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자기수양
수양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적 전통 속에서 수행을 지속해왔다. 수행의 역사로 본다면 유교 역시 만만치않다. 성리학은 유교에 불교의 색을 입힌 것이다. 양명학의 경우는 퇴계 이황이 비판했던 것처럼 불교와 거의 흡사하다. 마음을 온전히 하나로 집중·유지시키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은 유교 선비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서양을 생각하면 그들만의 수양, 수행의 전통이나 방법들이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카톨릭 내부에서 사제들이 행했던 나름의 전통이 있었지만 보편적이진 않았다. 서양의 영적 전통에 대해 궁금해졌다.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미셸 푸코의 책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수양>(심세광·오트르망·전혜리 옮김, 동녘 펴냄)을 펼쳤다. 서구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 왔을까?
푸코가 발굴해내기 이전에 '자기수양'은 서구에서 지층 밑이서 잠자고 있었다. 자기수양은 원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자기배려, 자기돌봄을 뜻하는 그리스어 epimeleia, 로마어 cura soi는 당대 사람들에게 중요한 윤리적 원리이자 삶의 기술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 이래 거의 천년동안 지속된 원리였다. 푸코는 이와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말을 소개한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자기배려(돌봄)의 스승으로서 판사들 앞에서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행인들을 붙잡고 그들에게 '당신들은 자신의 재산, 평판, 명예는 배려하면서도(돌보면서도) 자신의 덕이나 영혼은 배려하지(돌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동료 시민들에게,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돌보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권고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임무를 신이 주신 임무로 여기며 또 죽는 날까지 이 과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상기책 인용 미기재시 동일)
소크라테스라고 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계명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푸코는 이 계명조차 단독적이지 않음을 지적한다. 푸코의 말이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계율은 사실 고대 문화에서 항상 자기 배려(돌봄)의 계율과 연관되어 있었고 또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을 배려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기수양을 위해 먼저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자기배려, 자기수양을 통해 자신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목표를 위해서 먼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원래 의도라고 푸코는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배려(돌봄)은 이후에도 많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스토아주의자인 무소니우스 루푸스의 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항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안녕을 확보할 수 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의 말이다. "시간을 낭비 말고 네 영혼을, 네 자신을 돌봐야 하고, 네 자신 안으로 후퇴하여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푸루사의 디온은 자신 내부로의 은거를 말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데는 수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한다." 또한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돌봐야)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다." 에픽테토스는 자기 자신을 배려함으로써 인간이 신과 유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배려는 중세에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자기배려를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와 진정한 자기를 알라는 '자기인식'의 흐름이 상당부분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푸코는 사실 금욕주의조차도 자기배려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자신을 배려하는(돌보는) 방법 혹은 적어도 고대의 철학적 자기배려의 새로운 형태였다." 진정한 자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의미하는 '자기인식' 역시 자기배려의 우회로이자 수단이었다.
기원후 1~2세기 그리스 로마 문화 속에서 자기수양의 질적 내용은 더욱 심화되었다. "자기자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기라는 지극히 중요한 관념, 요컨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인 것으로서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생활 속에서의 활동이라는 관념이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답게 푸코의 말이 어렵다. 필자 나름대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이것은 자기 내면으로의 급진적 전향을 의미한다. 이 전향의 목표는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제왕 즉 자기 인생의 주인이자 주재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통제를 기반으로 풍요한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려면 외부의 그릇된 생각들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 여기에서 근대의 비판 정신이 비롯하게 된다. 내면의 갈등은 일회성 투쟁이 아니기에 평생에 걸친 항상적 투쟁이란 관념이 도출된다. 이 영원한 투쟁은 이후 그리스도교의 영적 투쟁을 선취한 것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 전통 속에서 깐깐한 선비를 연상하면 된다. 내면으로 은거해 엄격한 규율로 자신을 단련하고 조정의 부조리를 향해 목숨 건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조선선비의 모습이다.
