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보다 더 박수받은 패자의 이 한마디[정미경의 이런영어 저런미국]

정미경 기자 2024. 11. 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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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실업자 신세”
패자의 연설은 패배의 연설이 아니다
미국을 울리고 웃긴 승복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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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승복 연설 때 ‘미국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네’(America Broke My Heart)라는 팻말을 두르고 걷는 해리스 지지자. 카멀라 해리스 선거본부 홈페이지
A fundamental principle of American democracy is that when we lose an election, we accept the results.”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선거에서 지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패배를 공식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미국 대선이 깔끔하게 마무리됐습니다. 개표 결과가 나오면 승자는 승리 연설(victory speech)을 하고,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 전화(congratulatory call)를 거는 한편 공식적인 무대에서 승복 연설(concession speech)을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패자에게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승복 연설은 패자의 연설이지만 패배 연설(defeat speech)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concession’은 양보라는 뜻입니다. 미국인들은 평화적 권력 교체의 전통이 패자의 양보(concede)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믿습니다. ‘cede’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토나 권리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con’은 강조의 의미입니다. 해리스 부통령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accept the results’(결과를 수용하다)가 없으면 승복 연설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진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하는 투쟁을 계속하자는 것입니다. 11분 동안의 짧은 연설에서 ‘fight’(싸우자)가 16번이나 나옵니다.

패배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승복 연설은 후보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연설인 동시에 가장 명연설이 많이 나오는 연설이기도 합니다. 승리 연설과 달리 깊이가 있고 다양한 메시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승복 연설을 알아봤습니다.

198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경선 승복 연설을 하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 연구소 홈페이지
The commitment I seek is not to outworn views but to old values that will never wear out.”
(내가 추구하는 것은 낡은 생각이 아니고 절대 낡지 않는 유구한 가치들이다)
첫째, 기차 떠난 뒤 손 흔드는 형입니다. 선거 운동 때는 죽을 쑤더니 정작 패한 뒤 승복 연설은 과하게 훌륭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1980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그렇습니다. 케네디 이름값도 못 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맥없이 졌습니다. 경선 패자는 전당대회에서 승복 연설을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싸한 농담으로 뉴욕 전당대회 연설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기대치는 높지 않았습니다. “Well, things worked out a little different from the way I thought, but let me tell you, I still love New York!”(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나 여전히 뉴욕 사랑해요)

이변이 펼쳐졌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환생’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명연설이 나왔습니다. 테드 소렌슨, 아서 슐레진저 등 20년 전 케네디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했던 거물 스피치라이터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역작입니다. 민주당 본연의 진보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연설의 핵심입니다. 카터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주장했던 미국의 꿈과 희망, 프런티어 정신이 나오자 관중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연설의 트레이드마크였던 ‘not A, but B’식 비교법이 여기서도 등장합니다. 케네디 의원은 승복 연설에서 처음으로 두 형을 거론했습니다. 그동안 형의 그늘에서 살기 싫다는 이유로 형들의 이름을 연설에서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32분간의 연설 동안 51회 기립박수가 터졌습니다. 37초당 한 번꼴입니다. 20세기 미국 100대 명연설에서 76위에 올랐습니다. 마지막 구절로 나오는 ‘The Dream Shall Never Die’(꿈은 절대 죽지 않는다) 연설로 불립니다. 관중들은 “저렇게 훌륭한 연설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이 연설을 마지막으로 대선 무대에서 미련 없이 퇴장해 의회의 실세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1996년 대선에서 패한 뒤 승복 연설을 하는 밥 돌 공화당 후보. 위키피디아
I was just thinking on the way down the elevator that tomorrow will be the first time in my life I don’t have anything to do.”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길에 내일부터 인생에서 처음으로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둘째, 유머형입니다. 패한 후보 진영은 침울합니다. 지지자들을 위해 분위기를 ‘업’시킬 줄 아는 후보가 존경받습니다. 1996년 대선에서 밥 돌 공화당 후보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패했습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상원 하원 주지사 선거까지 모조리 대승을 거두는 ‘공화당 혁명’을 이룬지 2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돌 후보의 개인적인 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클린턴 대통령보다 23살이나 많은 나이 때문에 완고한 할아버지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경력은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루한 연설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시종일관 밝은 연설이었습니다. “내일부터 실업자 신세”라는 자폭 개그로 시작했습니다. 시끄러운 박수 소리로 연설이 자꾸 끊기자 대선 공약이었던 세금 감면 카드를 꺼냈습니다. “You’re not going to get that tax cut if you don’t be quiet.”(조용히 하지 않으면 세금 안 깎아 줄 거야)

