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exclusive] “월드컵 데뷔전서 2골!” 케인이 직접 밝힌 인생경기 ‘TOP 4’

정지훈 기자 2024. 11. 1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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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 그냥 묻히기에 아까운 기사만 모았다. 영국 최고의 풋볼매거진 의 독점 콘텐츠를 전달한다. '별'들의 단독 인터뷰부터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하시라. [편집자주]


해리 케인이 가 촬영을 위해 가지고 온 잉글랜드의 레트로 유니폼 컬렉션을 구경하고 있다. 나른한 오후 그의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한 건 빨간 세로 줄무늬 한 줄이었다. "어? 이거" 낡은 유니폼 한 벌을 집어 든 케인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떠올렸다. "잉글랜드가 독일을 5-1로 이겼을 때…."


9월의 어느 저녁 케인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눈을 떼지 못했다. 칭포드의 락스우드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는 화면 속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경기였다"라고 말한다. "언제였더라, 2001년? 내가 8살 때. 아마 다들 기억할 거다. 마이클 오언의 해트트릭, 스티븐 제라드 1골, 에밀 헤스키 1골. 정말 놀라웠다."


눈이 휘둥그레진 8살짜리 소년은 정작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월드컵 득점왕은 당연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천진난만한 이 꼬마는 훗날 유로 16강에서 독일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잉글랜드 대표팀 역대 득점 순위에서 마이클 오언과 웨인 루니까지 넘었다.


2001년의 케인에게 이 모든 걸 말해 줬다면 아마 기뻐서 방방 뛰었을 거다. 그는 "그땐 생각도 못 했다!"라며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허무맹랑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꿈을 넘어선 지 오래라고 답했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많은 골을 넣은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다. 뜻밖의 여정을 떠나 있는 기분이다."


글 Chris Flanagan 사진 Nick Eagle 에디터 유다현, 김재윤


79초 만의 데뷔골


등장부터 어마어마했다. 케인은 A매치 데뷔전에서 교체 투입된 지 79초 만에 첫 터치를 데뷔골로 연결했다. 남들은 몇 년씩 걸리는 일도 케인에게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위대한 공격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난 2015년 3월 유로 2016 예선 리투아니아전을 회상하는 케인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사실 그 이후로 엄청난 득점 페이스를 보인 탓에 데뷔골이 그렇게 오래됐을 줄은 몰랐다. 케인은 "그럴 만하다"라며 껄껄 웃는다. "한 시즌, 한 시즌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일단 경기 수 자체가 정말 많기도 하다. 1년에 49주는 경기와 훈련에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한다."


우리와 런던의 O2 아레나(다목적 실내 경기장 및 공연장)에서 대화를 나누던 케인은 역사적인 그날 저녁을 떠올렸다. 케인은 "잊을 수 없는 하루, 잊을 수 없는 경기"라고 말한다. "그날 부모님과 형, 아내 모두가 경기장에 왔었다. 온 가족이 출동해 내가 데뷔전을 치를지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경기를 뛸 수 있었다."


그냥 뛰기만 한 정도가 아니었다. 로이 호지슨 감독의 잉글랜드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리투아니아를 4-0으로 완파했다. 토트넘에서 모든 대회를 통틀어 29골을 터뜨렸던 케인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다. 간판스타 루니의 공격수 계보를 이어갈 적임자의 등장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케인은 "나는 교체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치라인에 서 있는 3, 4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하필 공도 나가지 않았다!"라며 웃었다. "루니와 교체될 때 많은 환영을 받았다. 팬들은 내게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내 머릿속에는 '내가 골을 넣을 수 있을까?', '내가 팀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가득했다."


대답은 2분 만에 돌아왔다. 케인은 라힘 스털링이 페널티 지역 왼쪽에서 올린 크로스를 절묘한 헤더로 마무리하며 골망을 갈랐다. 차기 잉글랜드 공격 파트너가 선보인 첫 호흡이었다.


