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 투어리즘’…“여행자가 ‘지역다움’ 즐길 수 있게” [ESC]
소수가 숙소에서 가까운 곳 여행
지역과 상생…공간·음식도 현지화
창립 110돌 방한 호시노 요시하루
4대째 가업, 세계 68개 호텔 운영
일본 여성 작가 하야시 후미코(1903~1951)는 가난에 굴복하지 않고 잡일꾼, 여공, 카페 직원 등을 전전하며 ‘방랑기’를 출간해 1930년대 대공황에도 60만부 이상 팔린 작가가 됐다. 그의 삶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에 ‘여행’이 있다. 그가 쓴 여행기엔 홀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며 겪었던 기적 같은 이야기가 넘친다. ‘나 홀로’ 여행에서 용기를 얻고, 그 여행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인류애를 경험한 그는 여행이 단지 여가를 즐기는 ‘놀이’가 아니라 삶을 이끈 스승이라고 여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도 여행은 삶을 점검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여행에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코로나19 사태 이후 여행지 선택 못지않게 숙박 공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디서 묵을 것이냐’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인 이가 있었다. ‘호시노 리조트 그룹’(이하 리조트)의 대표 호시노 요시하루(64)가 그 주인공이다. 리조트는 1914년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설립된 료칸을 시작으로 현재 4대째 가업을 잇는 일본 대표 호텔·리조트 브랜드다. 일본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68개 숙박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 직격탄에도 고용 늘려
호시노 대표는 4년 전 일본 호텔 대부분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릴 때 ‘마이크로 투어리즘’에 시선을 돌렸다. 감원을 선택하지 않고, 데이터를 활용한 아이티(IT) 기술 접목과 고용을 늘려 브랜드를 개조했다. ‘마이크로 투어리즘’은 대규모 인원이 유명 관광지를 찾는 ‘매크로 투어리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수가 거주지에서 멀지 않은 곳을 여행하는 활동을 말한다. 그는 철저하게 지역과 상생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호텔 공간 구성과 체험, 식음료 등을 지역에 맞게 개발하고 지역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리조트가 운영하는 호텔 체인 중 하나인 도시 관광호텔 ‘오모’(OMO) 직원들은 지역 맛집을 조사해 여행객들에게 지도와 함께 추천한다. 향토음식 강의도 한다. 리조트를 여행의 목적지로 삼는 관광객이 늘기 시작하자 그와 직원들은 어두운 코로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의 심각한 지방인구 소멸문제 해결에도 일조했다고 자부한다. 한국도 지방 인구 감소가 심각한 수준이다. 지자체들은 관광을 통해 체류 인구를 늘려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지난달 7일 창립 110돌을 맞아 방한한 그를 여행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급 숙박시설 호시노야와 온천 료칸 카이, 가족형 리조트 리조나레, 도시 관광호텔 오모, 젊은 세대를 겨냥한 베브까지 다양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이 지역과 상생·협업이 원칙이라고 알고 있다. 긍정적인 결과를 내기엔 쉽지 않은 원칙이다.
“고용 발생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 지역과 상생하기 위해선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우선 오랫동안 (호텔이 들어선 후 생길 긍정적인 변화 등을) 설명한다. ‘호시노야 오키나와’만 해도 7년이 걸렸다. 내가 직접 설명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대표가 나서면 신뢰도가 올라간다. 지역민을 천천히 설득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기본 설계도 지역민과 함께 만든다. 우리가 한 약속이나 말했던 것을 반드시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방법이다.”
―숙박 시설이 지방인구 소멸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
“일본 지방 경제의 중심은 제조업이었다. 1980~90년대 일본 제조업의 거점이 중국이나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국가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일자리가 줄고 지역 인구도 주는 악순환에 빠졌다. 경제를 부흥하기 위해 새 산업이 필요했다. (관광에 중요한 숙박시설을 포함한) 관광산업이 문제를 100% 해결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자리 창출, 소비 증대, 지역 경제 활성화 등 경제를 지탱해주는 산업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가 좋은 예다. 올해 전국에서 인구가 늘어난 지역 10곳을 꼽았는데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가 있는 지역이 2위로 뽑혔다. 이전엔 1위였다. 지난 3년간 인구가 꾸준히 는 곳이다. 최근에도 14.13%나 증가했다. 10위권 안에 든 지역 모두 관광이 활성화된 곳들이다.”
홋카이도 신치토세공항에서 차로 약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는 거대한 히다카산맥의 한 자락인 도마무산(1293m) 아래 있다. ‘더 타워’ ‘리조나레’ 등 두 구역으로 나뉜 리조트는 스키장, 다양한 종류의 식음료 업장,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승마 체험, 온수풀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한국에선 구름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운카이(구름바다) 테라스’와 일명 ‘파우더 스노우’로 불리는 가루눈이 알려져 있다.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는 놀 거리가 많은 여행지 같다. 숙박시설 자체가 여행 콘텐츠가 될 수 있나?
“일로 출장 다니는 이들은 주로 비스니스호텔을 이용한다. 잠만 자면 충분한 공간이다. 하지만 여행자는 관광뿐 아니라 리조트나 호텔에서 즐길 거리가 필요하다. 가족 단위로 오는 이도 많기에 체류 기간 동안 더 많이 즐길 거리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지역다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지역의 문화라든지, 향토 음식이라든지, 그런 다양한 문화를 액티비티를 통해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글로벌 호텔 체인들에 견줘 호시노야 리조트 그룹의 경쟁력이 궁금하다.