2000년 백악관에서 대선 승복 연설을 하는 앨 고어 부통령. 백악관 홈페이지
I accept the finality of this outcome.”
(결과의 최후성을 인정한다)
셋째, 장소 맞춤형입니다. 연설은 장소가 중요합니다. 미국인들은 세팅(setting)이라고 합니다. 세팅에 맞는 연설이 좋은 연설입니다. 승복 연설은 대개 지지자들의 연호 속에서 시끌벅적한 행사장에서 열립니다. 지지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다시 일어서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2000년 대선 때 앨 고어 부통령의 승복 연설은 절간처럼 조용한 곳에서 열렸습니다. 플로리다 재검표 공방을 거쳐 선거 한 달 뒤 당락이 결정됐기 때문에 행사장에서 할 수 없었습니다. 부통령 신분이라 백악관 블루룸에서 했습니다. 대통령 기자회견이나 행사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가족과 동료 정치인 1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백악관 블루룸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연설할 때 조용한 방을 ‘dead room’(죽은 방)이라고 합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에 대해 대국민 사과할 때 백악관 지하 맵룸에서 조명 하나 켜놓고 했습니다. 데드룸 연설은 주변 효과음이 없어 오로지 연설력 하나로 승부해야 합니다.

고어 부통령은 평소 ‘Wooden Gore’(나무토막 고어), ‘Bore Gore’(지루한 고어)로 불릴 정도로 연설 스타일이 딱딱했습니다. 하지만 승복 연설은 조용하고 장엄한 백악관 블루룸이 연극무대 효과를 내며 모처럼 감정이 충만한 연설을 했습니다. 패배를 인정한 구절입니다. ‘finality’(최종적임)라는 법정 용어가 나옵니다. 마치 법정에서 최후 변론을 하는 변호사 같습니다. 연설문은 당시 고어 부통령의 스피치라이터였던 하버드대 출신의 일라이 에티가 썼습니다. 연설에 칭찬이 쏟아지면서 에티는 할리우드로 진출해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West Wing)의 각본을 썼습니다.

명언의 품격

1858년 링컨-더글러스 토론 장면. 위키피디아
고어 부통령은 승복 연설에서 과거 정치인의 발언을 인용했습니다. 연설 중간쯤 “스티븐 더글러스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더글러스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천적입니다. 둘은 일리노이 동향 출신. 지방 정치인이던 링컨이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장을 냈을 때 더글러스가 현역 의원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더글러스에게 토론을 제안했습니다. 노예제도를 주제로 7차례 토론을 벌였습니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 더글러스는 노예제 지지 여부를 각 주에 맡기는 인민주권제를 주장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최고의 토론으로 불리는 ‘링컨-더글러스 토론’(Lincoln-Douglas Debates)입니다.

토론 내용은 둘 다 훌륭했습니다.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더글러스가 이겼지만, 토론을 계기로 전국구 스타가 된 것은 링컨이었습니다. 링컨은 토론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선거자금을 마련해 2년 뒤 대선에 도전했습니다. 더글러스도 질세라 대선 도전장을 냈습니다. 노련한 정치인 더글러스보다 열정으로 가득 찬 시골뜨기 링컨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대선은 링컨 승. 더글러스는 승복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Partisan feeling must yield to patriotism. I am with you, Mr. President, and God bless you.”
(당파주의는 애국심에 굴복해야 한다. 당신을 지지합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선거 전에서는 당파적 싸움을 했지만 선거가 끝나면 애국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승복 연설에 꼭 등장하는 국가 화합의 메시지가 더글러스에서 출발했습니다. 당시 남부 주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으로 마음이 편치 않던 링컨에게 더글러스의 지지 선언은 큰 힘이 됐습니다. 감동한 링컨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What a noble man Douglas is!”(더글러스는 얼마나 고결한 인간인가). 더글러스는 지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전국을 돌며 링컨을 위한 연방 수호 연설을 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취임식 연설 때 옆에서 그의 모자를 들고 있었던 것도 더글러스였습니다.

