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도 성공했는데…이스라엘은 왜 전투기 개발에는 실패했나 [영상]
프랑스, 이스라엘에 미라지 전투기 지원하다
아랍 산유국 압박에 전격 중단
이스라엘 ‘라비’ 독자 개발 나섰지만
F-16 경쟁 모델 우려한 美의 요청
국내 개발비 과도 우려에 무산
하지만 인공위성, 방공망 기술 밑거름돼
2017년 8월 8일 오전 8시 서울 이태원동의 이스라엘 관저에서 카임 코쉔 주한 이스라엘 대사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통밀빵, 스크램블드에그, 야채샐러드, 우유를 넣은 커피가 식탁에 올랐습니다. 2시간 동안 여러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언돔 같은 무기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주 국방 의지가 돋보이는 사례들이라고 말하자 코쉔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스라엘군의 무기 개발사에는 실패 스토리도 있다고 했다.
대사인 만큼 자기네 자랑거리만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실패 경험을 꺼내놓기에 속으로 좀 놀랐습니다. 핵 개발에도 성공한 이스라엘이 전투기 개발에는 실패했다니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그 스토리가 뭔지 궁금하다고 묻자 대사는 까만 커피에 하얀 우유를 붓고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시더니 전투기 ‘라비(Lavi)’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느냐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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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196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1967년 6월 5일 오전 7시 45분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가 총출동했다. 약 190대의 전투기가 이륙하여 지중해 영공으로 향했다. 이집트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전투기들은 시나이반도를 지날 무렵 남쪽으로 급선회해 수도 카이로로 날아갔다. 이집트 전투기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공군 기지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가차 없이 공습을 퍼부었다. 이집트가 보유한 전투기 총 450여 기 가운데 300여기가 이 공습으로 파괴, 불능상태가 됐다.
이후 이집트군은 이스라엘 전투기의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었다. 하늘을 제패한 이스라엘은 딱 6일 만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누르고 3차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제 공격, 그리고 전투기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줬다.
◇프랑스 전투기에 의지한 이스라엘
‘6일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이 사용한 전투기는 이스라엘 제가 아니었다. 프랑스 방산업체인 다쏘가 제작한 미라주(Mirage) 전투기였다. 이스라엘은 당시 프랑스와 사이가 좋았다. 이들로부터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무기를 공급받았다.
‘영원한 우방’이란 없는 법. 3차 전쟁을 계기로 더욱 공중권 강화에 나설 이스라엘은 돌연 프랑스로부터 “더는 전투기를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산유국들이 프랑스에 ‘이스라엘에 계속 무기를 주면 ‘오일’을 주지 않겠다’고 압박한 것이다. 국익 앞에 우방은 없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했다.
이스라엘은 급하게 미라지를 개량·복제해 ‘네쉐르(히브리어로 독수리)’, ‘크피르(히브리어로 아기 사자)’라는 이름의 전투기를 만들어냈다.
네쉐르, 크피르 모두 성능이 우수했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미라지를 개량할 수는 없었다. 시리아, 이집트 등 적국들은 소련 등으로부터 최신 전투기를 받아 무장 중이었다.
이스라엘 내에서 ‘하늘 주도권’을 적들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제기됐다. 이스라엘은 소련의 최신 전투기와 맞서 싸울 전투기가 필요했다. 조종 능력도 중요하지만 전투기는 성능에서 일단 밀리면 교전에서 매우 불리하다.
◇”우리의 전투기를 만들자”
그런 배경으로 이스라엘에서 1970년대 말 전투기 독자 개발의 필요성이 떠올랐다. 1980년 2월에 본격적으로 개발 사업이 추진됐다. 개발할 전투기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젊은 사자란 뜻인 ‘라비’로 정해졌다.
이미 미라지를 개량·복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라비를 양산해 네쉐르 등을 대체하고 다른 나라에 수출할 계획도 세웠다.
중동 지역은 사막 지형이 대부분이어서 일교차가 크고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소련·프랑스의 전투기들은 툭하면 고장이 났다.
