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 진행자 자리를 떠나며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이 글을 쓰는 시점의 나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의 대명사 격인 MBC 〈100분 토론〉의 진행자이다. 그러나 이 글을 독자들이 읽을 시점에는 그 호칭 앞에 ‘전(前)’이 붙게 된다. 오늘(10월29일)을 마지막으로 〈100분 토론〉 진행자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2020년 8월27일 883회차 방송 진행을 맡으며 이 일을 시작한 이후 2024년 10월29일 1074회차 방송 진행까지 만 4년 2개월 동안 (정규 편성된 것만 따졌을 때) 총 192회 토론을 담당했다. 짧지 않은 시간,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손석희 전 진행자가 7년 10개월간 프로그램을 지킨 이래로 두 번째 최장수 진행자라는 영예(?)를 얻었다. 지난해 그만둔 KBS 〈열린토론〉도 총 4년 7개월을 담당했다. 초대 진행자 정관용 교수가 5년 4개월간 맡은 바 있으니 이 프로그램에서도 두 번째 최장수 진행자로서 이름을 올린 셈이다. 각각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한국 방송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양대 토론 프로그램의 ‘두 번째 최장수 진행자’가 되었다는 건 개인적 영광이기 이전에 함께 버텨준 제작진에 감사할 일이다. 게다가 이들 양대 토론 프로그램을 ‘동시에’ 담당했던 첫 진행자로서, 양대 방송사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시사 이슈의 중심을 구성하는 정계와 전문가 집단과 마주한 것은, 개인사적으로 그리고 미디어 연구자로서 각별한 기회였다.
다소간 사적인 의미가 섞일 수밖에 없는 이런 소재를 글로 옮기게 된 건, 내게 주어졌던 기회에 합당한 사회적 보고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이런 소중한 경험은 개인 역량의 특별함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묘하게 맞아떨어진 여러 조건과 행운 덕분이었던 만큼, 그에 보답할 의무 역시 뒤따른다. 우리 사회의 미디어 환경 변화와 정치적 변화 양상을 가늠케 해주는 몇 가지 단서를 미디어 연구자의 시선에서 기록해보려 한다.
우선 지난 5년간 내게 주어진 기회는 나를 포함한 다른 누군가에게 재현되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좁게 보면 지상파 방송, 넓게 보면 기성 매체 일반의 쇠락과 맞물려 있다. 당장 정규 편성되는 정식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할 만한 것이 텔레비전에서는 〈100분 토론〉을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KBS 〈생방송 심야토론〉 폐지 후 〈일요진단 라이브〉나 〈사사건건〉 같은 프로그램이 남아 있지만 그건 토론이 아니라 시사 대담이다. 종편 채널에서 녹화 후 편집 형식으로 제공되는 방송도 있는데 ‘정치 예능’을 넘어 정치를 포함한 사회 일반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토론 프로그램이라 말하기는 민망하다. 라디오에서도 정식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할 만한 건 KBS 〈열린토론〉 정도인데, 미안한 말이지만 그 또한 이름과 거죽을 걸쳤을 뿐 토론이라고 일컫기에는 퍽 앙상한 알맹이만 유지하고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던가. 그게 사람이든 호랑이든 토론이라고 부를 본체는 이미 죽어버렸거나 죽기 일보 직전에 이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토론이라는 미디어 이벤트, 그걸 이끄는 진행자의 독자적 퍼스낼리티(개성과 장악력), 그리고 그런 공론장을 꾸려낼 수 있는 자원과 인력을 지닌 방송사가 함께 흐릿해져가고 있다. 국책 방송과 국회방송 등에서 여전히 토론 프로그램이 편성되지만 대중과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어느 방송사가 어떤 토론의 장을 열었다더라, 어느 진행자가 그런 프로그램에 개성을 부여한다더라, 어느 토론자가 인상적인 논박을 통해 여론을 출렁이게 했다더라, 그런 건 과거의, 그것도 상당 부분 선별적으로 부풀려진 기억의 영역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토론 프로그램 장수 진행자의 비결
토론이 꽤 중요한 미디어 이벤트이던 시절에는 방송사 간 자존심 경쟁이 치열했고, 출연하는 이른바 ‘논객’들의 결기도 만만찮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피하고 싶어도 피하기 어려운 논전(論戰)이기에 그 자리에 앉았으며, 그 결과 걸출한 논법으로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고 공론의 장에서 거의 영원히 밀려나기도 했다. 정규 프로그램인 만큼 제작진이 바뀌어도 진행자는 그 자리를 지켰다. 진행자의 퍼스낼리티는 그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지속하거나 변경하는 줄기이자 마디였기 때문이다.
