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중적이고 평범한 건 별로”...이러는 당신, 모두가 편하게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죠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11. 16. 11: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난 메를로는 절대 안 마셔!(I am not drinking any Fu**ing Merlot!)”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 속 주인공, 마일스는 피노누아(PInot Noir) 와인의 신봉자였습니다. 대사마다 피노누아를 찬양하고 다른 품종들을 까내렸죠. 마일스는 유독 메를로를 향한 강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위 대사는 그가 추구하는 독특하고 섬세한 취향을 강조하면서, 흔하고 대중적으로 여겨지는 메를로를 멀리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꼽힙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인기 때문에 당시 메를로의 인기는 잠시 감소하고, 피노 누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도 했습니다.

마일스가 메를로를 이렇게까지 혐오하는 이유는, 그가 메를로를 ‘대중적이고 평범한 와인’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일스는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맛을 가진 피노누아에 심취해 있는데요. 피노누아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을 특별하고 독창적으로 여기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일종의 모티프로 작용합니다. 반면 메를로는 피노누아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대중적인 통속성을 상징해 마일스가 자신의 인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고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실제로 메를로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품종일까요?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은 와인의 세계에서 나쁜 것일까요? 이번 와인프릭은 메를로에 대해 탐구해봅니다. 마침 지난 7일은 ‘국제 메를로의 날’이었습니다.

영화 사이드웨이 속 마일스(왼쪽)가 와이너리에서 시음하는 장면. 마일스는 “난 메를로는 절대 안 마셔!”라며 메를로를 혹평했다.
작은 검은 새라는 이름의 포도
메를로는 보르도에서 유래한 적포도 품종입니다. 프랑스어 메를르(Merle·작은 검은 새)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도 과실의 유난히 짙고 어두운 색깔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초 무렵, 유전적으로는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과 희귀 품종인 마들렌 누아르 데 샤랑트(Magdeleine Noire des Charentes)의 자연적인 교배로 탄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재다능하고 접근하기 쉬운 덕분에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심는 포도 품종이기도 합니다.

메를로로 빚은 와인은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질감, 중간에서 풀바디의 특성, 풍부하고 진한 과일 맛을 보여줍니다. 양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와인이어도 쉽게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죠. 샤도네(Chardonnay)처럼 포도가 자라난 떼루아(Terroir)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시원한 기후에서는 딸기와 라즈베리와 같은 붉은 과일 풍미가 나는 와인이, 따뜻한 기후에서는 자두와 검은체리, 검은베리와 같은 어두운 과일 향이 나는 와인이 생산됩니다.

메를로는 종종 초콜릿, 바닐라, 향신료의 풍미를 보이는데, 이는 주로 오크 숙성 때문입니다. 이러한 풍미는 와인의 과일 맛을 보완해 깊이와 복잡함을 더합니다. 와인의 질감은 종종 둥글고 부드럽거나, 벨벳 같다고 묘사됩니다. 이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같은 다른 레드 와인에 비해 일반적으로 타닌 수치가 낮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종종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두고 까베르네 소비뇽을 남성형, 메를로를 여성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메를르새. 검은색 작은 티티새를 일컫는다. 포도 품종 메를로의 어원이 됐다.
주연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황금조연
메를로가 유명해지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보르도 블렌드의 한 축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보르도 와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고 판매되는 두 품종,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의 블렌드로 만들어집니다. 두 품종을 섞는 까닭은 두 품종이 상호호환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은 껍질이 두껍고 늦게 익는 만생종, 메를로는 껍질이 얇고 비교적 빨리 익는 조생종이죠. 보르도는 두 품종을 섞은 후에야 비로소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 단일 품종으로 된 훌륭한 와인들이 존재하듯, 메를로 역시 단일 품종으로도 훌륭한 와인이 생산됩니다. 일례로 보르도 와인 중 자타공인 최고가이자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샤또 페트뤼스(Chateau Petrus)가 메를로 품종으로 빚어내는 와인이죠. 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보석으로 불리는 수퍼투스칸(Super Tuscan) 중 마세토(Masseto) 역시 메를로로 만드는 고급 와인으로 전세계 와인 애호가의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다만 껍질이 얇기 때문에 까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고 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는 편 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품종에 비해 포도알에 당분이 많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다른 품종으로 빚어낸 와인에 비해 1~2도 정도 높을 수 있죠. 이런 특징들 때문에 의외로 불고기와 양념갈비 등 한식과 잘 어울립니다. 간단한 모임에서 부담스럽지 않게 와인을 즐기고 싶을 때, 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은 너무 식상하다고 느껴질때 제격입니다.

메를로의 특성과 뉘앙스를 표현한 그래픽. [출처=와인폴리]
편안함과 균형감, 안도감을 찾고 싶을 때
종합하면 메를로는 부드러움과 풍성함, 그리고 모두가 편하게 느낄 만한 접근성을 가진 특별한 품종입니다. 잘 익은 자두, 체리, 블랙베리 등 과실미와 초콜릿이나 감초의 고소한 뉘앙스, 타르와 담배, 흙냄새 같은 복합적인 향까지 공존합니다. 이 때문에 메를로를 좋아하는 추종자들에게는 부드러움 속에서도 장엄하고 우아한 매력을 슬며시 보여주는 품종이라는 찬사도 나옵니다.

특유의 유연한 성격 덕분에, 까베르네 소비뇽과의 조합에서는 충실한 조연의 역할을, 단독으로 양조될 때는 필요하다면 자신만의 캐릭터를 슬며시 뽐내는 조화와 균형의 미덕을 보여주는 와인이라는 표현도 썩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특성 때문에 무난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합니다. 영화 사이드웨이 속 마일스의 평가가 그렇죠.

아마 메를로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갈릴 겁니다. 메를로를 비롯한 모든 와인은 마시는 그 순간의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다만 복잡하고 개성만을 좇는 세상 속에서 편안함과 균형감을 찾고 싶을 때, 메를로를 즐겨보시길 권합니다. 그 유연함과 조화, 그리고 언제나 완벽히 균형 잡힌 풍미는 마시는 여러분에게 잔잔한 안도감을 줄 겁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