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제3의 성…남장 여인의 판소리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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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로 본 여성국극의 미래
“정녕 태평성대인가/ 위에서 한나라가 벌컥 들이치고/ 동에선 낙랑이 비켜 들어오니/ 내 나라 신세 가련하다/ 이 어찌 태평성대란 말인가!” 짙은 메이크업과 과장된 의상으로 성별을 가린 남장 여인이 판소리와 유사하지만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여성국극을 소재 삼은 드라마 ‘정년이’가 보여주는 ‘자명고’ 공연 실황인데, 남장 여인의 카리스마가 엄청나다. 1950년대 반짝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은 60년대 이후 오랜 침체기를 겪었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해 왔다. 이런 장면이 TV 드라마로 방송되고, 밈이 되어 SNS를 도배하는 날이 오리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게다.
열풍은 수년 전 시작됐다. 서이레·나몬 작가가 2019년부터 3년간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동명 작품이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국립창극단 버전은 전석 매진과 함께 젊은 여성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창극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정점을 찍은 55년 부산에서 공연된 혼성 창극 ‘만리장성’이 남역 최고 스타 임춘앵을 앞세운 여성국극 ‘황금돼지’와 맞붙어 크게 망했고, 그해 영화 ‘흑기사’보다 여성국극 ‘햇님과 달님’의 동시간대 관객이 2배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공연을 놓치지 않으려다 극장에서 출산을 한 관객도 있고, 남역 스타는 극성 팬 성화에 가상 결혼사진까지 찍어줘야 했다.
그런데 ‘K전성시대’에 반전이 시작됐다. 전통예술 재조명 트렌드에 드라마가 이례적으로 ‘공연실황’을 길게 보여주며 장르의 매력이 어필되고 있다. 판소리 고어체를 벗어난 쉬운 가사, 화려한 미장센과 낭만적인 정서도 매혹적이다. 과거 전쟁으로 허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국극이 판타지로 채웠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지난해 국극 1·2·3세대가 힘을 합친 ‘레전드 춘향전’ 공연 당시 만났던 삼마이(웃음을 담당하는 조연) 조영숙(91) 선생은 “50년대에 미러볼을 돌리고 씨스루 의상을 입었을 만큼 화려한 장르인데다, 같은 사랑가를 불러도 판소리와는 감정 표현이 다르다”고 설명했었다.
남역의 대명사는 임춘앵이었다. ‘여성국극은 임춘앵에서 시작해 임춘앵으로 끝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자체가 곧 장르였다. 남장의 카리스마란 아무나 가능한 게 아니다. 정년이(김태리)는 소년미 수준이고, 라이벌 영서(신예은)도 남역 치고 선이 고운 반면, 가다끼(악역) 전문 백도앵(이세영)의 이미지가 사실적이고, 문옥경(정은채)의 발성과 비주얼이 오리지널 남역 스타를 연상시킨다. 정은채는 체격과 포스가 국극의 원형인 111년 역사 일본 다카라즈카의 레전드 남역 아마미 유키와 견줄 만한데, 마성의 매력으로 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며 ‘인생캐’를 만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런데 국극은 갑작스런 인기를 감당할 시스템이 없었다. 40여개 단체가 난립하며 배우를 빼가는 등 무차별적으로 경쟁하니, 공연의 질이 저하되며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2000년대 초까지 간혹 지원사업을 통한 대형 공연도 있었지만, 팬데믹을 거치고 1세대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분위기였다.
‘정년이’로 인해 불씨가 살아났다. 지난해 조영숙의 제자인 3세대 박수빈·황지영이 이끄는 여성국극제작소가 ‘레전드 춘향전’으로 사회적 관심을 호소했고, 올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되며 제도권에 진입했다. 지난 4월 신규 단원 7명을 모집해 배우 양성에도 나섰고, 10월 고연옥 작가, 장영규 음악감독 등 특급 창작진이 가세한 신작 ‘화인뎐’을 올렸다. 외부에서도 관심을 보인다. 지난 여름 세종문화회관 기획 공연 ‘조도깨비 영숙’이 화제를 모았고, 조영숙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내년 1월 개봉한다.
“신파조 벗어나 새로운 시대 가치 담아야”
하지만 여성국극이 공연 업계에 유의미하게 부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악이론가인 김희선 국민대 교수는 “50년대 신파조 스토리로 대중과 소통했던 여성국극이 이 시대 부활하려면 인문학적 성찰부터 필요하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창극을 넘어 어떤 서사로 울림을 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면서 “국립창극단도 판소리 5바탕을 벗어나지 못할 때 유사한 문제를 겪다가 2010년대 들어 동시대적인 레퍼토리와 스타 양성 등 관객과의 소통 장치를 만들어냈듯,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지 예술감독이 강력한 기치를 걸고 표방해 가야 환영받을 것”이라고 짚었다.
내년 1월 대학로에서 8회 장기공연을 준비 중인 아르코 창작산실 선정작 ‘벼개가 된 사나히’가 대답이 될 듯하다. 60년대 국극 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란다. 박수빈 대표는 “이제 드라마를 통해 알려졌으니 실전 무대를 통해 니즈를 충족시키겠다”면서 “가장 큰 쇠퇴 이유가 후계 양성 실패라고 생각해 단원 모집이 큰 목표였고, 그들을 무대에 올린 ‘화인뎐’은 전원 남역으로 브로맨스를 담았다. 차기작은 이 시대에 피할 수 없는 방향성인 퀴어리즘을 담은 파격적인 공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국극의 존재 이유는 여전히 ‘파격’에 있다.
■ 원조는 일본 다카라즈카…기업 지원 속 111년 지속
롱런 비결은 전문적인 시스템이다. 한큐전철의 창립자 고바야시 이치조의 리더십 하에 1919년 설립한 음악학교를 통해 배우를 기르고, 남역 톱스타 중심으로 구성된 5개조가 1년 내내 순환공연을 하며 팬을 붙들어둔다. 대기업이 지원하는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는 다양한 레퍼토리가 개발되고, 팬덤 관리도 앞서간다. 1918년 이미 소식지 ‘가극(歌劇)’을 창간하고, 1934년 공식 팬클럽을 창설해 조직화된 팬덤을 구축했다. 하지만 올해 음악학교 지원자 수가 사상 최저를 기록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단원 자살 사건으로 집단 괴롭힘과 과도한 노동 등의 문제가 불거진 탓이다. 급변하는 사회에 뒤처진 폐쇄적인 조직 문화가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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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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