물론 단명한 진행자도 다수 있었다. 개인적 역량의 부족 혹은 제작진과의 불협화음 같은 제작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간판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로 발탁되거나 정계에 진출하는 등 소위 ‘영전’의 사다리를 밟아 올라가는 관문처럼 그 자리가 작동한 까닭이다. 그에 비해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을 맡은 이들은 대체로 정치 입문처럼 우리 사회의 중년 남성 혹은 여성이 갖고 있는 상향 욕구를 일정 선에서 제어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맡은 토론 프로그램이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한 ‘사적 계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녀야만 하는 ‘공적 언로’라고 믿었기 때문일 테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여기서 밀리면 죽음’이라는 태도로 서로에게 달려드는 패널을 제어하고, 주요 논변의 실체를 대중 앞에 예리하게 드러내기 위해 수시로 희미해져가는 정신줄을 붙잡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야 하는 이 작업에 그리 오래 매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때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상징했던 이 미디어 이벤트가 어찌하여 쇠퇴 일로에 놓이게 된 것일까?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는 ‘대중매체 시대의 종언’을 꼽을 수 있다. 대중매체는 일종의 광장 같은 것이다. 도시 안에서 길을 걷다 보면 길들이 합류하는 곳이 있고, 그 광장에서는 각자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마주친다. 그곳에서 크고 작은 교섭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느 한곳에 큰 무대를 설치하면 수많은 눈과 귀가 일순간 그 한 점으로 모인다. 대중매체는 현대의 광장이었으며 그곳에 상시 개설된 서커스이자 아고라이자 사형장이기도 했다.
이런 집결과 주목의 효과는 실로 대단하여, 하버마스 식으로 말하자면 거대 민주주의 사회의 공론장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기도 했다. 그가 말한 공론장은 영어로는 공공영역(public sphere)이기도 하지만 독일어 원개념으로 치자면 ‘공적인 상태 그 자체(Öffentlichkeit)’이다. 대중의 눈과 귀 앞에 던져져 공적 담화의 저류를 형성하고 때에 따라 사회적 공론을 이루기도 하는 곳. 그 결과가 반드시 수준 높은 공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개방성과 드러남 그리고 광범위성은 민주사회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물론 대중매체의 시대에도 토론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낮았던 그 시청률만으로도 우리 인구의 꽤 많은 눈과 귀가 포괄되었고, 직접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본디 광장이란 항담가설(巷談街說), 즉 골목의 말과 거리의 소문이 생겨나 모이고 또 퍼져가는 곳이기 마련이니 광장의 일각에서 벌어진 대중적 미디어 이벤트의 파급효과는 종종 장대했다.
단절된 광장, 험담뿐인 게토
지금도 이름과 거죽으로서의 대중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마치 삽시간에 상권이 죽어버린 거리와도 같다. 건물은 공실로 넘쳐나는데 건물가를 유지하고 싶은 건물주가 상가 임대료를 낮추기보다는 손님 없는 쇼윈도라도 만들어놓고 무언가가 팔리고 있는 양 시늉을 하는 모습이다. 이왕 상권에 비유를 했으니 이를 더 밀어붙여보자면, 이동된 상권은 여기저기서 ‘떴다방’처럼 짧게 번성하기도 하고 기존 광장보다 수십 수백 배 더 큰 광장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으로 모이게 되는 형태의 도시 광장이 아니라 외곽순환고속도로나 고속철도 등으로 인해 날카롭게 서로 단절된 광장들일 뿐이다. 각각의 규모는 때로 꽤 클지 몰라도 그곳에서 목격되거나 나눈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수많은 게토(낙후하고 단절된 집단 거주지)가 산재해 있고, 공론 광장을 회피한 정치인과 공직자, 지식인들은 그곳에서 각자의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채 실제로는 만나보지도 못한 다른 게토를 험담하는 게 고작인 이야기를 각자의 언어로 나눈다.
