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버리려거든 통도사로 보내시오…“책들한테는 절이 최고 안전”
책의 오디세이 ⓷ 영축의 도서관
폐기 장서 구조하는 ‘생명 은인’
조계종 성파 종정, 2018년부터 통도사에 ‘책 무한대 모으기’
도서관서 버려진 책들과 퇴임 교수 책 70만권 ‘올 곳’ 마련
“책 지키는 것도 일종의 호국…영축산 전체 도서관 되는 꿈꿔”
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너른 사찰 땅의 한쪽 모퉁이에 ‘그곳’이 있었다.
왼쪽은 “닥밭”이었다. “올봄 6천평 밭에 심은 닥들이 풀과 더불어 자라 풀밭이 됐”지만 “80%는 살아남았”다. 그 닥나무로 그는 직접 한지를 떴다. 장인에게 제조법을 배우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전통 한지를 복원했다.
닥밭 오른쪽에서 푸른 닥나무만큼이나 푸른색의 ‘하우스’가 울창했다. 밭을 밀고 다진 터에 커다란 뼈대를 세우고 초록색 덮개를 씌웠다. 하우스 문을 열면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한 방문객)이 펼쳐졌다. 사람 키의 다섯배쯤 되는 책장들이 하우스 안에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 너의 자리는 없다’며 전국에서 종이책들을 추방할 때 그곳은 ‘언제든 너의 자리는 여기’라며 팔을 벌렸다. 스님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이리 와봐요.”
버려지는 책들을 초대
산은 본래의 이름을 잃고 인도에서 따온 이름으로 불렸다.
석가모니가 법화경과 반야심경을 설법한 고대 마가다국(현재 비하르주 라지기르)의 산이 부처의 성지를 흠모하는 한반도 곳곳의 산들에 이름을 빌려줬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원동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상북면에 줄기를 뻗은 1081m 높이의 산도 그 이름 ‘영축산’이었다.
그 산 아래서 그 절이 단풍에 덮이고 있었다.
지난 3일 오후 산사는 사람들로 치일 만큼 붐볐다. 신발을 벗은 불자들이 절의 ‘금강계단’에 무릎을 꿇고 배를 올렸다. 단풍을 찾아온 시민들도 신앙과 무관하게 맨발로 돌바닥을 밟으며 주위를 돌았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戒壇, 불교에서 계를 수여하는 의례 공간)을 통과하며 도를 얻고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믿음은 영축산에 안긴 ‘불보(佛寶, 부처의 사리) 사찰’ 통도사의 근간이었다.
통도사(경남 양산시 하북면)엔 20여개의 경내 암자가 있었다. ‘계단’을 벗어나 산길을 1.5㎞쯤 따라가면 “부처님 성지인 영축산을 올려다보며 ‘통만법 도중생’(通萬法 度衆生, ‘만법을 통달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통도사 이름의 유래)을 품은 사찰에서 태어난(출가한) 데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스님의 거처가 나왔다. 1960년 통도사에서 사미계(구족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기 전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은 스님은 1985년 주지 임기를 마친 뒤부터 서운암에서 지냈다.
성파(85).
‘성품 성’(性)에 ‘언덕 파’(坡). 스승 월하 스님이 내린 법명을 그는 “스승이 지어주셨으니 지어주신 대로 그저 써왔”다. “별 해석 없이 그냥 ‘성파로 하라’며 주신 이름”에 그가 “나름대로 해석을 붙였”다.
“‘성불했다’는 말이나 ‘견성(見性)했다’는 말이나 같거든요. 견성이 부처를 봤다는 말이에요. 그 ‘성’에 ‘언덕’을 붙이셨거든. ‘성품의 언덕이다’ 이거라. 성품에도 언덕이 있어야 기댄다고. 성불에 가까워지라고 성파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그 정도밖엔 해석이 안 돼요.”
