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기사였지만 ‘진실’로 믿고 썼다면…“언론사 손해배상책임 없다” [민경진의 판례 읽기]
[법알못 판례 읽기]
심재철 전 의원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자신이 거짓 자백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 언론사와 기자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다. 1심 사건이 접수된 지 약 5년 만에 나온 상고심 판결이다.
대법원은 기사에 일부 허위 사실이 있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언론사가 손해배상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존 법리를 재차 확인했다.
하급심·대법원 모두 “손해배상책임 없어”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지난 10월 8일 심 전 의원이 “허위 기사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5000만원을 지급하고 온라인 기사를 삭제하라”며 한겨레신문과 기자 3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심 전 의원은 한겨레가 2004년과 2005년, 2018년에 주간지와 인터넷판 등으로 출고한 자신의 학생운동 시절 기사 3건이 허위 사실을 담고 있어 사회적 가치·평가가 침해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2019년 9월 이 사건 소송을 제기했다.
기사에는 1980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 전 의원이 그해 6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로 신군부의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와 강압에 의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지시와 돈을 받았다는 허위 자백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심 전 의원이 1995년 이를 바로잡는 진술서를 썼다는 내용도 담겼다.
1심 재판부는 심 전 의원의 청구를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심 전 의원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기사 내용의 대부분은 직접 작성한 진술서에 그대로 기재돼 있는 내용이거나 그 진술서의 기재 내용 및 사건과 관련한 정황 등에 근거해 작성된 것”이라며 “기사 내용이 허위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 판단도 같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심 전 의원은 중견 정치인으로서 그 과거 행보에 대해서까지 평가와 검증이 계속 요구되는 공적인 인물”이라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에 관한 언론보도이므로 표현행위의 위법성 판단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일부 기사 내용이 허위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각 기사에 적시된 사실은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과 평가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현대사를 다룬 역사적 사실”이라며 “당시 군사법 체계 내에서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 나타난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에 대한 접근 가능성의 한계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고가 소송 제기 이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점, 그 외에 각 기사 내용이나 그 논조, 기사 작성의 근거들을 종합해 보면 피고들로서는 앞서 본 이 사건 각 기사에서 적시된 사실적 주장들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칙에 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허위 사실의 적시, 명예훼손에서 위법성조각사유 등에 관한 법리 오해, 석명의무 위반, 이유모순 등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며 “명예훼손에 따른 불법행위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 판단은 수긍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허위 기사 손해배상’ 기존 법리 재확인
앞서 대법원은 검찰 수사를 받은 공정거래위원회 한 직원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대법원 2007년 12월 27일 선고 2007다29379 판결)하면서 “신문 등 언론매체가 사실을 적시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도 그것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에는 그 증명이 없다 하더라도 행위자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위법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 판례는 또 ‘언론·출판의 자유와 명예 보호 사이의 한계를 설정하는 데 해당 표현이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에 관한 표현의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돼야 한다’(대법원 2004년 2월 27일 선고 2001다53387 판결)고 보고 있다.
대법원은 ‘적시된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경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망인이나 그 유족의 명예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고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점도 고려돼야 한다’(대법원 1998년 2월 27일 선고 97다19038 판결)는 판례도 유지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심 전 의원 사건은 이 같은 법리를 재확인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원고에게 ‘기사 삭제 청구권’도 없어”
다만 이 사건 재판부는 더 나아가 객관적으로 허위 내용이 담긴 기사에 대한 삭제 청구를 언론사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대법원은 기사삭제청구권의 성립 요건을 △표현 내용이 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닐 것 △원고의 명예가 중대하고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는 상태에 있을 것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이라는 두 가치를 비교 형량한 결과 인격권이 우세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앞선 판례에 언급된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는 기사삭제청구권에 대한 권리저지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심 전 의원은 이 사건 기사의 작성·게시 행위가 위법함을 전제로 기사삭제를 청구했고 법원은 객관적 허위 사실이더라도 기사 작성·게시가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이상 기사삭제청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돋보기]
‘논두렁 시계’ 허위 보도, 기사냐 논평이냐에 판결 갈려
대법원은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노컷뉴스 운영사 CBSi 등을 상대로 제기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른바 ‘논두렁 시계’ 관련 손해배상 사건(대법원 2024년 5월 9일 선고 2021다270654 판결)에서도 위 사건과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앞서 노컷뉴스는 2018년 6월 ‘이인규 미국 주거지 확인됐다, 소환 불가피’라는 기사에서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의혹에 관한 사건 정보를 언론에 흘린 것에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관여했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이어 ‘이인규는 돌아와 진실을 밝혀야 한다’라는 제목의 논평에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도덕적 타격을 주기 위한 국정원의 기획이었다며 사실을 시인했다’는 내용을 기재했다.
이 전 부장은 이 같은 보도가 허위 사실이라며 정정보도와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보도와 논평 내용을 모두 허위로 인정해 48시간 동안 정정보도문을 게재하고 이 전 부장에게 CBSi와 기자가 3000만원을, CBSi와 논설위원이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논평과 관련한 손해배상 명령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기사와 관련해서는 CBSi와 기자가 이 전 부장에게 손해를 배상할 필요는 없다며 이 부분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대법원은 “기사의 목적은 공직자의 직무수행에 대한 감시·비판·견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의혹이 명확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당시 피고들은 진실이라고 믿었을 수 있고 그러한 믿음에 상당한 이유가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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