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고 철수하고...그 많던 '수제맥주'는 다 어디로 갔나
위기의 수제맥주 업계
한때 열풍 일으키며 블루오션 각광
한국에 수제맥주 열풍 일으키며 대기업들도 시장 진출
올해 들어 차갑게 식어버린 인기
수제맥주 사업 철수 이어져
기존 업체들도 음료 등으로 사업 다각화
[비즈니스 포커스]
‘화끈한 음식, 따분한 맥주(fiery food, boring beer).’
2012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이 같은 제목으로 한국 맥주에 ‘돌직구’를 던진 칼럼이 게재됐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당시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하던 다니엘 튜더. 과거 업무차 북한에서 머무르기도 했었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칼럼에서 “한국 맥주는 북한의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고 혹평했다.
그가 쓴 칼럼은 국내에서도 널리 퍼졌으며 주류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국 맥주 맛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일 만큼 화제였다.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도 파격적이었다. 2013년 돌연 회사를 그만둔 그는 ‘북한보다 맛있는 한국 맥주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맥줏집 사장으로 변신했다.
한국인 동업자 두 명과 함께 이태원 경리단길에 ‘더 부스(The Booth)’라는 간판을 내걸고 피자와 함께 자신이 개발한 레시피로 독특한 맛의 맥주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 일명 ‘수제맥주’다.
예상은 적중했다. 톡 쏘는 탄산 맛이 강한 라거 맥주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에게 깊은 맛과 풍미를 더한 수제맥주는 신세계였다. 더부스 앞에는 연일 긴 대기줄이 늘어설 만큼 반응이 뜨거웠으며 사업도 크게 번창한다.
기존 가게를 확장한 것도 모자라 계속 새 점포를 냈다. 또 한국에 직접 맥주 양조장까지 지어 다양한 맥주를 유통채널에서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더부스는 단숨에 국내 맥주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국내 맥주 시장의 트렌드까지 바꿔놓기에 이른다.
더부스의 성공을 본 수많은 이들이 수제맥주를 아이템 삼아 창업에 뛰어들었으며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들까지 이 시장에 진출했다. 유통채널에는 하루가 멀게 수제맥주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며 한국 주류시장에는 ‘수제맥주 붐’이 일었다. 제주맥주, 세븐브로이 등은 폭발적인 수제맥주 인기에 힘입어 기업공개(IPO)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처럼 한동안 뜨거웠던 수제맥주 업계의 분위기가 최근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영원할 것 같았던 수제맥주의 인기가 급락하며 관련 기업들도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모습이다.
영세한 수제맥주 브랜드들의 폐업 소식이 이어지고 있으며 수제맥주를 앞세워 증시 입성에 성공했던 기업들도 실적이 고꾸라지며 적자의 늪에 허덕이고 있다. 야심차게 이 시장에 진출했던 주류 대기업들도 지금은 이 시장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으로 확인됐다. 이대로 가다간 다 망한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현재 수제맥주 시장의 상황은 좋지 않다.
‘블루오션’ 평가 받으며 대기업도 눈독
1세대 업체이자 수제맥주 인기의 ‘진원지’였던 더부스만 보더라도 지금은 사업이 크게 기울었다.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한때 9개까지 확장했던 점포 수는 현재 2개로 줄었다.
유통채널에서 판매 중인 수제맥주의 판매량도 급감하며 최근에는 경기도에서 운영하던 양조장의 문까지 닫은 것으로 전해진다. 더부스 관계자는 “창업자 중 한 명이었던 다니엘 튜더도 지분은 보유하고 있으나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며 “사실상 회사를 떠났다”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살펴본 결과 현재 그는 작가 활동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더부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수제맥주 브랜드 ‘바이젠하우스’의 제조사 금강브루어리 등 수많은 업체들이 경영난으로 인해 최근 폐업하기도 했다.