통도사 주지(1956년)와 방장(1984년, 불교의 종합수도원 ‘총림’의 최고 책임자)을 거쳐 조계종 종정(1994년·제9대)에 추대된 스승처럼 성파 스님도 1982년, 2018년, 2021년 각각 그 역할을 맡았다. 그는 현재 제15대 종정 임기(5년에 1차례 중임 가능) 중 만 3년을 앞두고 있다. 총무원장이 조계종의 종무행정을 대표한다면 종정은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종헌 제6장 제19조)를 가졌다. 조계종 대표 선승인 효봉(1대), 청담(2대), 성철(6·7대) 스님 등이 역대 종정을 지냈다.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전부터예요.”
이판(수행)과 사판(행정)을 겸비했다고 평가받는 성파 스님은 전통 한지 제작뿐 아니라 직접 재배한 콩으로 된장과 간장을 담갔다. 서운암 주변에 야생화 단지를 가꿔 들꽃 축제를 열었고, 도자기 기술을 익혀 불상 3천개와 16만 도자대장경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수행과 일을 별개로 보지 않았고 둘과 공부를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그 마음으로 통도사로 불러들이는 것이 책이었다. 책이지만 잉크 냄새 신선한 새 책은 아니었다. 먼지 냄새 밴 버려질 운명의 책들이 그의 초대를 받고 통도사로 왔다.
―계기가 있었을까요?
“내가 1970년대 후반부터 장독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즈음 아파트 붐이 일었잖아요. 주택에 살던 사람이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내놓은 항아리들이 길가에서 뒹굴다 깨져버리는 거라. (뜻대로 안 됐지만) 당시 옹기 박물관을 만들려고 전국에서 옹기를 수집했어요. 쌀 한섬은 들어가는 크기(직접 담근 간장·된장 보관)에 만든 지 50년 이상 된 것들(납 성분이 함유된 광명단을 유약 대신 발랐던 일제강점기 시절 옹기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로만. 도자기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 가치가 천차만별이지만 옹기는 상놈 집이나 고관대작, 궁궐의 것들이나 똑같거든. 옹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생활유산이라고 본 거예요. 책 모으기도 마찬가지라.”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골동품만 문화유산이 아니에요. 장독이 서민부터 궁중 것까지 똑같듯 책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어릴 적엔 책이 굉장히 귀했어요. 왜정(일제강점기) 때는 책 한권을 온 동네 사람들이 베껴서 읽곤 했거든. 서당에서도 글 적힌 종이는 절대 휴지로 안 했습니다. 신문지든 뭐든 글자가 들어간 종이를 휴지로 쓰면 난리가 났어요. 글자를 무시하면 다음 생에 ‘무식보’(무식의 벌)를 받는다 그랬어요. 그 정도로 글과 책을 아꼈습니다. 이제 와서 쓸모없다고 버리는 건 말이 안 돼요.”
“살점을 떼내듯 아파”
성파 스님은 가난과 한국전쟁으로 초등학교 5학년 이후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신 서당에서 한자를 배워 십대 때부터 자유롭게 한시를 지었다. 한학 하는 어른들과 시회(詩會, 시를 짓고 토론하는 모임)에서 시를 겨루기도 했다. 어린 시절 공부를 향한 갈망과 절박함이 책을 모으는 마음에 “다 포함”돼 있었다.
“6·25 전쟁 때도 있는 집 자식들은 징집을 피하거나 외국으로 나가버렸어요. 내 고향이 면 단위 시골이었는데도 유지 집 아들은 군대 안 갔어요. 기피자인 줄 알아도 형사가 안 잡아. 전부 머슴 집 아들들이 군대 간 거라. 그러니 군대에서 쓰는 편지들은 대부분 대필·대독이었어요. 다들 가난 탓에 공부도 못 하고 책도 못 봤으니까.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일들이에요. 책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요.”
