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설경구 "시나리오에 모든 정답 있어… 감독 의견 따르는 것이 배우의 몫"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설경구의 연기는 불 같고 뜨거운 이미지가 강렬하지만 허진호 감독과 함께 손잡고 만든 '보통의 가족'에서 그가 선보인 재완은 꽤 이성적이고 서늘한 편이다.
국내 최고의 흥행 감독인 강우석, 윤제균 감독부터 ('실미도', '강철중:공공의 적', '해운대') 예술 영화의 거장인 이창동 감독('박하사탕','오아시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매번 새로운 도전을 펼치는 이준익 감독('소원', '자산어보'), 그에게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안기며 20~30대 젊은 팬덤을 만들어 준 '불한당'을 함께 한 변성현 감독('불한당', '킹메이커', '길복순'), 한국의 켄 로치 정지영 감독('소년들'), 당시로서는 신인에 가까웠던 조의석·김병서 감독('감시자들'), 이종언 감독('생일')과도 함께 했었다.
설경구의 작품 선택이 매번 형사물에 치우칠 것 같다거나, 1000만 영화를 쫓을 것 같다거나, 약자나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는 주제의 영화들에만 관심을 보일 것 같다는 생각들은 모두 오해다. 그의 출연작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장르적 측면에서나 캐릭터적 측면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 오히려 힘들다. 연출한 감독들의 성향도 출연작들의 장르도 캐릭터들의 성향도 모두 제각각이다.
'올디스 벗 구디스'라는 표현이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뜻일텐데 콘텐츠 업계에서는 통하기 어려운 명제일 수 있다. 이 곳만큼 새롭고 신선하고 어릴수록 주목받는 곳도 없으니. 그런데 지천명 아이돌에서 이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가 가장 핫한 플랫폼인 넷플릭스를 포함해 여전히 1년에 2~4편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나이와 경력을 다 떠나서 그는 여전히 팔팔한 현역이라는 사실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쳤던 그 에너지로 매 작품에 임해오고 있으니 다양한 감독들이 여전히 그를 캐스팅하려고 손을 내민다.
매번 인터뷰 현장에서 작품 출연의 계기를 물으면 설경구는 연출을 맡았던 해당 감독들에게 출연 제안을 받고 그에 대해 꽤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시일이 10년이 걸리거나 20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정지영 감독이나 허진호 감독에게 '같이 한번 해봅시다'라는 제안을 받고 직접 함께 영화를 찍는데까지는 무려 20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흥행 감독이냐, 베테랑 감독이냐, 신인감독이냐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창작자의 연출 의도를 실현시켜 주는 것이 배우라는 업을 가진 자의 유일한 덕목임을 30년 넘게 굳게 믿어온 사람이다. 단 함께 할 연출자와 제작진, 대본을 고르는 그의 혜안은 대한민국 그 어떤 배우의 것과 비교해도 밝고 명민하다.
허진호 감독과는 영화 '박하사탕' 당시 일본에 홍보차 방문했다가 우연히 인연을 맺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함께 할 마음을 가지게 됐다. 결국 두 사람은 20여년이 훌쩍 넘어서야 영화 '보통의 가족'으로 뭉치게 됐다. 허진호라는 섬세하고 꼼꼼한 연출자를 만난 설경구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철저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적 인물이면서도 인류애가 한방울 가미된듯한 변호사 재완을 창조해냈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물질적 욕망을 우선시하며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 재완(설경구)과 원리원칙을 중요시 여기는 자상한 소아과의사 재규(장동건) 형제와 성공한 프리랜서 번역가로 시부모의 간병에 봉사활동까지 해내는 연경(김희애)과 어린 아기를 키우면서도 몸매와 외모 관리 등 자기 관리에 철저한 지수(수현)까지 네 명의 가족이 아이들과 관련된 사건을 겪고 붕괴되어가는 스토리를 그렸다. 네덜란드 인기 작가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가 원작이다.
- 허진호 감독과는 오래된 인연이라고 들었다.
▶ 1999년에 처음 허진호 감독님을 만났다. 저는 '박하사탕'으로 일본에 초청을 받아서 갔는데 허진호 감독님은 '8월의 크리스마스'로 초청받아서 오셨더라. 함께 나가서 술을 세게 마셨다. 갑자기 짐을 싸들고 제 방으로 오셔서 안 가시더라. 3일을 제 방에서 주무셨다. 그렇게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때 '뭔가 한 작품 함께 해야지' 했는데 함께 할 인연이 닿지는 않았다. 함께 작품을 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다. 어느 날 허 감독님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함께 해야지' 하셨다. 그때 '보통의 가족'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읽어보고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옛날에는 정말 말씀이 많으셨고 대화를 정말 많이 했다. 한번은 제가 영화 '봄날은 간다' 촬영장에 놀러 갔었다. 그런데 허 감독님이 이영애 배우와 버스 안에서 대화를 나누시느라 나오지를 않았다. 끝도 없이 대화를 했다. '하하호호'하며 웃으며 대화를 하고 또 한참 대화를 한다. 도대체 영화는 안 찍고 계속 대화만 하더라. 그래서 촬영하는 건 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웃음) 이번 작품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결은 다르지만 허진호 감독님의 색은 드러난다. 짜임새가 있고 섬세하다. 디테일이 촘촘한 것도 비슷하다. 이야기가 다를 뿐 촘촘히 쌓여간다. 뭔가 극적으로 한방 쌓이는 것이 아니고 미세하게 쌓여 가는 것들이 이전 작품들과 결이 같다.
