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놈에 짓밟힌 나라 구하려 했다, 비겁한 조정은…”

김용희 기자 2024. 11. 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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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동학농민군 열전⑦
김인배와 여장협
영호남 합작 영호도회소 설치
김인배·여장협, 1만명 이끌고
2차 봉기 때 하동∼진주 점령
최신무기 일본군에 끝내 분패
11일 경남 하동군 옥종면 고성산 동학혁명군 위령탑에서 동학혁명 130주년 위령식이 열리고 있다. 고성산은 1894년 11월11일 동학농민군 5천여명이 일본군과 맞붙어 500명 이상이 숨진 곳이다.

“왜놈에게 짓밟힌 나라를 구하려 일어났다. 왜놈에게 포로가 된 왕을 구하려 일어났다. 왜놈의 주구가 된 간신들을 물리치려 일어났다. 이 땅에 백성들이 편하게 사는 개벽 세상을 구현하려 일어났다. 그러나 무능한 왕은 제 백성을 왜놈의 총칼 아래로 내몰았다. 비겁한 조정은 우리를 역도로 몰았다.”

11일 오전 경남 하동군 옥종면 고성산(고승당산)에 있는 동학혁명군 위령탑 앞에서 ‘부활의 시’가 울려 퍼지자 참석자들은 한숨을 쉬거나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경남동학농민혁명계승기념사업회,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군 위령식을 열었다. 고성산은 130년 전 음력 10월14일(11월11일) 하동·산청·남해·진주·고성·사천·의령 등 경남 농민군 4천~5천명이 일본군 1개 중대에 맞서 싸우다 500명 이상이 순국한 곳이다. 농민군 사망자들은 지금도 고성산 인근 단지골 두 곳, 불무마을 묵은티골 등 세 곳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령탑은 동학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주도로 추진해 이듬해 3월 건립해, 매년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동학혁명은 전라도, 충청도를 비롯해 경남지역에서도 하동 접주(동학 지도자) 여장협(1834~1894)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김동련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의 연구 결과를 보면 경남 산청 덕산 대접주 백낙도는 1894년 5월 초 최시형 지시로 봉기를 기획했으나 첩보를 일찍 입수한 관군에게 처형당했다. 같은 달 28일(음력 4월24일) 손은석이 동학군 수천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해, 경상우병사 민준호와 타협하며 교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6월10일 전주화약 뒤 전국에 집강소가 설치될 때 전북 김제 출신 김인배(1870~1894)는 전남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며 영남 일부(하동·진주)와 호남 일부(순천·광양·여수·낙안)를 담당했다.

치열했던 경남 서부 전투

같은 해 8월 초 부임한 하동 부사 이채연이 동학을 가혹하게 탄압하자 김인배는 이채연 처벌에 나선다. 김인배는 순천에서 100여명, 광양에서 2400여명을 하동으로 보냈고 여장협은 이들과 합세해 ‘영남의소’를 조직했다. 이채연이 농민군을 공격해 일부를 체포하자 김인배는 9월29일 1만명을 이끌고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로 진군했다. 섬진강 건너편인 하동읍 광평리 송림(소나무숲)에는 여장협이 산청·진주·곤양·남해 등에서 모인 동학군과 대기하고 있었다. 최시형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자 9월18일 전국 농민군에게 총기포령(2차 봉기)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당시 김인배는 남원 김개남 세력의 경남 함양 진출에 맞춰 하동을 장악해 경상도에 세력을 넓혀 항일전을 대비하려 했다.

김인배와 여장협 세력은 10월1일 이채연이 도망간 하동 관아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진출했다. 9일 남해, 13일 사천, 15일 곤양을 거쳐 20일 경상우병영이 있던 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김인배는 악질 향반과 부패 관리를 처벌한 뒤 같은 달 24일 본거지로 복귀했다.

여수 전라좌병영과 함께 주요 군사거점이었던 경상우병영이 농민군에 함락되자 조선 조정은 부산감리서(개항기 부산에서 외교사무를 보던 관청)에 일본군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군 부산수비대 150여명과 조선군 100여명으로 이뤄진 토벌군은 배편으로 통영에 상륙해 고성, 진주를 거쳐 11월4일 사천 곤양에 진지를 구축했다. 급하게 부대를 재편한 여장협도 하동 길목인 금오산 시루봉에 진을 쳤다. 당시 농민군 규모는 수천~수만명으로 추정된다.

11월7일 첫 전투가 벌어졌다. 화승총과 죽창, 낫 등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영국 스나이더 소총과 청일전쟁에서 노획한 독일제 기관총으로 맞서는 일본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북쪽으로 밀려난 농민군 5천여명은 고성산 정상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11월11일 오전 8시 농민군의 선제사격으로 전투가 시작됐으나 일본군의 최신 무기에 밀리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산 정상에서 돌을 굴리며 치열하게 싸웠지만 반나절도 버티지 못했다. 농민군은 하동의 북쪽 산청 방면으로 이동하며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결국 광양 쪽으로 후퇴했다.

지원 요청을 받은 김인배는 광양에서 섬진강을 건너 다시 하동을 공격하려 했으나 강가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하며 경남 서부의 동학은 막을 내렸다. 서당 훈장을 하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동학에 참여했던 여장협은 12월2일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장협은 주검을 찾지 못해 고향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에 가묘만 남아 있다. 김인배는 이듬해 1월2일 광양에서 처형당했다.

고성산에서 전사한 하수태(당시 33살)의 증손자 하재호(83)씨는 “증조할아버지의 동학 참여를 숨겨야 했던 가족들은 증조할머니네 마을로 이주해 숨죽이고 살았다고 한다”며 “우리 할아버지 주검은 수습했지만 아직도 고성산에 묻혀 있는 농민군은 꼭 발굴해 위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해 발굴·동학 연구·서훈 등 과제 쌓여

1894년 10월1일 김인배와 여장협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명이 경남 하동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던 하동군 하동읍 광평 송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전남 광양, 왼쪽이 경남 하동이다.

하동군은 유해 발굴 등 동학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하승철 하동군수는 위령제에서 추모사를 통해 “지난해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설립에 이어 올해 5월 하동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며 기념사업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비로소 마련했다”며 “내년 고성산에서 산화한 농민군 유해 발굴을 추진하고 유적지도 정비해 하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의 동학 투쟁 의미를 계승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어느 정도 진상이 밝혀진 경남 서부지역과 달리 강원도, 북한 등 다른 지역 동학 연구는 갈 길이 멀다. 강원도는 1880년대부터 최시형의 활동으로 동학 조직이 확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황해도는 동학교도였던 김구의 ‘백범일지’ 등을 통해 동학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평안도, 함경도가 호응하지 않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주도 또한 ‘동학 최후 전투’로 불리는 장흥 석대들전투에서 살아남은 농민군들이 이름을 숨기고 숨어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실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은 “전문 인력을 양성해 기록 발굴에 힘써야 하고 북한도 조사해야 동학혁명의 전반적인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최근 논쟁이 불거진 동학 2차 봉기 참가자들의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에서 보듯이 동학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할 문제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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