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BTS 좋지만 CCS는 아냐”…피카츄는 “화석연료 지원 중단”

윤연정 기자 2024. 11. 17. 08: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전세계 기후활동가, 곳곳에서 목소리 높여
기후 ‘피해국’, “선진국이 재원 마련” 주문
15일(현지시각)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 행사장 내 길목 한 모퉁이에서 “화석연료·가스에 더 이상 공적자금 안돼”, “사요나라(안녕), 화석연료”, “화석연료 금융 이제 그만”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활동가들의 모습. 윤연정 기자

“‘비티에스’(BTS)는 좋지만 ‘시시에스’(CCS·탄소포집·저장)는 아냐!”(BTS not CCS)

지난 15일(현지시각),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있는 올림픽경기장 한쪽에서 사람들이 외쳐대는 구호에서 생뚱맞게도 한국을 대표하는 케이팝 그룹 비티에스의 이름이 들렸다. “사요나라(안녕), 화석연료!” 같은 구호와 함께 일본의 유명 캐릭터 ‘피카츄’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야나이 야나이 카마로이!”라는 구호도 들렸는데, 이는 호주 원주민어로 “우리나라에서 나가”라는 뜻이라 했다. 이 구호들로 미루어볼 때, 이 행사는 한국, 일본, 호주 세 나라와 깊은 관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날은 스물아홉번째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 다섯번째 날로, 이곳은 각종 회의들이 진행되는 ‘블루존’ 공간 내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길목 한 모퉁이였다. 기후총회 현장에선 이처럼 주최측이 마련한 공식 행사가 아니더라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주최측의 승인 아래 자발적으로 여는 집회들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이 행사는 일본 ‘지구의 벗’, 일본 ‘350.org’, 호주의 ‘기후솔루션’, 아시아 환경단체 ‘부채와 개발에 관한 아시아인 운동’(APMOD)이 함께 주관한 것으로, 이들은 호주와 일본, 한국 세 나라가 화석연료 산업에 수출 지원 등의 명목으로 공적 금융을 투자하는 것을 규탄하고 이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이 한국, 일본, 호주라고 하지 않고 ‘비티에스’나 ‘피카츄’를 언급하고 호주 원주민 말을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후총회에선 사전에 승인 받은 단체들만 장내 시위를 할 수 있는데,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국은 이때 특정 인물이나 나라의 이름을 언급하면 안되고 국기를 들어서도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각각의 상징물을 활용해 세 나라가 어딘지 드러내고 비판한 것이다.

15일(현지시각)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 행사장 내 길목 한 모퉁이에서 호주 고메로이족 출신 활동가 폴리 커트모어가 “화석연료는 필요없다”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 윤연정 기자
15일 아제르바이잔 기후총회장에서 기후 및 인권 단체인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글로벌캠페인’(DCJ)이 “정의롭고 공정한 전환”을 외치며 화석연료 중단을 외치는 모습. 윤연정 기자

히로키 오사다 일본 지구의 벗 캠페이너는 “피카츄의 나라에서, 비티에스의 나라에서 엄청난 규모의 돈이 화석연료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각각 세계 3위와 2위”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올해 초 미국 기후환경단체 ‘오일 체인지 인터내셔널’이 조사한 결과 한국은 2020~2022년 신규 석유·가스·석탄 프로젝트 지원에 한해 평균 100억달러 규모의 공적 금융을 투자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이전 1위였던 일본은 70억달러로 3위를 기록했다. 활동가들은 두 나라가 “‘에너지 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러한 ‘더러운’ 투자 활동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주에서 온 한 활동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큰 오염국 가운데 하나, 가장 큰 오일·가스 생산국이자 확장국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호주 활동가들은 호주가 “일본과 한국의 수요를 화석연료 가스 확장과 수출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호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이다. 그런데 일본·한국 등에서 수요가 크다는 것을 앞세워 자국 내 가스 생산을 더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들은 “호주의 가스 확장은 아시아의 에너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의 권리를 침해하고 기후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호주의 에너지업체 산토스와 일본의 제라, 한국의 에스케이(SK)이엔에스가 합작해 추진하고 있는 호주 바로사 가스전 개발이 바로 그 사례다. 호주 원주민과 환경단체들은 막대한 이산화탄소 배출 등 가스전 개발이 환경과 삶을 파괴한다며 ‘개발 반대’ 투쟁을 해왔는데, 이에 대해 에스케이이엔에스는 “탄소포집·저장(CSS) 기술을 도입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해결하겠다” 등의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이날 행사에서 “시시에스 말고 비티에스”라는 구호가 나온 맥락이다.