―갈 곳 없는 책들에게 ‘올 곳’을 마련하신 이유도 무관치 않겠네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농부로 치면 문전옥답이라. 부모가 굶으면서 자식들 가르쳤던 시대가 있었잖아요. 그 시절 배 곯아가며 사 모은 책들을 퇴임하는 교수들이 (연구실을 정리하면) 둘 곳이 없어 한탄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귀한 책들을 그냥 버리는 건 살점을 떼내는 것과 한가지라. 아픈 거라. 나라도 가져와야겠구나 했지요.”
서운암을 나온 자동차가 차밭을 지났다. 스님이 30여년 전 뿌린 씨앗에서 돋은 차나무들이었다. 스님은 ‘통도사 사적기’ 등의 기록을 토대로 국내 차의 역사가 통도사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을 학술적으로 입증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2021년엔 서운암에 차문화대학원을 개원했다. 차밭을 지난 자동차가 고불고불한 시골길을 따라 닥밭 옆 ‘하우스’에 닿았다. 차문화대학원 노성환 원장이 스님과 동행했다.
“이리 와봐요.”
스님을 따라 들어가자 넓이 320평에 높이 15m의 구조물 안에서 거대한 책장들이 솟아 있었다. 7열로 도열한 17단짜리 책꽂이는 10m가 넘었다. 꽂힌 책들보다 아직 꽂히지 못한 책들로 넘실거렸다. 서고라기보다 책 물류창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2018년 서운암 초입에 임시 서고를 만들면서 책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 자리에 유물 수장고를 짓게 되자 현재 위치로 서고를 옮겼다. 이사 전 통도사 스님들이 직접 책장을 짜서 서고에 넣었다.
―도서관조차 책을 버리는 요즘 절이 나서서 종이책을 모으는 이유가 있나요?
“조선시대 ‘사고’(史庫)를 생각했어요. 난리가 나도 왕조실록만큼은 피해가 없도록 안전한 곳에 사고를 만들고 절을 지어 지키게 했잖아요. 책에겐 절이 가장 안전한 곳이지. 돈 없는 사람은 책도 못 모아요. 장소가 없는데 어디 보관하겠어. 독지가가 나선다고 해도 후대엔 어찌 될지 몰라요. 장래를 보장받으려면 절이 최고라. 우리나라 문화재 80%가 불교 문화재잖아요. 절이 지켜주니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는 종이책 모으기를 호국불교와도 연결지었다.
“역사적으로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불교가 헌신적으로 나섰어요. 지금 시대엔 책을 지키는 일도 일종의 호국이겠다 생각했어요. 임진왜란 때처럼 승병이 들고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책도 문화유산이라고 보면 조그마한 공헌이나마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그렇게라도 지켜야 할 종이책의 쓸모가 있다면요?
“쓸모 있다 없다를 따지면 이 일 못 합니다. 나는 그런 계산 안 합니다. 필요가 있건 없건 폐기되는 현실이 안타까우면 보관하는 거예요. 통도사가 있는 한 그 책들은 지켜질 테니까. 모르죠. 계산 없이 모으다 보면 국내 책뿐 아니라 외국 어느 나라의 책도 통도사에만 남는 날이 올지도.”
‘속세’와는 정반대 장서 관리
“이리로는 못 나가겠네. 돌아가야겠어요.”
안내하던 스님의 길이 책으로 막혔다.
서고 입구뿐 아니라 책장과 책장 사이도 포장을 풀지 않은 책 상자들로 가득했다. 입고 속도를 정리 속도가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통로 하나만 남기고 책장 사이 모든 통로를 책들이 점령했다. “버릴 거면 통도사로 보내라”는 말에 의지해 통도사로 온 책들이 지금까지 70여만권이었다.