- 재완 캐릭터 분석을 어떻게 했나. 어떤 행동에서는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측면도 엿보인다.
▶ 피해자의 부모님을 찾아간 장면은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졸렬한 인간의 측면이 더 강했다고 본다. 피해자 장례식장에 가서도 확인하지 않나. 가해자측으로서 재확인한 느낌이랄까. 일부러 비오는 날을 택해 수술 장갑을 끼고 피해자 어머지 집에 가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서 창문으로 돈봉투를 던진다. 지문이 남을까 염려하는 모습도 느껴지고 너무 치졸하고 죄를 탕감시키려는 모습이 치졸해 보였다.
- 극이 진행됨에 따라 재완의 판단의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도 있더라.
▶ 재완이 초반에는 딸을 감싸다가 장례식장에서 노숙자가 죽었다고 전화하자 딸이 '잘 된 것 아니냐, 전에 사준다고 했던 차를 사달라'고 하자 그때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기 방에서 있었던 딸과 조카의 대화가 어떤 도화선이 된 것 같다. 고민의 연속이었으나 어떤 결정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CCTV내용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내 지수는 이미 아이들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이 식당으로 가기 전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설정을 했었다. 사실 딸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민도 있었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망치지 않는 방향으로도 생각한 것 같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캐릭터였기에 딸을 벌 받게 하는 것이 자신의 커리어에도 더 낫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재완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리를 추구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 딸 혜윤 역의 홍예지의 연기력이 상당하던데.
▶ 지난해 토론토 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두 아이 역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잘해 무섭더라. CCTV 장면에서 두 아이들이 대화하는 장면은 얼마나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가 오가나. 마치 악어새의 눈물 같은 내용 아닌가.
-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정기적인 식사를 하는 형제, 치매 시모를 돌보는 NGO 전문가 며느리, 20세 이상 나이차나는 미모의 아내와 재혼한 잘 나가는 변호사, 그런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을 것 같지만 거리의 노숙자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자식들까지 '보통의 가족' 속 가족들은 외부적으로는 이상적 형태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안으로는 균열과 모순 투성이의 모습이다.
▶ 재규가 밥을 먹던 중 전화를 받고 노숙자가 죽었다는 내용을 재완과 아내, 재완의 처에게 전달 했을 때 뭔가 식시 분위기가 활발해지지 않나. 재완의 처가 집에 돌아 갔을 때 어머니의 옷을 갈아 입히는 장면도 얼마나 섬뜩한가. 유일한 사건 당사자가 제거되니 가족의 분위기가 활발해진다. 그런 모습이 이 영화의 신랄한 면모 아닐까. 변호사 형에 의사 동생이고 사회적으로는 잘 나가는 명사들이지만 내적으로는 균열도 있고 불안한 관계다. 나이는 많지만 손아래인 연경이 지수를 대하는 첫모습에서부터 많은 불안감이 드러난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사의 균열과 관계의 모순들을 함축시켜 담으신 것 같다.
- 재완 아내 역에 수현 캐스팅이 참 절묘했다고 보여진다.
▶ 재완의 아내 지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허 감독님도 여러 후보를 놓고 고민을 하셨다. 당신 와이프에 누가 맞을 것 같냐고 물으셨다. 결국 나와 가장 안맞을 것 같은 수현 씨가 한다고 하더라. 만약 장동건과 저, 김희애 씨, 수현 씨가 있으면 나와 김희애 씨가 부부가 될 것 같지 않나. 그런데 가장 언발란스 일 것 같은 수현과 부부가 됐고 가장 정상적인 부부였다. 극중 가장 어리고 몸매 관리만 할 것 같은 지수가 가장 객관성을 가지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 사람과 가장 이질적이고 비집고 들어오기 어려운 인물이었는데 가장 이성적 판단을 내렸다. 재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 결혼한 두 번째 와이프였을 텐데 그런 아내의 판단이 정확했다.
- 김희애 촬영 에피소드가 재미있더라.
▶ 김희애 배우는 정말 열심히 한다. 한번은 의자에서 쉬고들 있는데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찍지 않는데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막상 자기 장면을 찍을 때는 '나 큰일 났어, 눈물이 안나와' 할 때도 있따. 배우 네 명이 각자 그렇게 집중을 하다 보니 집중이 잘 됐다. 심지어 아역 배우들도 집중을 무섭도록 잘 했다. 희애 배우는 항상 연습 외에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데 제가 보는 배우들 중 가장 열심히 하는 배우다.
- 30년 연기 경력의 노하우를 딱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 저는 연기를 할 때 뭔가 계산하고 고민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다. 책에 집중한다. 책에 이미 다 쌓아져 있다. 고민만 계속 하는 사람이라던가 계산해서 쌓는 스타일은 아니다. 감독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 감독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이 배우의 몫이다.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msj@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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