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쩍 마르고 어깨와 등이 굽어”…조선 최고의 재상이라는 이 남자, 장애인이었다는데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1. 1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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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장애인 흉내를 내는 광대들(1884년). [미국 보스턴미술관(퍼시벌 로웰 컬렉션)]
“우리 조정에서 어진 재상을 들어 말하면, 황희와 허조를 으뜸으로 일컫는다. 모두 세종을 섬기면서 정사를 도와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허균의 형 허봉(1551~1588)이 쓴 <해동야언>의 기록이다. 양천 허씨 좌의정 허조(1369~1439)는 조선초 유교윤리의 근간인 예약(禮樂)제도를 정비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했던 인물이다. 벼슬은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세종실록> 1439년(세종 21) 12월 28일의 허조 졸기에 따르면,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태종이 “허조는 나의 주석(柱石·기둥)”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등이 굽은 꼽추였다.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는 “허조는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고 했다.

대쾌도(일부). 화면 중앙에 척추장애자가 있다. 세종대 명재상 허조는 심각한 척추장애를 앓았지만 태종이 “나라의 기둥”이라고 극찬할 만큼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국무위원이나 국회의원 중 휠체어를 타거나 앞을 못보는 장애인은 드물게 있지만 과연 허조처럼 척추 장애나 왜소증 장애를 가진 고위 공직자를 본 적이 있던가. 우리는 조선시대 장애인에 대한 처우나 의식 수준이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속단하지만 뜻밖에도 그 시절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았고 장애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겉모습보다는 실력과 인품을 중요시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따른 것이다. 실제 양반층의 경우 어떤 유형의 장애인일 지언정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과거를 봐서 종9품에서 정1품 정승의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허조, 척추장애에도 차별없이 세종 도와 조선초 국가 유교윤리 확립
삼희수 초상. 심희수는 다리를 못써 내시들의 도움을 받아 입궐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심희수(1548~1622)는 선조와 광해군대 대제학과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그와 기생 일타홍(一朶紅·한떨기 꽃)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있다. 일타홍은 방황하던 심희수를 학문에 매진하도록 해 과거에 급제시켰지만 일찍 죽었고 후일 심희수 부부 옆에 묻혔다. 지금도 고양 덕양구 원흥동 406-1의 심희수와 부인 광주 노씨 쌍분 좌측에 ‘일타홍 금산 이씨 지단(一朶紅錦山李氏之壇)’ 제단이 놓여있다. 심희수도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613년(광해 5) 5월 18일 기사는 “심희수가 입시하였으나 앉은뱅이 병 증세가 있어 왕이 중관(中官·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오르내리도록 하였다”고 했다. 심희수는 장애를 핑계로 5차례나 사직을 청했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광해군일기> 1609년(광해 1) 2월 18일 기사에서 광해군은 “국가에서 정승을 두는 것은 오직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데 있을 뿐, 다리 힘의 강약은 본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숙종대 소론의 영수 파평 윤씨 윤지완(1635~1718)은 한쪽 다리가 없어 ‘일각정승(一脚政丞)’으로 불렸다. 동상이 악화돼 다리를 절단했다. 걸을 수 없어 마찬가지로 사직을 원했지만 그를 신임했던 숙종은 부축을 받아서라도 속히 입궐하라고 했다. <숙종실록> 1694년(숙종 20) 윤 5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우의정 윤지완이 상소를 올려 “다리의 병이 심하여 대궐의 섬돌에 오르내리며 출입하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면직시켜 주소서”라고 아뢰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 “이미 출입할 때 부축 받으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어찌 사양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가. 경은 내일 아침에 나오라”고 재촉했다.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조부이자 영의정 홍봉한(1713~1778)의 부친인 풍산 홍씨 홍현보(1680~1740)는 말 못하는 농아였다. 홍현보는 1718년(숙종 44) 문과에 장원급제해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예조판서, 우참찬 등 여러 관직을 맡았다. 희안하게도 풍산 홍씨 집안은 자신들의 외손인 정조와 맞섰고 죽이려고 했다. 홍현보의 아들 홍봉한과 홍인한(1774~1775)은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극렬하게 반대했고 그 중 홍인한은 정조 즉위 후 처형됐다. 정조때 편찬된 <영조실록>은 홍현보를 박하게 평가한다. <영조실록> 1740년(영조 16) 윤 6월 10일 기사는 “홍현보는 젊어서 등제하였으나 병을 앓다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했고 재능도 없었다”고 했다.