미국에선 멀쩡하던 전투기의 각종 전자 장비는 중동 지역에만 오면 자주 오작동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은 이런 점을 감안해 라비를 중동 지역에 최적화된 전투기로 만들기로 했다.
1986년 11월 31일, 시제기가 첫 시험비행을 했다. 조종사 메나헴 쉬물이 탄 시제기는 이날 오후 1시 21분에 이륙해 26분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쳤다. 쉬물은 착륙하고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매츄얀(훌륭하네요)!”
3개월 뒤 신형 항법 장치 등이 장착되어 조금 더 발전한 두 번째 시제기의 시험비행도 ‘매츄얀’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라비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8월에 라비 개발은 전격 중단됐다. 충격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비의 개발은 왜 중단됐나
라비는 보수 정당인 리쿠드의 유력 정치인이자 항공 전문가 출신인 모쉐 아렌스의 지지에 힘 입어 개발됐다. 아렌스는 1983년부터 1984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는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라비 프로젝트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미국 MIT를 졸업하고 32세 때 이스라엘 테크니온대학에서 항공학 교수를 지냈다. 누구보다 전투기 국산화에 대한 애착이 컸다.
라비 개발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라비 개발에는 미국이 기술뿐 아니라 개발비도 지원하고 있었는데, 갈수록 비용이 불어나자 난색을 표했다.
미 정부와 방산업체 내부에서는 라비가 완성되면 무기 시장에서 F-16 C/D와 F/A-18C/D 같은 미 전투기와 경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전쟁에서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두고, 국가로서의 지위를 굳히자 양국 협력 관계를 격상시킨 상태였다.
각종 지원이 아낌 없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스라엘 라비가 무기 시장에서 미국 F-16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자 라비 개발을 중단시키려 한 것이다. 이렇게 국가 이익이 걸리면 우방이고 뭐고 없다.
이스라엘군 내에서도 반대파가 있었다. 공군의 아비후 벤 눈 장군은 전투기의 독자 개발보다 성능이 이미 검증된 F-16를 수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마이클 브루노 이스라엘은행 총재도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은 고가의 전투기 개발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리하게 추진하면 국가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400만 명이었다. 국방비는 GDP의 24%에 달했다. 당시 미국의 GDP 대비 국방비가 5%이고 한국이 3%정도였다. 적국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비대한 국방비 지출로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은행총재까지 나서 라비 개발비는 감당 못할 지경이라며 반대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아렌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라비 프로젝트가 국가적 자부심과 국가 기술력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이며 수출을 통해 큰 경제적 이익도 꾀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반박했다.
이스라엘과 군사 협력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라비 개발 초기부터 큰 관심을 갖고 구입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핵심 무기 개발은 경제성이나 효율성만을 가지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보고 장기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또 수년간 해오던 사업을 중도 포기할 경우 그간 지출한 비용이 의미 없이 증발하며 창출됐던 일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문제도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라비 프로젝트가 중단될 것이란 소문이 돌자 이스라엘항공우주산업(IAI) 직원들은 ‘라비는 계속돼야 한다’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표 차로 라비가 죽다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1987년 8월 30일 이스라엘 정부는 내부적으로 라비 개발의 중단 여부를 두고 투표를 실시했다. 의원내각제인 이스라엘은 장관들이 의원들이다. 정당 연립 정부이기 때문에 장관들의 소속 정당도 다르다.
아렌스가 속한 리쿠드당 소속 장관 등은 라비 개발에 찬성했다. 반면 리쿠드의 경쟁 정당인 하아부다(노동)당 소속원들은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라비 개발을 포기하면 보상을 두둑이 해주겠다면서 대대적으로 로비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11표, 반대 12표로 단 1표 차이였다. 1명은 기권했다. 아렌스는 국방부 장관을 마친 뒤 관할 부서가 없는 장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사표를 던졌다.
라비 개발을 도중에 포기하는 정부의 일원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F-16Cs 90기를 수입한다고 발표했다.