케인은 "79초 만에 골을 넣는 건 내 꿈의 전부"라고 이야기했다. "웸블리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데뷔골을 넣는 순간 모든 꿈이 이뤄졌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내 머리를 스친 공이 골라인을 넘어 골대로 굴러 들어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TOP3 안에 드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가족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골을 넣었으니까...조국을 대표해 뛰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커리어에서 이뤄낸 정말 값진 성과다. 그 이후 대표팀에 꾸준히 승선할 수 있었다"


물론 79초당 한 골이라는 어마 무시한 득점률을 유지하진 못했다. 당연하다고? 맞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4,061골을 기록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케인은 토트넘에서의 돌풍을 대표팀에서도 이어가며 스스로를 증명했다.


눈부신 꾸준함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케인이 한 시즌 반짝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는 이내 자취를 감췄다.


토트넘 유스 출신인 케인은 레이튼 오리엔트, 밀월, 노리치 시티, 레스터 시티로 임대를 다니며 경험치를 쌓았다. 물론 당시에도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다. 하지만 임대 생활을 전전하던 유망주가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한 번에 믿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케인을 향해 "원 히트 원더(*)"를 연호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축알못도 이런 축알못이 따로 없다. (역자 주: 짧은 기간 반짝 활약을 펼친 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선수)


케인은 "알고 있었다"라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런 말을 발판으로 삼은 성공 비결을 귀띔했다. "모든 클럽 간에는 라이벌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좋아하는 걸 노래한다. 내가 콜까지 보낼 만큼 위협적이라는 일종의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나름의 동기부여가 됐다. 라이벌 팀의 팬들이 내게 콜을 외치고 있다면 나와 내 팀은 이미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다. 그래서 그냥 경기에만 집중했다. 당연히 오래도록 꾸준하고 싶었다."


현재 케인은 소속팀과 대표팀을 통틀어 400골 이상을 기록했다. 이제는 그 축알못들에게 한 방 먹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케인도 "물론이다. 확실하다"라며 큭큭 웃는다.


알다시피 케인은 10대 시절 스타로 주목받지 못했다. 다 큰 21세가 되도록 힘든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러나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케인은 "한 주, 한 주 경기를 뛰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임대를 다녀야 했고,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라고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모든 훈련과 경기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배우려고 했다. 그게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르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내가 어렸을 때 다른 선수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지금 내 자리를 노리는 어린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가능한 한 오래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뛰기 위해서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솔직히 조금 울컥했다"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매김한 케인은 얼마 안 있어 주장으로 낙점됐다.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 스코틀랜드전에서 23세의 케인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줬다.


케인은 "처음으로 선수단을 이끌 때 정말 자랑스러웠다. 후반 막판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것도 좋았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리 그리피스에게 프리킥 두 방을 얻어맞으며 1-2로 끌려갔다. 이대로 끝날 경우 잉글랜드는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에 패배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때 새 캡틴이 구세주로 나섰다. 케인은 후반 추가시간 논스톱 발리 슈팅을 골로 연결시키며 햄튼 파크를 침묵에 빠트렸다.


그전까지 케인은 A대표팀 17경기 5골에 그쳤다. 사실 기대에는 조금 못 미치는 기록이었다. 특히 첫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2016은 실망 그 자체였다. 케인은 대회 4경기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러나 주장 완장을 찬 케인은 180도 달랐다. 처음에는 조던 헨더슨과 번갈아 가며 주장직을 맡았지만 차이는 분명했다. 이후 10경기 14골을 기록했고 매서운 기세는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케인은 볼고그라드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전을 자신의 커리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순간으로 꼽았다. 당시 잉글랜드는 튀니지를 상대로 기분 좋은 2-1 승리를 챙겼다. 유로 2016까지만 해도 코너킥 전담 키커로 나섰던 케인의 역할 변화가 신의 한 수였다. 케인은 코너킥 상황에서 머리로 결승골을 뽑아내며 잉글랜드에 승리를 안겼다.