책장에 자리잡은 책들 중엔 ‘화엄경’ 등 불경과 불교서적이 많았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와 브리태니커 같은 백과사전도 보였다. 사회과학 서적들도 있었고 외국 원서들도 공간을 차지했다. “은퇴하는 학자들 책 위주로 먼저 정리해서” 전문 서적과 학술 서적들이 우선 눈에 띄었다. 한국 고전과 근현대 문학, 전통 신앙과 토속 음식, 향토 문화, 분야별 비평서와 학술 잡지 등이 저자 증정본과 섞여 있었다. “주로 입소문과 알음알음으로 온 책들”이었다.
서고 어딘가엔 노성환 원장(울산대 명예교수)의 책들도 있었다. “2021년 퇴임하면서 연구실에 있던 책들을 통도사로 옮겨왔”다. 장서 처리 방법을 고심하던 다른 대학교수들과 학회 원로들도 그의 권유에 따라 책을 보냈다. “그중엔 이미 고인이 되신 교수님의 유족이 기증한 한국 근대 시집 초판 등 희귀·귀중본들도 있”(노성환)었다.
책장 한편엔 기관들이 발간한 정책보고서와 자료집들도 자리했다. 수능과 자격증 수험서, 어학교재와 서비스직 실무지침서 등 다른 도서관에선 이미 폐기됐을 법한 책들도 있었다.
―통도사에서 받아주는 ‘책의 자격’이 있나요?
“그런 거 없습니다. 선별해서 받지 않아요. 일단은 전부 다 받습니다. 중복돼도 상관없어요. 모으는 일이 먼저라.”
사라지게 두느니 일단 받아놓고 뭘 남길지는 차차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폐기 직전 책들에게 통도사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공간 부족을 이유로 ‘정리’될 운명이던 도서관 장서들도 통도사에 와서 생명을 이었다. 경북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온 8만여권의 책이 학교 바코드를 그대로 달고 서고에 진열됐다. 지난 6월 도착한 옛 울산 중부도서관 책 17만3천권은 아직 상자 안에 있었다. 도서관 폐관(2018년) 뒤 다른 장소에 임시 보관돼 있던 24만권 중 4만8천권만 새로 개관(지난달 24일)하는 도서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갈 곳 잃은 책들을 받아줄 수 있냐는 문의가 통도사로 왔고 성파 스님은 환영했다.
‘구조 요청’을 수락했으나 끝내 살아남지 못한 27만권도 있었다. 학교의 ‘45만권 장서 폐기 방침’에 반대하던 울산대학교 인문대 교수들(② 45만권의 생사)이 폐기가 확정된 26만8천권을 살리기 위해 지난해 10월 통도사로 찾아왔다. 성파 스님은 서고를 보여주며 “얼마든지 보내시라”고 했으나 ‘운반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는 학교의 거부로 무산됐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받으실 계획이세요?
“한도는 없습니다. 무한대랄까. 어떤 경로로 오든 상한선 없이 받을 생각입니다. 곧 서고 두어개를 더 지을 계획이에요.”
책이 늘어나는 만큼 서고도 늘리면 된다는 발상은 공간에 맞춰 보관량을 결정하는 ‘속세’의 장서 관리법과는 정반대였다.
―한계를 두지 않으면 통도사도 언젠가 책을 버려야 하는 날이 올 수 있을 텐데요.
“하는 데까지 하는 거예요. 도서관 크기가 충분하냐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한테는 모으는 게 우선이라. 책이 있어야 도서관도 지을 거 아닙니까. 모아두면 무슨 수가 생겨도 생깁니다. 우리라고 보내오는 대로 다 받을 준비가 돼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나는 무조건 받으라 그래요. 선을 미리 그어둘 필요가 없어요. 내가 우겨대서 담당자들이 애 많이 먹는 거 알지만 내 역할은 일단 모으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놓고 가면 나머지는 다음 사람들이 할 겁니다.”
울산대 폐기 27만권 학교 거부로 못 와
“비닐하우스라고 시시하게 보면 안 돼요.”