물론 스산해진 광장이라고 해도 이름값과 거죽 값만은 아직 높은 편이라서, 가설된 무대 위로 얼굴을 들이밀고 싶어 하는 공연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서 실질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 눈에 띌 실낱같은 기회이거나 자기 지지자들에게 날릴 ‘저 출연합니다’라는 메시지 문구일 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기 배역‘만’ 연기한다. 상대와 나의 대사가 서로 어울리는지는 관심이 없다. 대사가 적절한 사실과 논리에 근거해 있는지 여부도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에 ‘출연’했다는 것만이 유의미한 사실일 뿐, 나머지는 이를 치장하기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탓이다. 그걸 보는 관객들 가운데 진지한 쪽은 이런 사이비 설투사(舌鬪士)들의 겨룸이 논전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며 실망하고, 무작정 당파적이기만 한 쪽은 (자기편 연기자가 내뱉는 담론의 완성도를 따지기보다는) 반대편 연기자의 모든 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예 발길을 끊는 일이 가속화됐다. 구시가와 광장의 게토화는 공론장의 무력화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행된 셈이다.
이것이 미디어 이벤트 주최자의 결함이거나 공연자 그리고 관객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정치가 합리적 토론에 기초를 두지 않고, 의사결정자가 토론을 형식적 절차 혹은 무시해도 좋을 장애물쯤으로 여기는 한 이 경향은 반전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전까지만 해도 학문적 관찰자였던 나는 이미 한산해진 광장 안으로 들어가 무대 위의 진행자가 되기로 결정하면서 스스로 마음먹은 바가 있었다. 가끔은 공들인 무대를 세워 정통 토론의 본령을 지속하면서, 사람들의 흩어진 눈과 귀를 붙잡기 위한 작은 실험을 결합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의 방책일 거라고. 그곳에 실력을 갖춘 논객들을 모아 ‘이 정도면 그래도 토론이 부질없는 건 아니지 않냐’며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지난 몇 년간 나와 함께한 제작진이 스스로를 갈아 넣어가며 시도했던 건 바로 그런 크고 작은 무대였다. 1000회 특집인 ‘토론 다큐멘터리’처럼 전혀 새로운 형식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기획 토론을 시도했다. 각자의 논리 프레임을 먼저 세우고 이를 상호 공박하는 ‘프레임 토론’, 무대 뒤의 이른바 ‘핫마이크(마이크가 꺼진 줄 모르고 나온 본심)’를 무대 앞으로 옮겨보고자 했던 ‘유튜브 연장토론’, 진행자의 시선을 통해 당일 토론 지형의 골자를 정리해보는 ‘발골토론’ 등은 이를 보조하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최근 기존 광장 속 가설무대의 운영권을 넘겨받은 주최자들은 몇 년간 애써 다듬어온 이런 실험 도구를 쓰레기장으로 치워버렸다. 기성 보도의 부산물로서 양산되는 정치적 논란을 쫓는 것 외에 사회적 토론을 기획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들은 나와는 꽤 다른 종류의 토론관을 갖고 있는 듯했다. 되도록 극단적 견해를 가진 쪽을 확보해 서로 싸움박질하게 방치하는 것이 토론이며, 그런 소란이야말로 이목과 공론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이처럼 ‘짐작’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건 그들이 내게 스스로의 생각을 조리 있게 펼쳐 보인 적이 없어서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내 앞에 던져진 ‘대본’과 아주 가끔 무선수신기를 타고 귀에 흘러 들어오는 연출자의 ‘주문’으로 그 의중을 가늠할 뿐이었다. 신의 음성을 그대로 받아 적은 성경과도 같은 대본을 읽고, 세상의 환난보다도 더 소란스럽게 연출된 토론 중에 들려오는 계시를 해석하여 실행에 옮겨야 할 ‘예언자’로서의 새로운 소명이 내게 주어졌다. 나는 그 부르심에 응하지 못했다. 제작진 안에서, 또 제작진과 진행자 사이에서, 그리고 때로는 제작진과 패널 사이에서 먼저 벌어지곤 했던 ‘토론을 구성하기 위한 토론’이 사라지고 ‘사전 토론 없는 토론 프로그램’이라는 역설만 남았다.