50여명이 넘는 정부 관계자, 기후활동가, 언론 등이 모여 이날 행사를 지켜보며 호응했다. 한 여성 기후활동가는 “피카츄 탈을 쓴 사람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에 이끌려 계속 보고 있다”며 “정말 동의하는 얘기다. (화석연료 지원 반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눈으로 시위를 지켜보던 카자흐스탄에서 온 뮤카다스(16)양은 “이번에 활동가인 삼촌을 따라 처음 오게됐다. 기후변화 문제가 빨리 해결될거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기부여가 됐다”고 말했다.

15일(현지시각)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9)의 군소도서국가연합(AOSIS)와 최빈개도국그룹(LDC) 의장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윤연정 기자

이날은 기후총회 일정 가운데 ‘에너지의 날’이었기에, 행사장 곳곳에서 이 같은 “화석연료 중단” 등 규탄의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정부간 협상 과정과 각국 입장들이 발표되는 기자회견장에서는 ‘화석연료 중단’과 함께 화석연료 확대로 기후변화를 일으킨 선진국들이 기후변화의 피해를 받는 나라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곧 ‘기후재원’에 대한 이야기도 줄곧 관심이었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선진국들이 했던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들의 모임인 ‘군소도서국가연합’(AOSIS)의 의장국인 사모아의 토레스술루술루 세드릭 슈스터 자연자원환경부 장관은 이날 한겨레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석탄이나 가스 등 화석연료 에너지원에 투자가 계속될수록 ‘기후피해’ 국가들의 기후 적응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날 군소도서국연합과 최빈개도국그룹(LDC)은 올해 기후총회의 핵심 의제인 ‘신규 기후재원 목표’(NCQG)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신규 기후재원 목표에는 군소도서국과 최빈개도국의 ‘손실과 피해’를 다루는 지원이 포함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등의 입장을 밝혔다. 현재 군소도서국연합에는 39개국이, 최빈개도국그룹에는 45개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슈스터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파리협정의 핵심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한하고, 전 세계적인 ‘적응’ 목표와 ‘손실과 피해’에 대해 대응하기 위한 약속들을 이행하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세계 가장 취약한 나라들의 지원을 얘기하며 기후재원에 대한 높은 목표를 제시해야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규모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파리협정에 따라 기존에 당연히 이행돼야 했던 재정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파리협정 제9조는 선진국 당사국이 개발도상국 당사국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슈스터 장관은 한겨레에 선진국들이 파리협정 때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며 “신규 기후재원 목표는 파리협정 제9조에 따라 선진국의 주도적인 구실로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소도서국연합 국가들의 경우 “‘적응’ 및 ‘손실과 피해’에 할당되어야 할 최소 금액이 연간 39억달러”라고도 했다.

군소도서국연합과 최빈개도국그룹은 신규 기후재원 목표가 민간 투자보다도 선진국 정부들이 직접 조성하는 공공자금(보조금)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에반스 은제와 최빈개도국그룹 의장은 “파리협정 제9조에 따라 해당 당사국(선진국 정부)들이 책임을 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적응’ 및 ‘손실과 피해’ 관련 기금에는 수익이 발생하지 않아 민간 투자는 잘 흐르지 않기 때문에 이를 유도할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민간 자금은 (주로) 대출 형태로 지원되는데, 그건 우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기후총회는 이제 막 1주일 지났는데, 핵심 의제인 신규 기후재원 목표에 대해 아직 눈에 띄는 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총회에 화석연료 산업 로비스트들이 1700여명 넘게 참석하고 있다’ 같은 비판이 제기되어, ‘화석연료 산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기후총회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어지고 있다.

글·사진 바쿠/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