심희수·윤지완·홍현보도 심각한 장애 있었지만 최고위직 역임
숙종대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전주 이씨 이민서(1633~1688)는 정신착란을 일으켰지만 벼슬에서 쫓겨나기는 커녕 중용됐다. <현종개수실록> 1670년(현종 11) 10월 23일 기사는 “이민서를 고양군수로 삼았다. 옥당(玉堂·홍문관)에 근무할 때 여러 날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미치광이 병이 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괴하다는 말을 들어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외직을 맡았다”고 했다. 지조가 곧고 문장 또한 탁월했던 그는 곧 다시 서울로 불려왔다. <숙종실록> 1688년(숙종 14) 2월 2일의 이민서 졸기는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고 했다.

임금들도 장애에 시달렸다. 숙종(재위 1674~1720)은 시각장애로 고통받았다. <숙종실록> 1717년(숙종 43) 7월 19일 기사에서 숙종은 “지금 왼쪽 안질(眼疾)이 더욱 심하여 전혀 물체를 볼 수가 없고 오른쪽 눈은 물체를 보아도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 소장(疏章·상소)의 잔글씨는 마치 백지를 보는 것과 같고, 비망기(備忘記·임금이 명령을 적어 승지에 전하는 문서)의 큰 글자도 가까이에서 봐야 겨우 판별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분명히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선조(재위 1567~1608)는 정신병으로 고통받았다. <선조실록> 1598년(선조 31) 2월 25일 기사에서 선조는 비망기를 통해 “심질(心疾·정신병)이 더욱 심해져 전광증(顚狂症·조현병)으로 크게 부르짖으며 사람과 사물을 살피지 못하니 놀라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장애인은 자신만의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했고 결혼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하지만 저신장 장애인이나 팔, 다리가 없는 지체장애인처럼 겉으로 확연히 표가 나거나, 신분이 낮고 재력이 없는 장애인은 결혼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여성은 성과 장애라는 이중의 고난에 직면해 장애 유형이나 신분, 재력에 상관없이 결혼하기가 힘들었다. 정화옹주(1604~1667)는 선조(재위 1567~1608)가 죽기 4년 전인 53세 때 가진 귀한 막내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벙어리였다. <인조실록> 1629년(인조 7) 10월 2일 기사에서 인조(재위 1623~1649)는 “정화옹주가 연달아 병고가 있어서 길례(吉禮)를 행하지 못하였다. 그 병이 쾌히 낫지는 않았으나 왕녀로서 배필이 없을 수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부마를 간택하게 하라”고 명한다. 실록은 이어 “옹주는 선조의 따님으로 어릴 때부터 벙어리가 되어 지각이 없었으며 뒤에 권대항에게 시집갔다”고 했다. 정화옹주는 26살까지도 시집을 가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옹주의 조카 인조가 6살 연하의 권대항(1610~1666)을 부마로 삼아 혼인시켜 줬던 것이다. 일반 여성이 10대 초중반에 결혼하는 당시 사회상을 감안할 때 상당한 만혼이다. 권대항은 오만하고 포악해 수시로 행패를 부렸고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권대항과 정화옹주는 자식도 없었다.

왕실도 장애에서 자유롭지 못해 숙종은 시각장애, 선조는 정신병으로 고통
전통적으로 장애인은 지체정도에 따라 독질자(篤疾者), 폐질자(廢疾者), 잔질자(殘疾者)라 불렀다. 법전인 <경국대전> ‘병전(兵典)’은 “독질이라 함은 악성 질병, 전간병(癲癎病·간질), 양눈 맹인, 사지 중 이지(二肢) 절단 등이며 폐질은 백치(白痴), 벙어리, 난장이, 요절자(腰折者·허리 장애자) 및 일지(一肢)를 쓰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고 했다. 잔질은 손가락이 몇 개 없는 가벼운 장애다. 조선시대는 자급자족의 가족사회로 장애인 복지도 가족부양이 원칙이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의 장애인 정책도 함께 존재했다. 우선, 장애인은 군역 등 국가 의무에서 면제됐다. <경국대전> ‘병전(兵典)’은 “독질 및 폐질에 걸린 자는 모두 신역(身役)을 면제한다”고 규정했다. 가족 중 시정(侍丁·가족 부양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도 지정해 장애인을 돕도록 했다. <세종실록> (세종 6) 10월 15일 기사는 “백성들 중에 70세 이상 되는 자와 독질자, 폐질자, 잔질자에게는 장정 한 명을 주어 봉양하게 하고, 장정이 없어 자립할 수 없는 자는 관에서 생활비를 지급하고…”라고 했다.

