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사회심리학] 혼자 이겨내는 고난이 있을까
혼자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이 존재할까. 불평등, 차별, 가난, 극심한 경쟁과 물질주의, 질병 등 삶에서 큼지막한 고통을 차지하는 문제의 다수가 쉽게 바꿀 수 없는 요소들, 예를 들어 태어난 가정 환경, 양육자의 소득 및 교육 수준, 사회적 구조, 타고난 건강함 등에 의해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고려해보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지 않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동물인 우리들의 건강과 행복에는 '사회적 지지', 주변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 예를 들어 다양한 질병이나 우울증 같은 경우에도 사회적 지지의 존재 여부에 따라 기존 건강상태와 상관 없이 예후가 다르게 나타난다.
한 메타분석 결과에 따르면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관상동맥 심장질환 위험을 29% 증가시키고 뇌졸중 위험을 32%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우울증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에서 다수의 거절과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다. 수십년 간의 행복 연구가 내린 결론 또한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좋은 인간관계'의 여부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간단해 보이는 문제도 속에는 항상 다양한 사회적, 관계적 층계의 문제들이 엮여 있어서 실제로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고 나니 사람이 스스로 온전히 이겨낼 수 있는 문제가 과연 존재할까 싶은 의문이 든다. 다소 극단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순전히 환상이라고 보는 시각들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리가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굵직한 문제들은 내 손 안에서 굴리기에는 이미 너무 크고 복잡하다.
자수성가하여 가난을 이겨냈다고 하는 흔한 스토리들도 사실은 가난 자체를 해결했다기보다 혼자 '탈출'한 것에 불과하고 여기에서도 좋은 운과 좋은 사람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결과가 좋지 않았던 일은 외적 귀인(운이 나빴음)을 하는 반면 좋았던 일은 내적 귀인(자신의 능력과 노력 덕분)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스스로는 지각하지 못할지언정 분명히 존재했을 주변의 도움을 무시한 채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돕기는 커녕 "나는 혼자 해냈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비난을 던지고 만다. 정말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해낸 것이든 아니면 도움이 있었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이든 고난을 혼자 이겨내는 데에도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하는 큰 부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 예를 들어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도 집에 에너지 넘치는 아이가 있다거나 혹은 우울증이 심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고 하면 방이 지저분하다는 문제는 표면에 드러난 증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 훨씬 큰 진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최근 노숙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 인식들이 도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접했다. 여기에서도 노숙인들이 그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가 단순히 '게으름' 같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원인이 이보다 더 복잡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에 비해 노숙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도움 행동에 참여할 의향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들이 특히 사랑한다는 소설 '데미안'을 보면 초반부에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그렇지 않은 환경에 처한 다른 소년들을 바라보며 동일한 시공간에 서로 완전히 다른, 빛과 어둠의 세계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함을 잘 보여준다.
조금 다르지만 나 역시 청소년기에 가출의 유혹에 잠시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더 운이 나빴거나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종이 한 장 차이 같은 작은 요소들이 모여서 커다란 나비효과를 만드는 법이다.
공감하고 말고의 여부를 떠나서 노숙인들 역시 '게으름'보다는 분명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각자의 사정에 인해 그런 상황에 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사정이 복잡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사정도 비슷하게 또는 더 많이 복잡한 법이니까.
Tausen, B. M. & Fossum, J. (2024). Empathy helps, Dehumanization harms: Beliefs about the causes of homelessness are (in)directly related to intentions to help and harm those who are unhoused. Journal of Applied Social Psychology. Online first publication https://doi.org/10.1111/jasp.13050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박진영 심리학 칼럼니스트 parkjy02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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