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같은 미일 동맹”....트럼프, 국빈 초청받은 일 왕궁서 최고의 찬사
아베, 레이와 시대 개막을 동맹강화에 활용
나루히토 즉위 직후 트럼프를 첫 국빈 초청
미국산 소고기 특제 햄버거 등 세밀한 준비
트럼프, 스모 경기장서 우승 트로피 직접 시상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나루히토 일왕이 2019년 5월 1월 즉위 후 한 달도 안돼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도쿄를 국빈 방문했습니다. 마침 그의 숙소는 조선일보 도쿄지국이 위치한 다케바시(竹橋)의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트럼프는 오테마치(大手町)에 위치한 팰리스 호텔에서 4일간 머물렀습니다.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일본인이 인근에 모여드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트럼프는 호텔에서 나올 때마다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을 위해 자동차에서 손을 내밀어 흔들었습니다. 열광적인 분위기가 며칠 간 계속됐습니다.
일본 사회의 ‘오모테나시( 일본 특유의 손님 환대)’를 만끽한 트럼프는 왕궁에서 양국관계를 ‘보물 같은 미일 동맹’으로 불렀습니다. 요코스카 기지를 방문해 일본이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로 한 헬기 탑재 호위함 ‘가가’에 승선, 미일 동맹의 굳건함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과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도쿄를 방문한 트럼프는 미일 관계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줬습니다. 공개적으로 일본을 ‘동북아 안보의 반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베의 손을 번쩍 들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도쿄에서 파악한 아베의 미일 동맹강화계획은 전방위적이었습니다. 아베는 2019년 아키히토가 30년만에 퇴위하고 나루히토가 즉위하는 것을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미 2018년 11월에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와 2019년 6월 오사카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가 두 번 방일하는 방안이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도쿄의 외교소식통은 당시 “트럼프를 새로운 시대의 첫 국빈으로 초청하고, 오사카 G20회의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구상”이라고 제게 귀띔해줬습니다.
◇ 스모 전통 무시하고 특별석에 트럼프 의자 설치
트럼프가 2019년 5월 26일 국빈으로 방일, 아베와 골프를 친 데 이어 이날 오후 5시쯤 레이와(令和) 시대 개막 후 처음 열린 스모 경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트럼프가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나쓰바쇼(夏場所· 5 월 대회) 최종일 경기가 열린 도쿄 료고쿠(兩國)의 국기관에 들어서자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관객들이 3분간 선 채로 스마트폰 사진을 찍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경기 진행을 위해 앉아달라”는 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두 정상 부부는 도효(土俵· 스모 경기판) 주변의 특별석 마스세키(升席)에 고급 의자를 놓고 관람했습니다. 원래 방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이 스모 전통이지만, 일본은 트럼프를 위해 전통까지 포기한 겁니다.
일본 사회에서 스모와 관련한 의식은 지극히 보수적입니다.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스세키 표를 모두 독점하고, 스모의 전 통을 무시해가며 대우하는 것에 대해 비판도 나왔습니다. 일부 스모 팬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아베 내각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도효에 올라 우승자인 아사노야마 히데키(朝乃山英樹) 이름을 부르자 다시 환호성이 나왔습니다. 트럼프는 그를 ‘스모 그랜드 챔피언’이라고 부르며 미국에서 특별히 제작해 온 ‘미일 우호를 위한 트럼프배(杯)’를 시상했습니다. 높이 137㎝,무게 30㎏의 대형 은색 트로피 맨 위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장식물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도효를 신성시하는 일본 스모 전통에 따라 구두 대신 검은색 슬리퍼로 갈아 신고 시상했습니다.
스모 관람에 이어서 두 정상이 향한 곳은 손님들 바로 앞에서 요리사가 직접 음식을 구워주는 로바다야키 방식의 유명 식당 이나카야(田舎家) 롯폰기 동점(東店)이었습니다. 이나카야는 우리말로 시골집을 의미합니다. 트럼프는 식당에서 기자들에게 “오늘 무역, 군사 문제에 대해서 아베 총리와 얘기했다”고 밝혀 북한 및 미일 군사동맹 문제가 주요 대화 소재였음을 시사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두 정상의 저녁 식사 장소 주변 차로를 전면 차단하고 식당 바로 앞에 길이 30m, 높이 3m의 대형 천막을 설치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오후 8시쯤 끝났습니다. 두 정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11시간을 함께 하며 세 끼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 트럼프 입맛에 맞춘 특제 햄버거
일본 정부의 트럼프를 감동시키기 위한 준비는 섬세했습니다. 트럼프 방일을 한 달 앞둔 4월 중순 도쿄의 유명 햄버거 전문점 ‘더 버거숍’ 기오이초(紀尾井町)점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외무성이 트럼프가 햄버거를 좋아하는 것에 착안, 골프장에서 특제 햄버거를 제공키로 한 겁니다.