그런 시기를 몇 개월 거쳐 마침내 오늘이 왔다. 이 또한 제대로 들은 바 없어서 그간 주어졌던 것들로부터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방송사 측은 아마도 듬성해진 객석의 주요 원인을 나와 같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신물에서 퇴물로 바뀐) 진행자에게서 찾았던 것 같다. 논란의 당사자에겐 단비와도 같을 물타기와 변명의 기회를 안겨주고라도 일단 시청률을 끌어올리고 볼 일이며, 그게 미디어 토론의 사회적 사명 혹은 최소한 개인적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방향성과 전술을 내켜하지 않는 구성원이나 진행자라면 당연히 장애물이 된다. 방송 직전까지 직접 세공해낸 멋들어진 각본에도 불구하고 그걸 구현하려는 의지도 연기력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진행자는 특히 더 문제였을 테다. 마침 보직 변경 인사명령을 통해 그 자리를 채워줄 훌륭한 내부 자원도 많고 그만큼 제작비 절감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대중매체로서 기존 방송사 조직과 그 안에서 수십 년을 종사해온 개인의 논리 측면에서 충분히 합리적인 계산이다. 게다가 그런 묵중한 결정은 나 같은 뜨내기 학출 풍각쟁이가 아닌, 거대한 무대와 창고의 열쇠꾸러미를 쥔 자들의 몫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광장과 거리를 다시금 북적이게 할 수 있다는 의지적 낙관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로써 소기의 성과까지 얻을 수 있다면, 토론 진행자이자 미디어 연구자로서 이중적 입장에 선 내게도 상당한 자극이 될 듯하다. 거시적 차원에서 원인을 찾았던 사회과학자로서의 내 무의식 안에는, 미시적 차원의 ‘진행자 요인’을 애써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무능을 지우려는 내가 음침하게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토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은 단기 대응이 아니라 장기 기획이 중요하며, 그것은 당대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의제의 형태로 수립되어야 한다. 얼굴팔이 기회를 시청률과 맞바꾸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은 채, 요설이나 억지가 아니라 합리적 논변 그리고 해당 주제의 전문성을 갖춘 논객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토론자석에 앉혀, 그것이 우리 사회 속 ‘합리적 입장 지형’의 축소판을 이루도록 하는 게 핵심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물론 아무리 예산과 인력이 갖춰진 기성 매체라고 해도 내내 이렇게 힘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일상적으로는 당시 논란이 되는 시사 이슈를 짚고 정리해가면서, 종종 굵직하게 매듭을 짓는 기획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현실적이다. 미디어 이벤트이자 공론장으로서 정통 토론의 전범을 이어가고 재창조해가는 일이 자신의 책무이자 유산(legacy)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광장 무대의 열쇠를 넘겨받은 이들은 이런 신념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고, 설혹 유사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론은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각자의 신념을 실천해보는 일이다. 무거운 이름과 거죽 아래에 숨기보다는 자신의 책임을 걸고 뭐라도 진심으로 시도해보는 게 우리 각자의 몫이다.
5년 반 전 KBS 〈열린토론〉을 통해 처음으로 방송 사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무렵, 당시 제작진은 〈열린토론〉의 20년 가까운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진행자의 퍼스낼리티를 반영할 수 있는 개념을 제안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만든 문구가 “토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토론 없이 바꿀 수 있는 세상도 없다”였다. 주야장천 토론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터이나, 세상을 바꾸려면 반드시 토론을 거쳐야 한다는 민주적 신념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 진행자는 진작 퇴출시켰는데 이 문구를 여전히 쓰고 있는 걸 보면 묘한 감정이 든다. 사람은 별로이지만 그가 만든 말은 제법 쓸모 있다고 여겼던 걸까. 아무래도 원저작자가 누군지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한다. MBC 〈100분 토론〉 1000회 특집에 부쳤던 “그래도 토론”이라는 제목 역시 그렇다. 이를 만든 제작진은 뿔뿔이 흩어졌고 조금 더 남아 있던 진행자도 결국 떠난다. 우리가 그저 각자의 손에 쥐어진 바통을 들고 이어달리기를 하는 존재일 뿐일지라도, 제목 속에 담긴 의지만은 유산으로 남았으면 한다. 5년 넘게 달려온 ‘지상파 토론 방송 트랙’을 막 벗어난 나는 “그래도 토론”을 통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역설할 나만의 소박한 버스킹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어가볼 생각이다. 신시가에서든 또 구시가에서든.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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