로 분류되기 쉬운 줄거리이니 소년용으로도 추천되었고, ‘벽돌책’이라 할 만한 두께는 예전 출판 관행에서는 축약이 필수였으리라. 무엇보다 전통 소설의 흐름을 거스르는 원전의 백과사전식 구성이 문제였다. 포경에 관한 온갖 상식이 흐름에 불쑥 끼어들어 독립적인 장으로 들어가 있다. 축약판은 이런 내용을 빼고 에이해브와 선원들의 사투를 중심으로 만든 것이다. 기왕이면 완역본이 옳겠지만 축약판도 어쩌면 ‘소설’의 흐름을 따라잡는 데 더 어울린다는 게 출판업자들의 생각이었으리라.

고래는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신화적이다. 거대한 덩치, 배를 뒤집어버리는 힘과 포악성(대부분의 고래는 유순하지만), 어류인 줄 알았다가 따뜻한 피를 가지고 있으며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포유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갖게 된 경이, 일개 면민(面民)을 다 먹일 수 있다는 고기의 양과 어둔 밤을 밝혀주는 기름의 제공자, 알 수 없는 생태까지. 송창식이 노래한 고래도 그런 신화의 상징이었다. 멜빌이 〈모비 딕〉을 쓴 것도 이런 동경과 압도적 쓸모를 가진 대상이었기 때문일 테다.

“당신 스스로를 조심하세요”

자신의 다리를 삼킨 흰 고래 모비 딕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서 끝까지 추격하는 에이해브 선장은 그리하여 무모한 도전에 직면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상징하면서 소설적 서사를 드높이게 된 것이 아닐까. 일등항해사 스타벅(커피 스타벅스 브랜드는 이 이름에서 따왔다. 지혜로운 자를 의미한다)은 무리하게 고래를 추격하며 파멸을 향해 가는 포경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를 만류하지만, 에이해브는 스타벅에게 머스킷 총을 들고 위협한다. 스타벅은 이렇게 말한다.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조심하세요.”

종종 우리는 이 말을 자신에게 던져봐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에이해브 같은 기질을 숨기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폭풍우 치는 바다에 동력도 없이 떠 있는 목재 포경선 피쿼드호, 겨우 몇 인치짜리 날이 달린 작살이 유일한 무기인 고래잡이 선원과 다름없을. 그러면서도 때로는 광기와 욕망에 분노하다가 굴복하게 되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모비 딕〉은 그래서 매우 세밀한 흰 고래잡이 포경선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바다처럼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인간의 운명에 관한 실존적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슬란드를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한 식당에 들렀는데, 예약이 꽉 차서 자리를 잡기 힘들었다. 우연히 본 예약자 명부가 특이했다. 죄다 일본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일까. 주인이 웃으며 요리 한 접시를 하겠느냐고 했다. ‘카르파치오 육회’라고 했다. 그러마 했더니 너무도 선명하게 아름다운 붉은색 고기를 마치 참치 등살처럼 잘라서 내왔다. 고래 고기의 등살 육회였다. 일본 방송에 이 식당의 고래 고기가 방영됐고, 이걸 먹으러 일본인들이 예약을 걸어댔던 것이었다. 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부패한 듯한 기름의 찌든 내가 진동하던, 한국에서 먹어본 밍크고래 고기의 수준이 아니었다.

〈모비 딕〉에도 고래 고기를 먹는 장면이 당연히 있다. 당시 포경선은 다량의 소고기를 싣고 출항했다. 고래를 잡으면 기름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무통 수백 개에 기름을 짜서 모으는 게 선원의 중요한 일이었다. 고래 고기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좋아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선원 스터브는 고래 고기를 좋아해서 스테이크로 먹었다. 스터브는 흑인인 요리사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고기를 너무 많이 익혀서 망치지 않으려면 (···) 한 손에 스테이크를 들고 그걸 다른 손에 든 뜨거운 숯불에게 보여줘. 그리고 나서 접시에 담는 거야. 알겠어? (···) 고래를 해체할 때 대기하고 있다가 지느러미 끝부분을 얻어 와서 초절임을 하라고.”

레어 굽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상어처럼 고래 지느러미도 특유의 조직감이 맛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피쿼드호는 우리가 알듯이 끝내 선장의 원수인 모비 딕을 잡는 데 실패한다. 선장은 다리를 빼앗아갔던 고래에게 결국 목숨도 잃는다. 종말의 그 현장은 직접 책을 보시는 것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에이해브의 다음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 한복판에서라도 너를 향해 작살을 던지고,

가눌 수 없는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너에게 뱉어주마.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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