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만 누리는 ‘엄격한 증명의 원칙’ [세상에 이런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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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 안산에서 법률구조공단 변호사로 활동하던 2008년,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외국인 사건의 국선변호인으로 변론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2019년 12월11일 서울동부지방법원 이형주 판사는 보이스피싱 사기 범죄로 기소된 유학생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장문의 글을 덧붙였다.
그러나 검찰은 생활고에 시달려 일자리를 찾다 의도하지 않게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행동책에 대해서는 "몰랐을 리 없다"라며 기소권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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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 안산에서 법률구조공단 변호사로 활동하던 2008년,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외국인 사건의 국선변호인으로 변론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보이스피싱 범죄는 우리 사회에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이 일에 가담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변론 과정에서 실제 만나는 외국인 중에는 유학생들이 많았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단기 일자리 광고를 보고 찾아간 그들은 시키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다. 어느 날 현금카드를 건네받고 은행 ATM기에서 돈을 인출하다 갑자기 체포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은행 ATM기 앞에서 경찰에 연행된 후에야 자신이 거대한 보이스피싱 범죄 사기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유학생들은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사기죄 주범인 성명불상자의 공동정범으로 줄줄이 기소되었다. 검찰은 보이스피싱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이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도망 간 주범이 받아야 할 중형을 피고인에게 선고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법원은 이에 화답해 중형을 선고했다. ‘보이스피싱 범죄인 줄 몰랐다. 일당을 받고 시키는 대로 돈을 인출했을 뿐이다’라는 유학생들의 항변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보이스피싱에 얼떨결에 가담한 수많은 행동책들이 중형으로 처벌되었지만, 보이스피싱 범죄는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행동책을 주범처럼 처벌하면 보이스피싱 범죄가 근절될 것이라는 검찰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자 법원도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9년 12월11일 서울동부지방법원 이형주 판사는 보이스피싱 사기 범죄로 기소된 유학생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장문의 글을 덧붙였다. 이형주 판사는 “행동책에 대한 과도한 처벌로 사회 방위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은 실태에 무지한 자아도취였고 오히려 형사정책적으로 역효과가 났음을 자각하고, 형사소송법상 엄격한 증명의 원칙은 보이스피싱 사기 범행에도 고수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검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기소를 하고, 법원의 무죄판결은 이어지고 있다.
피의자 말 믿어주는 ‘너무 낯선’ 검찰의 모습
16년 전 국선 변론에서 만난 보이스피싱 가담 유학생 사건이 떠오른 건 최근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 때문이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김건희 여사를 수사한 검찰은 피의자 명의 계좌들에서 일부 시세 조종성 주문이 제출된 건 맞지만, 피의자가 이 사건 시세 조종을 공모했음을 인정할만한 뚜렷한 자료가 없다고 불기소 이유를 밝혔다.
주가조작 범죄는 주식시장을 교란하는 중대범죄다. 그럼에도 검찰은 ‘엄격한 증명의 원칙’을 고수해 김건희 여사를 불기소 처분했다. 의심 가는 정황은 차고 넘치는데 뚜렷한 증거가 없다며 피의자의 말을 믿어주는 검찰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다. 그러나 검찰은 생활고에 시달려 일자리를 찾다 의도하지 않게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행동책에 대해서는 “몰랐을 리 없다”라며 기소권을 행사하고 있다.
검찰은 김건희 여사 불기소 처분을 두고 원칙대로 처리했다고 주장한다. 비판이 일자 검찰은 억울해하는 듯하다. 억울함은 검찰 몫이 아니다. 그 원칙을 지키지 않아 무리한 검찰의 기소권에 의해 피해를 보는 일반 서민의 몫이다. 김건희 여사 사건에 ‘엄격한 증명의 원칙’을 고수한 검찰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명령한다. 그 원칙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하라!
최정규 (변호사·<얼굴 없는 검사들> 저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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