수제맥주 시장이 예상했던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자 이 시장에 발을 내디뎠던 거대 주류기업들도 모두 관련 사업을 중단했다. 오비맥주를 예로 들 수 있다. 오비맥주는 2021년 내부에 ‘코리아 브루어스 콜렉티브(Korea Brewers Collective·KBC)’라는 수제맥주 협업 전문 브랜드를 출범하고 여러 기업들과 협업해 수제맥주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비맥주는 카스, 한맥 외에도 버드와이저, 스텔라아르투아 같은 다양한 수입맥주를 판매하는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이런 오비맥주가 수제맥주사업을 키울 경우 자칫하다간 수입맥주 매출이 줄어들 수 있어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KBC를 론칭한 것은 수제맥주 시장의 밝은 전망 때문이었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2014년만 해도 160억원에 불과했던 수제맥주 시장 규모는 2021년 2000억원을 기록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 가더라도 냉장 코너가 모두 수제맥주로 채워질 정도였다.
소비자 니즈가 급증하자 오비맥주도 이 시장을 가만히 두고 볼 수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심차게 KBC를 출범했으나 이 조직은 올해 초 해체되고 말았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수제맥주의 인기가 급격하게 떨어져 더 이상 KBC를 운영할 이유가 없어졌다”며 “수제맥주 시장이 이렇게 빠르게 침체될지 예상 못했다”고 했다.
수많은 제품 쏟아지며 소비자 외면
크러시, 클라우드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롯데칠성도 마찬가지다. 수제맥주가 큰 인기를 끌면서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자 이 회사는 2021년 일부 공장을 수제맥주 전용 공장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여러 수제업체들에 돈을 받고 각 회사의 제품을 위탁생산(OEM)하며 수익을 냈지만 수제맥주를 찾는 사람들이 줄면서 이 사업도 멈췄다.
수제맥주 업체와 협업상품을 만들며 ‘수제맥주 전성기’를 이끌었던 편의점들도 더 이상 수제맥주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는다.
주요 수제맥주 업체들의 실적에서도 업계에 드리운 먹구름이 심상치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워낙 영세한 업체들이 많아 대부분의 수제맥주 업체들의 실적은 공개되지 않는다. 자사의 실적을 공개하는 업체들은 그나마 규모가 큰 기업들인데 이들 대부분이 매출이 꺾였으며 영업손실을 기록 중이다.
업계를 이끌어왔던 제주맥주와 세븐브로이만 보더라도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크게 감소한 상태다. 결국 제주맥주는 올해 초 매각됐으며 세븐브로이는 ‘종합음료기업’이라는 새 비전을 내놓고 탄산음료와 같은 수제맥주 외 제품들을 내놓으며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잘나가던 수제맥주가 빠르게 외면받게 된 원인으로는 너무 많은 제품들이 시장에 쏟아진 것이 꼽힌다.
특히 2020년 세븐브로이와 편의점 CU, 대한제분이 함께 만든 ‘곰표맥주’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치약부터 구두약까지 각종 브랜드와 협업한 수제맥주가 쏟아져나왔다.
문제는 이런 제품들이 수제맥주의 강점인 다양한 맛과 향을 구현하는 것 대신 색다른 브랜드와의 협업이나 이색적인 디자인 등 시각적 요소에만 더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이다.
맛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상표나 디자인만 다른 제품이 계속 나오면서 수제맥주에 대한 소비자의 피로감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곰표맥주가 워낙 대박을 치다 보니 수제맥주 업체들이 비슷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몰두했으며 맛보다는 디자인을 중요시하게 됐다”고 전했다.
주류시장의 유행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수제맥주뿐만이 아니다. 와인이나 위스키도 2~3년 큰 인기를 끌다 시들해졌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주류 시장의 트렌드 변화가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다”며 “현재는 하이볼 또는 막걸리가 대세로 떠오른 모습인데 이 또한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예상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런 흐름에 따라 침체에 빠진 수제맥주가 언젠가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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