실전 보케 360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지지 유세에서 일론 머스크. 일론 머스크 X 계정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쉬운 단어를 활용해 영어를 익히는 코너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입니다. 머스크가 소유한 X(옛 트위터)는 트럼프 지지 매체로서 맹활약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X가 극우파의 놀이터가 됐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과거 러시 림보 등이 주름잡았던 극우 라디오 토크쇼의 역할을 지금은 X가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X의 공정싱이 의심받을 때마다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We’re very rigorous on the X platform about being a level playing field.”
(우리는 X 플랫폼을 공정한 경쟁의 장으로 만드는 데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상대가 비슷한 수준이 아닐 때 “레벨이 다르다”라고 합니다. ‘level’은 수준, 단계를 말합니다. 원래 ‘horizontal line’(지평선)에서 출발했습니다. ‘level’을 형용사로 쓸 때는. ‘평평한’ ‘대등한’이라는 뜻입니다. 벽에 액자 몇 개를 나란히 걸 때 키를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밑에 있는 사람에게 봐달라고 묻습니다. “Are these pictures level?”(그림들 높이 똑같아?)

‘level playing field’는 ‘level’(동등한)과 ‘playing field’(운동장)이 합쳐졌습니다. 운동장은 평평해야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면 한 팀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level playing field’는 평평한 운동장, 즉 공정한 경쟁을 말합니다. 학부모나 교사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We need to create a level playing field for students of all backgrounds.”(모든 배경의 학생들이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저런 리와인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장기 연재된 ‘정미경 기자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 칼럼 중에서 핵심 아이템을 선정해 그 내용 그대로 전해드리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2019년 7월 22일 소개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 발언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백인 코미디언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가리켜 “바다 위의 쓰레기 섬”(floating island of garbage)이라는 막말을 했습니다. 인종차별적 발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시절에는 트럼프 본인이 인종차별 발언을 자주 했습니다. 2019년 민주당 유색인종 여성 의원 4명에게 “범죄가 들끓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공격했습니다. 트럼프 재집권을 앞두고 그의 인종차별 발언을 되돌아봤습니다.

▶2019년 7월 22일자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722/96627712/1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막말을 들은 뒤 반박 기자회견을 연 민주당 여성 의원 4인방. 미 하원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을 비판하는 민주당의 유색인종 하원의원 4인방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트윗을 날렸습니다. 인종차별적 발언이지만 ‘racist’(인종차별주의자)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듭니다. ‘racist’는 매우 심각한 욕입니다. 더구나 대통령에게 쉽게 racist 낙인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언론이 이 사태를 어떻게 보도했는지 보겠습니다.
Trump Targets Lawmakers in Racially Charged Tweets.”
(트럼프는 인종차별적 트윗으로 의원들을 겨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기사 제목입니다. ‘racist’라고 규정하기 꺼려질 때 ‘racially charged’ ‘racially loaded’ 정도로 순화합니다. 직역하자면 ‘인종차별 무게가 나가는’이라는 뜻입니다. 올해 초 AP통신의 모범 기사작법 교과서인 스타일북은 ‘racially charged’ 표현을 쓰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모호하게 순화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The tweets were widely seen as racist.”
(그 트윗은 폭넓게 인종차별주의 트윗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NYT) 기사입니다. 넓게 보여진다(widely seen), 즉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Many people saw the tweets as racist’(폭스뉴스) ‘Critics are calling the tweets racist’(ABC뉴스) 등도 비슷합니다.
CNN says ‘racist’ more than 1100 times regarding Trump ‘go back’ tweet.”
(CNN은 트럼프의 ‘돌아가라’ 트윗에 대해 1100회 넘게 ‘racist’ 단어를 썼다)
CNN은 처음부터 ‘racist’라고 밀고 나갔습니다. 한 언론 연구기관의 조사 결과입니다. CNN의 영향인지 다른 매체들도 슬금슬금 ‘racist’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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