2008년에 익명의 러시아 기술자는 중국이 이스라엘로부터 라비의 기술을 거액에 구입해 이를 기반으로 중국 전투기 J-10을 개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뼈와 살이 된 실패 경험
핵심 무기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산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스라엘에게도 전투기 자체 개발은 쉽지 않았다.
야심차게 시작해 수년간 큰 진전을 이루어 성공을 목전에 뒀다. 하지만 결국 미국과 국내 정치권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라는 쓴 잔을 들이켜야 했다. 라비 시제기는 남부 사막도시 브엘셰바 인근의 공군박물관에 전시됐다.
라비의 역사를 실패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라비가 이스라엘의 항공우주 산업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7년 6개월간 세계 최고 항공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라비를 개발했던 이스라엘은 각종 최신 항공 기술을 습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항공 장비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예가 전투기용 레이더 EL/M-2032이다. 라비에 장착하려고 만든 것인데, 성능이 워낙 뛰어나 나중에 터키 등 여러 나라에 대량 수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 레이더는 다양한 공대공·공대지 모드를 갖추고 있어 공격 임무 수행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레이더는 한국산 다목적 경전폭기 FA-50에도 장착돼 있다.
◇인공위성 오페크의 밑거름 된 라비
무엇보다 라비 개발 경험은 1988년 이스라엘의 첫 인공위성인 오페크 1호 개발에 큰 도움이 됐다. 라비에 적용된 항공전자 기술 등이 오페크에 이전된 것이다. 당시 인공위성 발사 기술을 완성하여 실제로 성공시킨 나라는 이스라엘을 포함해 8국밖에 없었다.
실패의 맛은 썼지만 지나고 나니 그 결과는 달았다. 이스라엘은 2016년 오페크 11호까지 쏘아 올리며 인공위성 강국 반열에 올랐다. 시리아의 비밀 핵시설 ‘알키바르’ 등을 찾아내고 추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첩보 인공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라비 개발에 참여했던 기술자 상당수는 ‘애로우(Arrow)’ 미사일방어시스템 사업에 투입됐다. 적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요격 방어하는 애로우 사업은 전투기만큼이나 시급했다.
라비를 개발했던 고급 기술자가 투입되었기에 애로우 개발 기간은 크게 단축되었고 방어력은 한층 강화됐다.
다른 방산 프로젝트에 재취업하지 않은 라비 출신 기술자 일부는 스타트업을 차리기도 했다. 첨단 정보기술을 쥔 이들은 타국의 경쟁사들에 우위를 차지하며 창업 성공 스토리를 썼고 이스라엘이 ‘창업 국가’로 거듭나는 데 일조했다.
◇우방의 배신 이유 깨달음에서 싹튼 ‘자주 국방’
저는 당시 예루살렘 특파원 취재록을 바탕으로 ‘강한 이스라엘 군대의 비밀(메디치)’을 쓰던 중이었는데요. 그날 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라비 스토리를 책에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책은 2019년 국방부 장관 우수도서상으로 단독으로 선정됐습니다.
돌아보면 그날 코쉔 대사의 라비 이야기는 이스라엘도 실패 많이 했다는 겸양이면서도 실패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은근한 자기 나라 자랑인 건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하나 곱씹게 되는 건 이스라엘에 핵 기술까지 전수한 프랑스가 아랍 산유국의 오일 압박에(겨우 그 정도에!) 이스라엘 대한 전투기 공급을 덜컥 중단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배신과 같은 우방의 태도 변화를 이스라엘은 몇 차례 겪었는데요, 그것이 저는 이스라엘이 딴 건 몰라도 나라를 지키는 핵심 무기나 과학기술만큼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자는 ‘자주 국방’ 정신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첫 사례가 바로, 프랑스의 미라지 공급 중단 이전에 영국으로부터 겪은 ‘치프틴 탱크’ 계약 파기 사건입니다. 영국도 이스라엘에 탱크 등 주요 무기를 지원해줬는데 아랍산유국이 들고일어나니까 경제적 손실이 걱정돼 이스라엘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바로 스토리에 대해, 그리고 이를 계기로 탄생한 이스라엘 최초의 국산 탱크 ‘메르카바’ 개발 비사를 상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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