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김태리 출두요…여성국극, 왜 짧게 흥하고 망했나
정년이
대역없이 국극 무대 소화…황홀경
1950년대 풍미 뒤 퇴조 여성국극
존재 알린 첫 콘텐츠 웹툰 ‘정년이’
여성문화 평가절하…젠더정치 작동
드라마 ‘정년이’(tvN)가 종영을 앞두고 있다. 시청률과 화제성을 거머쥔 드라마로, 여성국극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당연한 결과다. 원작 웹툰 ‘정년이’가 워낙 훌륭한데다, 김태리를 비롯해 신예은, 정은채, 김윤혜, 우다비, 승희 등 출연자들이 판소리, 춤, 무대 연기 등을 직접 해낸다. 무려 3년간 연습해 얻은 12부작이라니, 어찌 귀하지 않을쏘냐!
이런 세계가 있었던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여성국극은 1950년대를 풍미하다 1960년대에 급격히 퇴조한 대중예술이다. 여성국극의 진귀한 세계는 여성학이나 공연 연구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뿐, 오랫동안 잊히었다. 2013년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의 개봉으로, 여성국극의 역사가 비로소 조명되었다. 문화기획집단 ‘영희야놀자’가 2007년부터 기획하여 2011년에 완성한 이 다큐멘터리에는 국극배우 조금앵, 김진진, 박미숙, 허숙자, 김혜리와 여성국극을 따라다니던 여성 팬들의 생생한 회고담이 담겨 있다.
무대 공연, 드라마가 웹툰 갈증 풀어줘
이들은 70~80대 할머니가 되어서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정기적으로 만나는 여성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막내 배우였던 67살 이옥천은 여전히 후진을 양성하려 애쓰고 있었다. 남역 배우들은 씩씩함으로 인기를 끌고, 무대 밖에서도 남장을 당연하게 여겼다. 신사복을 입은 여배우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 관객이 하객들과 함께 결혼식 사진을 찍었다. 배우들은 가족과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집을 나와 국극에 인생을 바치고, 팬들은 집안 패물을 훔쳐 배우에게 주고, 장사해서 번 돈 2억원을 국극단에 쏟아부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체 여성국극이 뭐길래? 이토록 퀴어-페미니즘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1950년대에 이미 존재했었고, 그것이 공공연한 대중문화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싹 없었던 일인 양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헐, 이럴 수가!
다큐멘터리에 충격을 받고 보니, 여성국극 자료로 작업하는 미술작가도 눈에 띈다. 정은영 작가는 2009년부터 여성국극과 관련한 영상, 아카이브, 설치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이후 여성국극 프로젝트로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받고, 2019년 베네치아(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를 하였다.
하지만 여성국극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린 첫 콘텐츠로는 2019년 웹툰 ‘정년이’가 꼽힐 것이다. 서이레 글작가와 나몬 그림작가의 ‘정년이’는 2022년까지 포털에 연재되었다. 서이레 작가는 대학 시절 여성국극단에 대한 논문을 접하고, 이후 정은영 작가의 프로젝트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조사하여, 탄탄한 서사와 인물을 구축하였다. 웹툰 ‘정년이’는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의 작품답게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과감하게 담았다. 주인공이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지역성까지 담아 소수자성을 드러낸다. 그림체도 시원하여 작품의 성격과 잘 맞는다.
‘정년이’는 최고의 웹툰이지만, 아쉬움이 컸다. 국극 무대를 보고 들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2023년에 ‘정년이’가 국립창극단의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려면 드라마로 탄생해야 했다. 애초 원작자가 정년이를 그릴 때 영화 ‘아가씨’의 숙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숙희를 연기한 김태리가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문옥경 역할의 정은채도 신이 내린 캐스팅이다. 남장이 잘 어울리는 광채 나는 얼굴에 냉소적인 기운까지. 과연 왕자님이다.
여성국극 1세대 배우 조영숙의 목소리(“막이 오르는구나~”)로 소개하는 오프닝과 함께 등장하는 배우들은 대역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판소리, 춤, 무대 연기 등이 출중하다. 드라마는 극중극의 사이즈를 키워, 드라마를 보는 동안 국극을 통째로 감상하는 듯한 재미를 준다. 시청자들은 오랜만에 공연을 감상하고 판소리를 듣는 감흥을 느끼며 황홀경에 젖는다. 특히 판소리가 엄청난 중독성을 지닌다. 과연 고전은 힘이 세다.
1950년대 분위기 전혀 다르게 조명
드라마 ‘정년이’가 놀라운 점은 단지 여성국극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195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전혀 다르게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1950년대는 주로 전쟁의 상흔, 가난, 부패 등이 강조되었다. 그런데 드라마 ‘정년이’가 보여주는 1950년대는 전쟁의 상흔은 있지만, 이상한 활기가 어른거린다. 여성국극에 대한 팬덤이 있었고, 영화와 텔레비전이 막 태동하는 분위기다. ‘촌 가시나’가 별천지를 보고서, 돈을 가마니로 벌겠다는 꿈을 꾸고, 스타가 되겠다며 집을 나와 상경한다. 재능을 믿고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있고, 하루아침에 스타일이 확 바뀐 채 ‘스테키’를 썰기도 한다. 국가 재건기이자 개인의 욕망이 움트고 발현하는 시기로 그린 것이다.
