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중적이고 평범한 건 별로”...이러는 당신, 모두가 편하게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죠 [전형민의 와인프릭]
“난 메를로는 절대 안 마셔!(I am not drinking any Fu**ing Merlot!)”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 속 주인공, 마일스는 피노누아(PInot Noir) 와인의 신봉자였습니다. 대사마다 피노누아를 찬양하고 다른 품종들을 까내렸죠. 마일스는 유독 메를로를 향한 강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위 대사는 그가 추구하는 독특하고 섬세한 취향을 강조하면서, 흔하고 대중적으로 여겨지는 메를로를 멀리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꼽힙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인기 때문에 당시 메를로의 인기는 잠시 감소하고, 피노 누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도 했습니다.
마일스가 메를로를 이렇게까지 혐오하는 이유는, 그가 메를로를 ‘대중적이고 평범한 와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일스는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맛을 가진 피노누아에 심취해 있는데요. 피노누아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을 특별하고 독창적으로 여기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일종의 모티프로 작용합니다. 반면 메를로는 피노누아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대중적인 통속성을 상징해 마일스가 자신의 인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고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실제로 메를로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품종일까요?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은 와인의 세계에서 나쁜 것일까요? 이번 와인프릭은 메를로에 대해 탐구해봅니다. 마침 지난 7일은 ‘국제 메를로의 날’이었습니다.
메를로로 빚은 와인은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질감, 중간에서 풀바디의 특성, 풍부하고 진한 과일 맛을 보여줍니다. 양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와인이어도 쉽게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죠. 샤도네(Chardonnay)처럼 포도가 자라난 떼루아(Terroir)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시원한 기후에서는 딸기와 라즈베리와 같은 붉은 과일 풍미가 나는 와인이, 따뜻한 기후에서는 자두와 검은체리, 검은베리와 같은 어두운 과일 향이 나는 와인이 생산됩니다.
메를로는 종종 초콜릿, 바닐라, 향신료의 풍미를 보이는데, 이는 주로 오크 숙성 때문입니다. 이러한 풍미는 와인의 과일 맛을 보완해 깊이와 복잡함을 더합니다. 와인의 질감은 종종 둥글고 부드럽거나, 벨벳 같다고 묘사됩니다. 이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같은 다른 레드 와인에 비해 일반적으로 타닌 수치가 낮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종종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두고 까베르네 소비뇽을 남성형, 메를로를 여성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 단일 품종으로 된 훌륭한 와인들이 존재하듯, 메를로 역시 단일 품종으로도 훌륭한 와인이 생산됩니다. 일례로 보르도 와인 중 자타공인 최고가이자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샤또 페트뤼스(Chateau Petrus)가 메를로 품종으로 빚어내는 와인이죠. 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보석으로 불리는 수퍼투스칸(Super Tuscan) 중 마세토(Masseto) 역시 메를로로 만드는 고급 와인으로 전세계 와인 애호가의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다만 껍질이 얇기 때문에 까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고 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는 편 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품종에 비해 포도알에 당분이 많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다른 품종으로 빚어낸 와인에 비해 1~2도 정도 높을 수 있죠. 이런 특징들 때문에 의외로 불고기와 양념갈비 등 한식과 잘 어울립니다. 간단한 모임에서 부담스럽지 않게 와인을 즐기고 싶을 때, 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은 너무 식상하다고 느껴질때 제격입니다.
특유의 유연한 성격 덕분에, 까베르네 소비뇽과의 조합에서는 충실한 조연의 역할을, 단독으로 양조될 때는 필요하다면 자신만의 캐릭터를 슬며시 뽐내는 조화와 균형의 미덕을 보여주는 와인이라는 표현도 썩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특성 때문에 무난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합니다. 영화 사이드웨이 속 마일스의 평가가 그렇죠.
아마 메를로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갈릴 겁니다. 메를로를 비롯한 모든 와인은 마시는 그 순간의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다만 복잡하고 개성만을 좇는 세상 속에서 편안함과 균형감을 찾고 싶을 때, 메를로를 즐겨보시길 권합니다. 그 유연함과 조화, 그리고 언제나 완벽히 균형 잡힌 풍미는 마시는 여러분에게 잔잔한 안도감을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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