“글로벌 호텔들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 맞는 서비스와 미국에서 정한 기준을 일본이나 한국에도 적용한다. 우리는 본사가 서비스나 기준을 정하지 않는다. 각 지역에 있는 스태프들이 가장 ‘지역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서비스는 현지 직원들이 낸 아이디어로 정한다. 그들의 창의력이 지역의 강점을 살려내는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는 것이다. 가장 ‘지역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란 게 우리의 장점이다.”
“AI 시대, 여행 수요 늘 것”
직원들의 창의력 발휘는 리조트의 독특한 조직문화가 일조한다는 평이다. 부장, 차장, 과장, 대리 같은 직급 체계가 없다. 팀원들이 뽑은 팀장만 있다. 대표 방도, 전용 차량도 없다. 상하관계에선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어렵다는 판단에서 만든 구조라고 한다. 향후 한국인 채용도 늘릴 예정이다. 이미 지난해에 견줘 1.5배 고용이 이뤄진 상태다. 직원들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다. 지난 6~7월 리조트를 찾은 한국 여행객 수는 지난해 견줘 138% 증가했다. 소도시에 있는 브랜드 예약도 63% 늘었다.
―본격적인 에이아이(AI) 시대에 진입했다.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기술로 여행 가지 않고도 여행의 즐거움을 즐기는 때가 곧 온다는 과학자도 있다. 이런 이유로 여행 산업은 미래가 없다고 보는 이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광에 대한 수요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증강현실 기술이 발전해서 집에서도 여행지와 관련된 정보를 (더 생생하고)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사람들은 집에서 영상으로만 본 여행의 즐거움을 직접 더 체험하고 싶어진다. 오히려 관광 수요는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여행 수요는 실제 더 늘었다. 전달력이 더 발전했기 때문이다. 먹는 것, 맛보는 것들은 여행을 직접 가지 않으면 즐길 수가 없다.”
―기후위기 시대다. 홍수나 태풍 등 여행지에서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를 겪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난해 괌은 슈퍼 태풍 마와르때문에 리조트나 호텔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 친화적인 호텔 설립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최근 일본 호텔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일본에선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데, 내진 설계와 관련된 법률이 생겼다. 지진에 강한 호텔이나 숙박 시설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한국 진출 계획이 있는가?
“우리는 호텔 운영 회사이기 때문에 한국 진출을 원하는 투자자나 개발 회사가 있다면 협업을 통해 하고 싶다.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다.”
리조트는 호텔을 소유하지 않고 운영만 전담하는 기업이다. 낡은 료칸을 개조하거나 기획·신축해 운영한다. 운영하는 68개 호텔의 전체 보유 지분은 5%가 안 될 정도로 적다고 한다. 호시노 대표의 운영 방식은 주목받았다. 2016년 도쿄에 도심형 료칸을 선보였다. 료칸은 흔히 물 좋고 산 좋은 지방에 있기 마련이다. 파격적인 행보라는 평을 들었다. 버블경제 붕괴 후에도 문 닫은 지역의 료칸과 호텔을 재생사업을 통해 탈바꿈시켰다. 브랜드별로 서비스와 가격도 차이를 뒀다. 타깃층에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2030세대가 주고객증인 ‘베브’에선 체크아웃 시간이나 조식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여행 해야 여행자의 마음 알 수 있어”
―리조트는 4대째 가업을 잇는 기업이다. 대학에서 전공도 경제학인데, 가업을 잇는 일이 싫지 않았는가?
“태어날 때부터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다. 왜냐하면 5살, 6살 때 기억인데, 할아버지가 나를 소개할 때 이름인 ‘요시하루’ 대신 ‘4대째입니다’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얘기를 자주 듣다 보니,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당연히 4대이고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명 같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경영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연을 아주 사랑하시는 이였다. 특히 야생 조류에 애정이 많았다.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리조트의 중요한 경영 이념이다.”
―한국은 자주 오나? 좋아하는 한식은 있나?
“자주 오고 싶다. 1년에 80일 이상 스키를 타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눈이 없는 곳은 출장을 자주 안 가는 편이다.(웃음) 스키가 멘털을 관리하는 도구이자 건강 비결이다. 지금까지는 1년에 80일 정도는 탔지만 100일 정도도 스키를 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웃음) 한식의 경우, 일본에서 먹은 한국 음식과 이곳에서 먹은 음식이 너무 달랐다. 반찬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게 진짜 한국 요리구나’라고 알게 됐다.”
―숙박시설을 열고 싶은 이들에게 해주고 조언은?
“여행을 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여행을 해야지 여행자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서비스가 좋은, 질 좋은 숙박 시설은 이런 거구나’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세계 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많이 하고, 그곳을 많이 느껴보길 바란다.”
그는 여행을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뭔가 발견하고 사람들을 만나 뜻하지 않은 해프닝을 겪으면서 배우는 게 여행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리조트 누리집은 불친절하다. 상세한 서비스 설명이 적다. “‘이것을 알면 이렇게 될 겁니다’라는 정보를 가능한 전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곳에 가서 느끼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만나야만 진짜 어드벤처죠. 지역의 진짜 매력은 숨겨뒀다고 할까요.” 그의 여행 철학은 하야시 후미코와 결을 같이한다. 하야시가 “계획대로 잘 되지 않는” 일정에서 길을 찾았듯이 그의 리조트는 “계획되지 않는”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된 여행객이 길을 찾도록 준비를 마쳤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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