장애인은 중죄를 범하더러도 정상을 참작해 감형했다. 조선후기 법전인 <수교집록(受敎輯錄)>과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는 “살인한 죄인이 귀머거리이거나 벙어리이면 조사할 수 없으므로 자복을 받을 수 없다. 하여 곧바로 처단하는 것은 법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사형에서 등급을 낮추어 유배를 보낸다. 미쳐 본성을 잃고 실성한 자는 사형에서 등급을 낮춘다”고 했다. 역모죄에 연루되더라도 처벌을 면했다. <단종실록> 1454년(단종 2) 9월 9일 기사에 따르면, 병조참의 조순생(?~1454)이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의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의금부에서 그의 형 조관생도 처벌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질에 걸린지 17년이 됐다며 방면했다. 실록에는 장애인 구휼시책도 자주 등장한다. <중종실록> 1528년(중종 23) 8월 18일 기사에서 중종(재위 1506~1544)은 “예조가 80세 이상의 맹인들을 예조 안에서 음식을 대접한다고 했더냐. 맹인들을 자제들이 부축하게 하여 대궐로 오게 하고 여타의 노인들도 모두 부축하여 오게 하여 대궐 뜰에서 대접하라”고 했다.

영희전(현 서울 중구 저동 영락교회) 앞의 홍살문(1884년 촬영). 용재 성현은 어진전인 영희전 부근에 시각장애인 단체인 맹청이 있었다고 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퍼시벌 로웰 컬렉션)]
국가주관으로 장애인 단체도 조직됐다. 명통방(한양 북부의 11방 중 하나)에 설립된 명동시(明通寺)는 시각장애인 단체다. 태종때 처음으로 실록(1402년 7월 2일)에 등장하며 점복과 독경 등으로 길흉화복을 예언하고 기우제 등 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국가에서는 명통시에 쌀과 노비를 하사하거나 건물을 고쳐주기도 했다. <단종실록> 1453년(단종 1) 12월 2일 기사에 따르면, 계유정난 때 살해된 대신들의 가옥을 왕족과 각 관청 등에 배분하면서 안평대군의 책사 이현로(?~1453)의 집은 명통시에 내려줬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지금 도성 안의 남쪽 영희전(어진전·현 영락교회)의 뒷골목 하마비(下馬碑) 건너편에, 이른바 맹청(盲廳)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의 명통시가 아닌가 싶다 … 어가가 궁궐 밖으로 나갈 때나 돌아올 때 여러 맹인들이 으레 도포를 입고 떼를 지어 성 밖으로 나가 어가를 전송하고 맞으며 조사(朝士·문반), 사마(司馬·무반)와 반열을 같이 하니 해괴한 일”이라고 했다.
실력·인품 중시 풍조로 장애차별 금기시···각종 의무 면제, 구휼 등 지원정책 다양
시각장애인들은 관현맹인(管絃盲人) 관직도 받아 궁중행사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성종실록> 1470년(성종 1) 12월 27일 기사에서 성종(재위 1469~1494)은 “금후로 내연(內宴) 때에는 악공 대신 맹인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내연은 여성들만 참여하는 잔치로 남성 연주자가 들어가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자 시각장애인 악사로 대체했던 것이다. 이마지(李亇知)는 맹인 악사로서 드물게 장악원 최고 관직인 정5품 전악(典樂)에 두 번이나 임명됐다. <용재총화>는 “이마지가 죽은 뒤에도 그 음만은 세상에 널리 퍼져 지금은 사대부 집의 계집종까지도 거문고에 능한 사람이 있다. 모두가 이마지가 남긴 법을 배웠으니 장님의 어두움은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21세기 한국은 GDP 대비 장애인 복지지출이 OECD 평균에 현저히 못 미치고 장애인 차별도 여전한 장애인 복지 후진국이다. 사회경제적 발전 정도를 감안할때 과연 지금의 장애인 지원과 배려 수준이 조선시대보다 월등하게 앞섰다고 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필원잡기(서거정). 어우야담(유몽인). 용재총화(성현)

2.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정창권. 글항아리. 2011

3. 서울사람들의 생로병사. 서울역사편찬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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