옆 칸으로 넘어가기 위해 스님이 서고 맨 뒷벽과 책장 사이의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스님은 ‘제습’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서고 구조를 짰다. 공깃길을 열어 결로가 생기지 않도록 서고 천장을 15m로 높이 뺐다. 천장과 사방 벽 곳곳에 환풍기를 달아 공기 순환을 도왔다.
“책엔 습기가 제일 안 좋거든. 바람만 잘 돌면 책들도 괜찮습니다.”
원목으로 짠 책장의 받침대마다 중간을 파서 비운 것도 통풍을 중시하는 스님의 아이디어였다.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과제들이 없진 않았다. 서고에 쌓인 엄청난 양의 책들을 책장에 정리하는 일부터 ‘커다란 도전’이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엔 “비계를 설치해서 작업해야 하는데 비용만 5천만원 정도 들 것”(서고 담당 실무자)으로 예상됐다.
“문제들은 있지. 책을 분야별로 분류해야 하고 전산화도 해야 하고. 중복되는 책은 어떻게 할 거며 책의 가치는 어떻게 따질 건가. 아직은 손을 못 대고 있지만 때가 되면 다 해결됩니다. 인재는 많아요. 여기저기서 튀어나옵니다.” 추가 서고 외에 2층짜리 한옥 도서관 건립도 준비 중이었다. 전문업체가 설계를 진행하고 있었다. 터를 닦고 공사에 쓸 바위들도 실어다 쌓았다. 내년 착공을 목표로 했다. 완공되면 불자만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할 생각이다. 스님의 궁극적 꿈은 영축산을 거대한 도서관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도서관이 반드시 건물이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요즘 통도사엔 가족 단위로도 많이 와요. 좋은 현상이지. 와서 절 구경만 할 게 아니라 가족끼리 책을 읽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모은 책을 한권씩 뽑아 들고 나무 아래서, 개울 옆에서, 바위 위에서 읽으면 통도사 600만평이, 영축산 전체가 도서관이 되는 거라. 헛꿈인지 몰라도 나는 그런 꿈을 꿔요.”
종이책이 빠르게 퇴장하는 시대였다. 무방비로 버려지는 책들을 선별·보존할 공적 시스템 마련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절박하게 제기돼왔다.(“정부나 자치단체에서 못 하는 일을 조계종 종정 스님이 추진하시는 걸 보고 존경스러우면서도 공공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지난해 통도사 서고를 보고 온 울산대 심민수 교수는 말했다. 당시 인문대 학장으로 학교의 장서 폐기에 반발했던 그는 성파 스님을 만나 폐기 예정 책들의 수용을 요청했다.)
“(환경이 조성되길 기다리기보다) 일단 나라도 시작하는 게 맞아요. 저지를 건 저질러놓는 거라. 다른 누구한테 하란다고 될 일이 아니거든요. 안 될 성싶으면 사람들이 흩어지는 거고 될 성싶으면 모여들기 마련이에요. 뭐든 되게 하는 게 중요한 거지.”
40년 전 주지 임기를 마치자마자 스님은 ‘출출가’(出出家)를 선언했다. ‘제2의 출가’를 단행한 그는 민화·산수화, 도예, 천연염색 등의 전통 예술에 정진(그동안의 작품들을 모아 9월28일부터 이달 17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특별전 개최)했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재료는 옻이었다. 한·중·일의 옻칠 기법을 연구해 자신만의 ‘물성’을 표현해냈다. 그는 “옻은 칠하고 닦아내기를 반복하면 할수록 본바탕이 훤히 드러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전시회 소개글)고 했다. 반복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본질에 도달하는 기법은 종이책의 물성과도 닮았다. 작가와 독자와 시대의 지문을 묻히며 시간이 쌓일수록 디지털 문서와 대비되는 종이책만의 가치가 만들어졌다. 스님이 바람을 담아 말했다.
“이 인터뷰로 종이책이 버림받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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