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선조 때 ‘사화 트라우마’… 지금은 ‘탄핵 트라우마’
노파심에 밝히자면, 나는 또 탄핵이 있어선 안 된다고 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적지 않은 국민이 ‘탄핵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당 대표나 비서실장, 장관한테는 대면보고 한번 안 받으면서 사인(私人)의 국정농단을 허용한 전임대통령. 대통령 권력을 남용한 ‘유신 공주’만 파면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절로 복원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후임 대통령 문재인은 우리국민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몰고 갔다.
● 대통령 부부는 안드로메다에 살고…
그래서 당장 대통령이 물러나면 어쩔 건데? 우파궤멸도 겁나지만 ‘이재명의 민주당’ 집권은 더 겁난다. 죽어도 경험하기 싫은 나라로 끌고 간다면, ‘검찰공화국’이나 ‘김건희의 나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답답할 때는 혹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역사를 들여다본다. 세상에 이럴 수가.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 1545년(명종 원년) 을사사화 등 4대 사화(士禍)로 사대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새 임금이 등극한 조선 선조 시절(재위 1567~1608), ‘사화 트라우마’가 ‘마이너스 에너지’로 작용했다는 거다. 류성룡 관련 학술지인 2023년 ‘서애연구’에서 발견한 대목이다.
“문정왕후의 사망과 선조의 등극을 계기로 이른바 ‘훈척의 시대’가 가고 소위 선비들이 주 도하는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무오·갑자·기묘·을사의 ‘4대 사화’가 가져다 준 깊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이 트라우마는 새로운 국면에서 마주 하 게 되는 군신 또는 신하들 사이의 통합을 저해하는 ‘마이너스의 에너지’이자 ‘소모적인 정 치적 비용’으로 작용하게 된다.” (백권호 논문 ‘류성룡에 대한 일부 부정적 실록 기록의 재해석에 관한 연구’)
명종 말 선조 초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1499~1572)은 여섯 살 나이에 갑자사화를 겪었다. 조부와 부친이 연루돼 유배를 떠났으나 2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바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덕분에 이준경은 강직한 성품에도 조심성은 어쩌지 못했다. 상경한 퇴계 이황(1502~1571)에게 선비들이 몰려들자 “제2의 조광조가 되려고 하십니까” 우려했을 정도다. 국왕을 능가하는 인기나 영향력을 갖게 되면 중종 때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처럼 변을 당할 수 있다는 경고다.
퇴계 역시 아끼는 후배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내 “불에 뛰어드는 나방을 본받지 말고, 담장 밑에 서 있다가 압사하는 화를 당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성급한 개혁 추진의 위험성을 경계한 거다. 언제든 왕권이 오작동해 나라가 거꾸로 갈 수 있다는 깊은 불신. 그럼에도 사화 트라우마 때문에 임진왜란 같은 더 큰 화를 막지 못했다고는 죽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 잘난 체하면서도 개혁의지 없는 선조
이준경은 선조에 대해 명철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라고 봤다. 선조 5년 죽음을 앞둔 그는 “이 늙은이 흙 속으로 돌아가며 전하께 당부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유언을 남긴다(이한우의 군주열전 ‘선조’). 요약하면 학문에 힘쓰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의(威儀·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가 있어야 하고, 군자와 소인을 분간하고,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한다는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들여다보면, 어찌나 우리 현실과 들어맞는지 기가 막힌다.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 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 환관의 국사 개입까지 허용했다
안타깝게도 선조는 명재상의 유언조차 귀담아 듣지 않은 듯하다. 고집은 있는데 의심 많고,일관성이 없는데다 의지력과 결단력도 부족했던 선조는 율곡 이이가 줄기차게 국정개혁을 주장해도 “거행하기 어려울 듯하다”며 거부했다. 조보(조선시대 관보) 유출을 꺼리는 등 비판세력을 봉쇄한 건 물론이다. 심지어 임진왜란이 터지기 반년 전까지 기축옥사 뒤끝으로, 대대적 사대부들 처벌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이상혁 2009년 논문 ‘조선조 기축옥사와 선조의 대응’).