잠시 회상에 잠긴 케인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경기"라고 입을 열었다. "월드컵은 정말 특별하고 큰 무대다. 월드컵에서 골을 넣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인데, 후반 추가시간에 결승골까지 터뜨린다는 건…. 나도 펍에서 잉글랜드의 득점에 미쳐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이번엔 내가 그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사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돋는다."


불붙은 득점포는 식을 줄 몰랐다. 케인은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파나마를 6-1로 대파했다. 잉글랜드 선수가 월드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건 제프 허스트(1966년), 게리 리네커(1986년) 이후 세 번째였다. 눈부신 활약은 토너먼트에서도 이어졌다. 콜롬비아와의 16강전에서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대회 3경기 6골을 기록했다.


결국, 대회 득점왕에 오른 케인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게르트 뮐러, 에우제비오, 리네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케인은 "그동안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수들과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의 화려한 면면을 보면 내가 골든 부츠를 차지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특히 잉글랜드가 1990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준결승에 진출한 덕에 그 기쁨은 배가 됐다.


잉글랜드는 유로 2020에서 결승에 오르며 축구 종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다만 지난여름 이적 파동을 겪으며 부진에 시달렸던 케인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조별 예선에서 무득점이 길어지자 수많은 물음표가 쏟아졌다. '케인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케인이 토너먼트 3경기에서 4골을 몰아치자 들끓던 여론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케인의 화력에 힘입은 잉글랜드는 1966 월드컵 이후 55년 만에 메이저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득점왕 수상은 5골을 기록한 호날두와 패트릭 쉬크에게 1골 밀려 아쉽게 불발됐다.


케인은 16강 독일전도 자신의 대표팀 커리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순간이라고 꼽았다. 깔끔한 헤더로 승부에 쐐기를 박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일까? 케인은 "그 경기에는 많은 압박과 기대가 공존했다. 홈에서 경기를 하는 건 기대가 됐지만, 상대가 독일이라는 부담도 컸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우리가 메이저 대회 토너먼트에서 독일을 꺾고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건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라고 덧붙였다. 직관을 갔든 TV로 봤든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거다.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관중들은 경기 종료 후 팝송 '스위트 캐롤라인(Sweet Caroline)'을 떼창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살짝 울컥한다. 특히 떼창하는 팬들 앞에서 인터뷰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전까지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냈고 잉글랜드도 예외는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많은 사람이 하나 되어 무언가를 즐기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두 번째 골이 들어갔을 때, 아니 첫 번째 골이 들어갔을 때부터 팬들은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펍에 있던 팬들, 거리에 있던 팬들의 영상을 보게 됐다. 온 나라를 하나로 만든다는 건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메이저 대회가 가진 힘이다."


케인 박물관



지난 2022년 5월부터 12월까지, 런던 박물관에서는 케인의 업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전시회가 열렸다. 월드컵 4강 진출 기념 셔츠부터 대영 제국 훈장까지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우리가 O2 아레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 수백 명의 학생들이 청소년 합창제를 준비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케인은 다음 세대의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런던 박물관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자 했다. 내 트로피와 골든 부츠 등을 가져다 놓는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내가 그동안 이뤄 온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과 노력까지 한눈에 볼 수 있을 거다. 애초에 나는 정상에서 시작한 선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힘겹게 임대를 다니던 시절까지 박물관에 모두 전시해 놓았다."


"거기 내 대영 제국 훈장도 있다. 축구와 관련된 게 아니라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훈장을 받는 것? 솔직히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다. 골을 넣고 주장 완장을 차는 거라면 몰라도.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나와 아내, 가족들은 다 같이 궁전으로 가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나 역시 세 아이의 아빠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도움이 돼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서 축구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우여곡절을 딛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오늘날 정말 많은 선수가 케인을 롤모델로 꼽는다. 잉글랜드의 주장이자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케인의 태도는 제법 진중했다. 그동안은 경기장 안에서 귀감이 됐다면, 이제는 경기장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케인은 논란이 불거진 BLM 운동과 인종 차별 행위에 앞장서 대응하며 평등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코로나19 사태로 하부 리그가 재정 위기에 빠지자 자신이 몸담았던 레이튼 오리엔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케인은 직접 레이튼의 유니폼 스폰서십을 사들이며 자선 활동에 나섰다. 홈 유니폼에 코로나19 최전선에 있는 의료진을 위한 감사 문구를 적는가 하면 어웨이 유니폼에는 어린이 호스피스 병동, 서드 유니폼에는 정신질환 치료를 돕는 자선 단체의 로고를 담았다. 그다음 시즌에는 참전 용사를 위한 자선 단체 '타미 클럽'의 로고도 새겼다.


