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⑰] 北, 중동전쟁 직전 이집트에 '파일럿' 파견
주카이로 총영사관, 北 조종사 33명 파악
태권도 교관도 파견...이집트 특공대 지도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기 약 8개월 전. 북한과 이집트는 고위급 사절단을 잇달아 교환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양국 관계의 진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첩보 수집에 나섰다. 그 결과 북한이 공군 파일럿과 태권도 교관까지 이집트에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부는 북한과 이집트의 전격적인 군사적 밀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973년 2월 17일 강량욱 북한 부주석을 단장으로 한 북한 친선 사절단이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 방문을 앞두고 있었다. 사절단에는 장정환 민족보위성(국방성) 차관과 양만수 외무차관이 포함돼 있었다. 동향을 파악한 주카이로 총영사는 외무부(외교부)에 "북한 사절단이 애굽(이집트)을 STATE VISIT(공식 방문)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절단이 일정을 마친 뒤 북한과 이집트는 의미심장한 내용의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북한은 점령영토의 해방을 아랍 인민의 신성한 권리로 인정하며 피점령영토 해방을 위한 애굽 인민의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북한은 이스라엘 침략자의 모든 아랍 점령 영토로부터의 즉각적이고 무조건 철수를 요구한다고 적시돼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패배한 뒤 반격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이 이집트의 투쟁에 동참하겠다는 건 '군사적 지원'을 의미하는 셈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3차 중동전쟁을 기점으로 이집트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한은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식량과 약품 지원을 약속했고, 이후에는 대공포 100문과 실탄 5만발을 무상으로 건네줬다.
북한 사절단이 이집트를 방문한 지 2개월 만인 1973년 4월 2일. 이집트 육군 참모총장을 단장으로 한 군사 사절단은 중국을 거쳐 북한에 도착했다. 이집트 사절단은 무려 13일 동안 북한에 머무르며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사절단은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데 이어 각종 북한 부대를 시찰했고, 그 유명한 '푸에블로호'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은 이집트에 약 9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견한 상태였다. 태권도 교관들은 이집트 특공대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북한이 이집트에 소형 기관단총을 대량으로 지원할 것이란 첩보도 입수됐다. 이를 통해 정부는 북한과 이집트 간 관계 진전이 군사적 밀착을 위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북한 사절단은 1973년 7월 29일 이집트를 다시 찾아 모하메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접촉했다. 북한은 사다트 대통령과 모종의 회담을 나눈 것으로 파악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수십 명의 북한 공군 파일럿이 이집트 공군 전투기를 몰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이스라엘 군사령부와 미국 국무성(국무부)도 이를 인정하며 파문은 확산했다. 정부는 주카이로 총영사관에 "북한 조종사 인원수를 은밀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주카이로 총영사관은 타국 대사관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취합,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 공군 파일럿은 33명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주둔지는 수에즈 운하 전방에 있는 이집트 공군기지로 전투 발생 시 참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은 파일럿 파견을 중국에 알렸지만 소련(러시아)에는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기도 했다.
총영사관은 또 북한이 최근 1개월간 고위 군사 사절단을 이집트에 보내 '대공 미사일 방어'를 지원할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는 소련의 반발로 무산됐다고 했다. 아울러 확인되지 않은 정보이지만 150~350명 규모의 대공요원이 이집트에 파견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주카이로 총영사관은 이같은 보고를 마친 뒤 "북한과 이집트 간 군사협조는 아국 교섭에 결정적인 파괴 요소가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저의에 대해 "대(對) 소련 일변도 의존 외교를 지양하고 대(對) 이스라엘 투쟁에서의 제3세력 지원 국가를 광역화하기 위한 기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북한 공군 파일럿은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다. 이들은 이집트 공군으로 위장해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다만 정확한 인명 피해는 파악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집트가 공산주의 유입을 우려, 북한 문화관을 폐쇄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양국의 군사적 밀착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집트 비밀경찰은 1973년 1~2월 학생 시위를 조사한 결과, 핵심 관계자 대부분이 북한 문화관에 방문했던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김일성과 관련한 이른바 '불온서적'을 소지하고 있기도 했다. 이에 이집트 당국은 공산주의 사상이 범람하고 학생 시위가 격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북한 문화관을 무기한 폐쇄했다. 이후 양국 사절단이 오가는 과정에서 북한은 문화관 재개를 요청했지만 이집트 당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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