전쟁에 대한 관점도 다르다. 그동안 전쟁은 젠더적으로 재현되었다. 남성은 군인으로, 여성은 희생자나 어머니로 그려진다. 가령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참전한 두 아들, 억울하게 죽은 여자, ‘말 못 하는’ 어머니로 구성된다. 그런데 정년이 상이용사 위문 자리에 갔을 때, 참전했던 여군을 두명이나 만난다.
1950년대에 남편의 외도를 참지 않고 이혼한 패트리샤가 무대를 잃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정년이 무대 위에서 꼭두각시처럼 노래 부르지 않겠다며 대상화된 여성성을 거부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정년과 경쟁자 영서가 둘 다 모녀 관계를 중시하고,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여성서사의 측면에서 짚을 만하다. ‘서편제’에서는 아버지가 딸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진정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 한다.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데, 이런 체념적이고 피학적이며 가부장적인 서사와 비교해보면 ‘정년이’가 얼마나 진취적인 여성서사인지 알 수 있다.
드라마 ‘정년이’가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정년의 ‘사생팬’이자 연인이 된 권부용을 삭제한 것이다. 그로 인해 퀴어성이 반감되고, 정년과 영서의 경쟁 구도에 방점이 찍히다 보니, 무난한 ‘대장금’의 서사를 반복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불만스러울 순 있지만, 권부용과의 로맨스는 홍주란에게 옮겨갔다. 혹자는 정년이 성대를 혹사한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직전까지 다른 배우와의 호흡을 중시하게 되었다던 정년이 왜 그토록 혼자 연습에 폭주했는지 모르겠다고? 원작에서는 ‘소리꾼의 자질이 없다’는 임진 선생의 말 때문이었지만, 드라마에선 홍주란의 배신과 홍주란의 질책 때문이다. (물론 홍주란이 그리한 것은 정년에 대한 동성애적 감정을 스스로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여자친구 때문에 탈영한 군인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 순간 정년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바 없다. 국극단에서 처음 쫓겨난 일이나, 폭주하여 성대를 망친 일까지 홍주란이 발단인데, 홍주란이 일종의 팜파탈인 셈이다.
‘여성들만의 사이비 예술’로 헐뜯겨
여성국극은 왜 그토록 짧은 기간 흥하고 망한 것일까. 정수진의 ‘여성국극은 왜 무형문화재가 될 수 없었는가?’(2019, 아키스브리핑 제204호)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가 여러명이 나눠 부르는 창극으로 바뀌고, 해방 후 국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국극은 남성 위주였고, 판소리를 제외한 연기, 대사, 율동은 예술적 완성도가 부족하였다. 1948년에 임춘앵, 박록주 등 30여명의 여성 국악인이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했다. 이들의 공연은 달랐다.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영향을 받아, 노래, 연기, 춤, 칼싸움, 반주 등을 통합시키고, 화려한 의상, 무대장치, 이국적 미장센을 활용하여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종합예술로 만들었다. 상고시대를 배경으로 민족의 상상적 유토피아를 구현하고, 외국 작품을 번안하기도 했다. 주제는 낭만적 사랑이었는데, 거침없는 애정 표현을 보여주며 관능을 자극했다. 남장 여성이 맡은 주인공은 영웅의 면모를 지녔으나, 사랑하는 여성에게는 순정을 바치는 꽃미남으로, 이성애적 욕망과 동성애적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인기를 끌던 여성국극이 급속히 쇠퇴한 이유는 뭘까. 영화와 텔레비전이 밀려든 것도 한 이유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판소리와 창극은 살아남았다. 어째서 여성국극은 존재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소멸한 걸까. 가장 큰 이유로 박정희 정권에서 무형문화재 제도가 법제화될 때, 여성국극은 기형적인 통속 문화로 치부되어 보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탓이다. 여기에는 젠더 정치가 작동하였다. 여성국극의 인기에 밀려 혼성창극단을 접어야 했던 김연수 명창이 1962년 국립국극단이 창단되자 초대 단장이 되었다. 각종 협회는 남성들로 채워졌고, 문화재 지정 논의 결정권자 중 여성은 없었다. 남성 소리꾼을 비롯한 제도권 문화인들은 여성국극을 ‘여성들만의 사이비 예술’로 헐뜯었다. ‘순수한 원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적 지원과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충분히 알 것 같다. 오랫동안 여성들이 창작하거나 향유하는 문화는 평가절하를 겪지 않았던가. ‘여류작가의 소설’ ‘빠순이 문화’ ‘여자들이나 좋아하는 음악’ 등등.
물론 그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인재 풀이 좁아서 후진 양성에 실패하였고, 군소 극단이 난립하면서 실력보다 아이돌화를 추구한 것이 큰 패착이었다. 또한 극단의 운영, 기획, 제작, 돈 관리 등을 남성에게 맡겨 횡령 등의 사고가 빈발했다. 드라마 ‘정년이’에는 이러한 난맥상이 배경 서사로 잘 그려져 있다.
여성국극을 둘러싼 젠더 정치를 보고 있자니, 다큐멘터리 ‘코파 71’이 떠오른다. 1971년 멕시코에서 11만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6개 국가의 선수들이 겨루는 여자 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50년이 넘도록 국제축구연맹(FIFA)이 공식 대회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잊힌 역사가 되었다. 여성이 이룬 성취는 적극적인 무시와 침묵으로 마치 없었던 일이 되곤 한다. 망각의 젠더 정치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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