"보통 어릴 때는 축구를 잘해서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운을 뗀 케인은 "하지만 성공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라고 설명했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화제가 되고 내 발언에는 점점 무게가 실린다. 내가 선한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 물론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돕고 싶다."


"나도 어린 시절 많은 축구선수들을 보고 자랐다. 경기장 안의 모습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의 모습까지 말이다. 그래야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 내 인생을 바꾼 경기들: 해리 케인


“월드컵 데뷔전에서 2골 – 이건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로치데일 1-1 레이턴 오리엔트


2011년 1월 15일


EFL 리그 원


“리그 원의 레이턴 오리엔트 소속으로 로치데일과의 원정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르게 됐다. 당시는 토트넘에서 임대를 왔을 때였는데, 그날따라 춥고 습하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어릴 적부터 프로 축구선수를 꿈꿔왔기 때문에, 프로 경기에서 뛴다니 드디어 꿈을 이룬 것 같았다. 물론 더 높은 수준의 팀을 바라긴 했었으나, 오리엔트는 충분히 역사 깊은 구단이었기에 그저 좋았다. 경기는 벤치에서 시작했는데 출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감독님의 교체 사인을 기다리며 감독님만 계속 쳐다봤다. 결국 감독님이 신호를 주셨고, 내게는 마지막 20여분 정도가 할애됐다. 이것이 내 프로 커리어의 시작점이었다.”


토트넘 5-1 선덜랜드


2014년 4월 7일


프리미어리그


“인생 경기를 꼽는데 토트넘에서의 첫 선발 출전을 빼놓지는 못하겠다.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선덜랜드전에서 팀은 5-1로 승리했고 나도 골을 넣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첫 선발 출전은 또 다른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그 경기 전에 몇 번 교체 출전했었지만, 첫 선발 출전이야말로 내가 1부 리그에서 통한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날 골을 넣고 승리하면서 득점 행진이 시작됐고, 상황은 갈수록 좋아졌다. 이후로도 항상 그 경기를 되돌아보며 그때 활약하지 못했다면, 혹시 무득점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 하곤 한다. 그날의 기회를 살리는 것이 참 중요했다. 그 결실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잉글랜드 4-0 리투아니아


2015년 3월 27일


국가대표 친선경기


“잉글랜드 대표팀은 곧 세계무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나도 꼭 대표팀에서 뛰어보고 싶었다. 로이 호지슨 감독으로부터 마지막 20분간 출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순간 내가 지나온 모든 축구 인생이 스쳐 지나갔다. 긴장감도, 자신감도 넘쳤고 기회를 잡을 준비가 돼 있다고 느꼈다. 그러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서 골을 넣었는데,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모든 것이 이뤄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들어간 지 2분 만에 골을 넣으며 A매치 데뷔전을 치르다니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는 몇 번을 뛰었는데도 지금까지 두근거린다. 그 자부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튀니지 1-2 잉글랜드


2018년 6월 18일


월드컵


“마지막으로는 2018년 월드컵 튀니지와의 경기를 꼽겠다. 월드컵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회이자 축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압박감을 준다. 그런 무대에서 첫 경기부터 두 골, 특히 두 번째 골은 결승골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때는 정말 대단한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우리 팀은 준결승에 진출하는 등 더 높은 곳까지 오르며 좋은 성과를 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넣는 골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며, 특히 위대한 대회, 중요한 경기에서의 골은 더욱 잊을 수 없다.”


정지훈 기자 rain7@fourfourtw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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