자기배려, 자기수양에는 어떤 방법이 동원됐을까? 우선 자기수양은 소수 철학자들의 생각이 전혀 아니었음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자기수양은 당대 식자층 대중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실천되고 있었다. 우선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를 통한 자기와 관계맺기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졌다. 특히 로마에서는 수첩 사용과 메모하기가 일상의 중요한 실천이었다. 일상사만이 아니라 중요한 일들이 기록되고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독서의 내용, 격언을 적고 마음에 새기는 방법도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성서나 불경을 필사하는 사경(寫經)을 종교인들이 실천하는 것과 유사하다. 고대로부터 차용한 성적 절제도 있었다. 에픽테토스는 걸으면서 자신을 점검하라고 주문한다. 틱낫한 스님이 늘 하던 행선(行禪)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왜 이토록 인생을 충실히 살아내려 했을까? 왜 이들은 쉽지 않은, 평생에 걸쳐 수행한다는 무시무시한 짐을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일까? 생각없이 살면 편하다. 이들은 편한 삶보다 의미있는 삶을 원했다. 이들에게 동기부여가 된 것은 영혼구제나. 영생 같은 게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보았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에서 행해지는 '자기예찬'과 많이 다르다. 현대 서구에서의 '자기'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본래적 자기를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삶을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란 한번 찾아내면 끝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삶이란 과정이며 그 과정의 끝에 예술작품으로 남는 것이다. 세상과 유리된 별개의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자기와 맺는 여러 관계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수양으로서의 자기실천은 그리스도교로 통합된다. 이후 자기수양 전통은 별도의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다. 데카르트에 이르러서는 결정적 국면이 도래한다. 자기 삶을 직조해내는 자기 실천적 주체가 데카르트에 의해 '인식' 행위만을 실천하는 주체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 와서 도덕주체와 인식주체가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비상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인식주체의 폭주는 결국 20세기 들어서 계몽의 자멸로 이어진다.
푸코는 왜 이렇게 자기수양의 문제에 진심일까? 아마도 '자기수양'이야말로 한 인간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수양을 통해 한 사람은 전인적 인격체에 다가갈 수 있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푸코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푸코 후기 사유에서 주체의 문제는 윤리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동시에 가지며,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정치적 차원에서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차원에서의 혁명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 원숙기에 접어든 푸코의 결론이었다." 윤리적 실천이 사라진 채 전국민이 공무원이 되어버린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민들은 사회주의가 어떤 고난 속에서 피어난 결과물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인민들을 결속시키는 정신적, 영적 에토스가 없이는 사회주의란 지속되기 어려운 인공구조물이다. 이점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발터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고찰했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꼭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정용택의 논문 '현대 자본주의의 종교성'에서 인용)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종교성'에 있다. 사람들은 삶의 고통에 대한 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궁극적 해결자로서 자본주의를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종교성 덕분에 자본주의의 붕괴가 현실화하기 힘들 듯이 대조적으로 근대 계몽주의의 적장자인 사회주의는 종교성의 탈각을 당연시했기에 체제를 유지하기가 훨씬 어렵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보인 개인숭배를 사회주의의 일탈로 보기보다 종교성이 소거된 사회의 구심력 확보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듯하다. 일견 유치해 보이는 북한의 사상체계도 사회주의이론이 제거해버린 사회의 종교성을 보완하려는 노력일지 모른다.
필자는 푸코의 책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논점을 선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종교성을 거세당한 채 살아본 경험이 역사적으로 전무하다. 만약 자본주의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란 주술에 걸려 자체 붕괴하는 사변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이후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해야할까? 세계체제론자 월러스틴은 그때를 21세기 중반으로 예상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의 사유는 너무나 소소하다. 수축사회는 스스로를 항상적으로 점검하는 사람들의 종교성에 기대어 유지될 수 밖에 없다. 푸코의 책은 도래할 사회에서 자신의 종교성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좌표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의 일독을 권한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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