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효제동 가정집에 모인 독립단원들[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11. 16. 13:01
백년사진 No.87
신문 지면 왼쪽은 찢어져 있어서 원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기사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어 전체 맥락을 읽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기사의 본문에서는 경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서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경성이라는 표현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서울이라는 표현을 써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사건 수령 홍경식은 홍참판의 아들
사건의 주역인 홍경식(경성부 효제동 13, 36세)은 대한제국 시대 참판 홍승헌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그의 가족은 만주 봉천성 환인현으로 이주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홍경식은 그곳의 광한단(光韓團이)라는 독립단체에 가입하게 됩니다. 1921년에는 이병욱(경성부 와룡동 106, 28세)과 함께 육혈포 15정과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 잠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신의주지청에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24년 가을, 중국의 동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대한통의부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수령 김동삼은 홍경식을 특파원으로 임명하고, 서울에 지부 설치를 지시했습니다. 홍경식은 이병욱, 유한기(충남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 174, 30세), 박정양(충남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 89, 30세)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협박 전화 또는 직접 가서 모금
이들의 활동 방식은 체계적이었으며 주로 귀족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처음에는 신사적인 태도로 접근해 조국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육혈포로 위협하는 방식을 써서 백원이고 오백원이고 현금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 부호들이 시골로 도망가거나 경찰을 증원하는 등 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한 집을 서너 차례 찾아가 여러 번 돈을 가져갔으며 때로는 전화로도 독촉했습니다. 확인된 사례만 보면, 효자동의 김교신 남작에게서 115원, 창성동 안도에게서 750여 원, 적선동 이경세에게서 300원, 청진동 민용호에게서 200원 등을 모금했습니다.
모금된 자금은 본부로 보내져 무기 구입에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한 군자금 모집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상당한 자금과 인원이 확보되면 조선 내 고위 관리와 귀족들을 암살하고,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를 파괴할 계획이었습니다.
● 4명은 체포, 2명은 본부로 안전하게 돌아가
경기도 경찰부는 김동삼의 밀사 침입 정보를 입수한 후, 각 지방 경찰과 연계하여 수사망을 좁혀갔습니다. 11월 11일 새벽, 효제동의 아지트를 포위한 고등형사들과 동대문서 경찰들은 홍경식(36), 이병욱(28), 유한기(30), 박정양(30) 등을 체포합니다. 현장에서 육혈포 1정, 탄환 30발, 통의부 지부장 도장, 불온문서 수십 매가 압수되었습니다.
김장식과 현익철은 대구, 안동, 밀양 지방으로 군자금 모집을 떠났다가 체포를 면했는데이들은 상당한 금액을 모금해 본부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건 발생 며칠 후인 11월 17일, 동대문서는 또 다른 혐의자 2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추가로 체포한 이들 두 명의 사건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밀에 부침으로써 아직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떤 방면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는 고양군 용강면 창천리의 이덕규 집에서 육혈포로 위협해 군자금 400원을 강탈한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 서울 효제동 13번지의 비밀 아지트에서 독립자금 모금과 암살 계획 세워
동아일보 1924년 11월 13일자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설명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기사 제목은 ‘군자금, 암살, 파괴계획 – 경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활동하던 중대사건 진상’ 입니다.
신문 지면 왼쪽은 찢어져 있어서 원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기사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어 전체 맥락을 읽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기사의 본문에서는 경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서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경성이라는 표현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서울이라는 표현을 써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일제는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단이 국내로 잠입하여 음모를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한통의부 수령 김동삼이 서울을 비롯해 각도의 부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들 독립단을 최근 검거하게 된 사건을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대한통의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 줄여서 통의부라고도 한다. 간도참변과 자유시 사건으로 독립군 세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된 무장 단체 중 하나. 만주 내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 응징, 일본 영사관과 경찰서 등 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광동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와 〈대한통의부 공보〉를 발행해 교육 계몽활동도 하였다. 총장 김동삼, 부총장 채상덕, 비서과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교섭부장 김승만, 군사부장 양규열, 법무부장 현정경, 재무부장 이병기, 학무부장 신언갑, 실업부장 변창근, 교통부장 오동진, 참모부장 이천민 등. 나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
● 사건 수령 홍경식은 홍참판의 아들
사건의 주역인 홍경식(경성부 효제동 13, 36세)은 대한제국 시대 참판 홍승헌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그의 가족은 만주 봉천성 환인현으로 이주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홍경식은 그곳의 광한단(光韓團이)라는 독립단체에 가입하게 됩니다. 1921년에는 이병욱(경성부 와룡동 106, 28세)과 함께 육혈포 15정과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 잠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신의주지청에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24년 가을, 중국의 동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대한통의부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수령 김동삼은 홍경식을 특파원으로 임명하고, 서울에 지부 설치를 지시했습니다. 홍경식은 이병욱, 유한기(충남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 174, 30세), 박정양(충남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 89, 30세)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 협박 전화 또는 직접 가서 모금
이들의 활동 방식은 체계적이었으며 주로 귀족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처음에는 신사적인 태도로 접근해 조국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육혈포로 위협하는 방식을 써서 백원이고 오백원이고 현금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 부호들이 시골로 도망가거나 경찰을 증원하는 등 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한 집을 서너 차례 찾아가 여러 번 돈을 가져갔으며 때로는 전화로도 독촉했습니다. 확인된 사례만 보면, 효자동의 김교신 남작에게서 115원, 창성동 안도에게서 750여 원, 적선동 이경세에게서 300원, 청진동 민용호에게서 200원 등을 모금했습니다.
모금된 자금은 본부로 보내져 무기 구입에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한 군자금 모집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상당한 자금과 인원이 확보되면 조선 내 고위 관리와 귀족들을 암살하고,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를 파괴할 계획이었습니다.
● 4명은 체포, 2명은 본부로 안전하게 돌아가
경기도 경찰부는 김동삼의 밀사 침입 정보를 입수한 후, 각 지방 경찰과 연계하여 수사망을 좁혀갔습니다. 11월 11일 새벽, 효제동의 아지트를 포위한 고등형사들과 동대문서 경찰들은 홍경식(36), 이병욱(28), 유한기(30), 박정양(30) 등을 체포합니다. 현장에서 육혈포 1정, 탄환 30발, 통의부 지부장 도장, 불온문서 수십 매가 압수되었습니다.
김장식과 현익철은 대구, 안동, 밀양 지방으로 군자금 모집을 떠났다가 체포를 면했는데이들은 상당한 금액을 모금해 본부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건 발생 며칠 후인 11월 17일, 동대문서는 또 다른 혐의자 2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추가로 체포한 이들 두 명의 사건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밀에 부침으로써 아직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떤 방면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는 고양군 용강면 창천리의 이덕규 집에서 육혈포로 위협해 군자금 400원을 강탈한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 독립운동의 양상을 알 수 있는 이야기
오늘은 1924년 일제강점기 서울 효제동에서 독립군들이 아지트로 활용한 가정집 사진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만주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가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국내 진출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중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국내 진출 시도와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 그리고 군자금 모집이라는 독립운동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부호층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은, 당시 계층 간 갈등과 민족운동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 많이 남겨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오늘은 1924년 일제강점기 서울 효제동에서 독립군들이 아지트로 활용한 가정집 사진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만주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가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국내 진출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중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국내 진출 시도와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 그리고 군자금 모집이라는 독립운동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부호층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은, 당시 계층 간 갈등과 민족운동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 많이 남겨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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