일본 외무성은 시제품으로 더블 치즈 버거 20개를 주문했습니다. 조건은 3가지. ‘미국 쇠고기를 사용하고, 바싹 익히며, 패티와 빵은 크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트럼프의 식사 성향을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일 외무성은 햄버거에 들어가는 체다 치즈에 대해서도 “미국산이냐”고 확인했습니다. 음료수도 그가 좋아하는 콜라로 준비했습니다. 이 음식점의 패티는 통상 1장당 120g이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를 위해 160g의 특제 패티를 만든 후, 두 장을 넣어 총 320g이 되도록 했습니다. 햄버거 빵도 일반 햄버거보다 큰 12㎝의 특대 사이즈로 준비했습니다.
이 음식점의 요리사 4명은 26일 미일 정상이 회동한 골프장에 아침 일찍 도착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골프장 식당에 철판이 없어서 프라이팬에 패티를 익혀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두 정상의 골프에 동석했던 일본의 프로 골프 선수 아오키 이사오가 일본 방송에 밝힌 바에 따르면, 트럼프는 햄버거의 빵은 먹지 않은 채 평소 습관처럼 패티 위에 케첩을 잔뜩 뿌려서 먹었습니다.
트럼프는 15분 만에 빵은 빼고 햄버거를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고 합니다. 일본 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된 후, 더 버거 숍은 그가 먹었던 것과 똑같은 햄버거에 ‘더 스테이크 하우스 버거(The Steak House Burger)’라는 이름을 붙여 하루에 10개 한정으로 판매했습니다.
◇ 아베, 트럼프를 ‘도널드’라고 부르며 친밀감 과시
2019년 5월 27일, 트럼프와 아베는 아카사카의 영빈관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나타났습니다. 두 정상은 한층 강화된 관계를 기자회견에서도 과시하는 것이 TV중계로 목격됐습니다. 트럼프는 기자들 앞에서 여러 차례 아베와 눈을 맞췄습니다. 아베는 두 차례에 걸쳐 트럼프를 ‘도널드’로 부르며 친밀감을 과시했습니다.
트럼프는 미일 동맹을 동북아 번영의 ‘반석’이라고 규정하며 일본과의 안보 분야 협력을 계속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북한에 의한) 납치 문제는 내 머릿속에 있다. 꼭 해결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한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본과의 협력에 더욱 비중을 두겠다는 입장을 내비친 겁니다.
이날 저녁 나루히토가 주최한 만찬에서는 양국 관계를 한층 더 격상시켜 표현, 주목받았습니다. 트럼프는 “미일 관계는 보물 같은 동맹”이라고 했습니다. 아베도 북한 문제에서 한국을 건너뛰고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직접 접촉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납치 문제의 빠른 해결을 위해 다음은 나 자신이 김 위원장과 직접 만나겠다는 결의가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이 결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하겠다는 강한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베는 “미일의 입장은 완전히 일치한 상태”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두 정상 만남을 보도한 일본 신문을 살펴봤더니, 골프 회동 당시 남북한 문제도 대화 소재가 됐습니다. 이때 “한국과 북한 간에 전혀 대화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며 한국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또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받은 사실도 아베에게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2018년 6월,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김정은 위원장과 두 차례 회담할 때까지만 해도 문재인 정부의 중재 외교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차례 회담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후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약속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 트럼프의 귀를 잡은 아베
아베는 트럼프의 국빈 방문을 활용, 트럼프의 대북 정책에서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원래 일본은 북한에 접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정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남북 정상회담이 세 차례 열릴 때 북일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이 나온 후 일본 정부가 방향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6개월 이상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자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의 지원과 중국, 러시아의 양해하에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추진한다’는 새 방향이 설정됐습니다.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하고, 일본은 미일 동맹을 활용해 외교 무대를 확대하는 모습은 워싱턴 특파원에 이어 2018년부터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한일갈등이 심각하고 한미동맹이 이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미일 관계가 이렇게 비상하는 것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까. 미일 양국이 한국을 배제하고 중국,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정세를 논의하면 한국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앞으로 한·미 동맹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은 제가 2021년 4월 도쿄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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