전형적 왕조 순환의 방식에 따르면, 새 왕조는 초기 번영의 시기를 구가한다. 정적들은 제거됐고 모든 부(富)는 왕의 곳간에 쌓여 있다. 하지만 귀족과 관료가 늘고 이들에게 토지와 특혜를 나눠줄수록 조세부담자가 줄면서 창건 100년도 안 돼 재정적 어려움을 맞는다. 이 때 과감한 개혁을 하면 내리막길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무능과 무책임과 부패로 개혁을 못하면, 망하는 거다. 중국 60개 왕조의 평균 수명이 70년도 못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명나라는 276년만에 왕조가 바뀌었는데 조선이 무려 518년을 기신기신 버틴 것도 놀랍지 않은가.
“심하게 타락한 관료제 국가는 중국같은 거대제국보다 한국같이 작은 나라에서 더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존 페이뱅크, 에드윈 라이샤워 등은 ‘동양문화사’에서 분석했다. 어느 정도 타락했느냐고? 조선 개국 200년 임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환관의 국정개입까지 허용했을 정도다. 명의 황제에게 원병을 청해야 한다는 제안을 처음 낸 것이 비변사 아닌 환관 이봉정이라고 선조가 호종공신을 책봉하며 밝힌 것이다. 환관의 국사 참여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조선 대신들로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 트라우마 속에서도 당쟁은 벌어졌다
천만다행히도 그 무렵은 인재가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실학자 이익도 “선조 때 뛰어난 인물들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했다. 임란과 정유재란까지 맞고도 선조가 나라와 왕조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인복이 있었기 때문일 터다(사화 트라우마로 뻑하면 사직서를 내고 낙향하긴 했다).
특히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은 당대 보기 드문 현실주의적 정치인이었다. 율곡처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서슴지 않고 직간(直諫)하는 대신, 때와 형세에 맞춰 수위를 달리하는 수시지의(隨時之義)가 신하로서의 의리라고 봤다. 아무리 필요한 간언이라 해도 우선 국왕에게 공감을 표시하며 군주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자세가 됐는지 살피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은 물론 자리까지 내려놓고 간곡히 할 말을 하며 전쟁 중 재상으로 나라를 지켰다(백권호 논문).
선조 이후, 사화 트라우마가 있어 사화는 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도 탄핵 트라우마가 있어 대통령 탄핵은 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탄핵이란, 잘못하면 대통령 직(職)에서 파면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만 처절히 새기고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과연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는지 여부다. 공천 개입 의혹이 계속 터져 나오는데도 거짓 해명으로 국민 염장을 지르거나, 부인의 국정 개입 의혹이 역력한데도 “절대 국정 개입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끝내 안 하는 걸 보면, 과연 윤 대통령이 국민을 두렵게 여기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 출신 대통령인지라 자신이 검찰을 장악했다고 믿기 때문일 수 있다(검찰이 언제까지 ‘권력의 주구’일지 궁금하다). 헌법재판소를 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탄핵 결정에는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현행 6인 체제에선 한명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탄핵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영부인 사주’가 있다는 부인을 믿는다는 소문도 나돈다^^.
● 대통령 부인도 국민 위에 존재할 순 없다
속히 대통령 비서실장부터 바꾸고, 야당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새 국무총리를 들여야 한다. 찔끔찔끔 말고 가시적 개편이 시급하다. 헌법대로 총리 제청을 받아 유능한 인물로 새 내각을 구성해 내각제처럼 운영하는 등 확 달라지는 모습을 뵈주는 것이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이 세번 째 ‘김건희 특검법’ 거부권을 휘두르기 전, 부디 심사숙고했으면 한다.(관저에 가서 물어보라는 뜻 아님). 저널리스트 마이클 브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국민과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썼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약 말이다. 대통령(V1)은 물론 대통령 부인(V0)도 법 위에, 국민 위에 존재할 순 없음을 윤 대통령은 명심해야 한다. 임계점을 넘으면 우리 국민 감정 속 ‘야수’가 튀어나올 수 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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