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에서 ‘장군의 아들’은 왜 좌우로 주먹을 날렸나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우익의 정치폭력배 김두한과 1947년 대한민청 사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조선인 징용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면서 김두한을 비롯한 종로 뒷골목 협객들에게도 하이난다오(海南島) 징용장이 날아왔다. 징용에 끌려갔다가는 태평양 물고기 밥이 될 것을 우려한 ‘장군의 아들’ 김두한은 뒷골목 협객들을 대표해 단게 경무국장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한평생 주먹을 쓰면서 유치장과 형무소를 들락거리던 협객들을 노역장에 데리고 가 봐야 사고밖에 더 치겠느냐. 내가 먼저 정신 교육부터 시키고 징용에 응하겠다.”
폭력배들을 징용해 봐야 노역에 방해만 될 뿐이라 우려했던 단게 경무국장도 흔쾌히 동의했다. 김두한은 ‘반도의용정신대(정신대)’라는 간판을 내걸고 폭력배 500여 명을 모아 정신 교육을 시킨 후 경기도 능곡 부근 철도 부설 공사에 투입했다. 대원 모두 소매치기, 협잡, 강도, 살인, 폭행 상습자들이었고 그중 65%가 전과자였다.
해방을 20여 일 앞둔 7월 24일,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으로 선출되었던 박춘금이 부민관에서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폭탄이 너무 일찍 폭발하는 바람에 박춘금을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부민관 투탄 의거’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항일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김두한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자신이 책임을 맡은 능곡 철도 부설 공사장에서 빼돌려진 다이너마이트가 테러에 이용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폭력배 500여 명을 부하로 거느린 김두한은 좌우 정치 세력 모두에게 매력적인 존재였다. 해방 이후 김두한에게 처음 손을 내민 쪽은 좌익이었다. YMCA 유도부 사범이었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치안부장 장권은 김두한을 유치장에서 석방하고 건국 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장권의 권유로 김두한은 건준 산하 기동대인 ‘치안특별감찰대(감찰대)’를 조직했다. 김두한을 따르던 뒷골목 협객들도 두목을 따라 감찰대에 합류했다.
건준에 이어 좌익의 주도권을 잡은 조선공산당(조공)도 김두한에게 손을 뻗쳤다. 해방 이후 좌익 활동에 열을 올리던 만담가 신불출은 1945년 11월 조공 외곽 단체로 조선청년전위대(전위대)를 조직하고 김두한을 대장, 어린 시절 수표교 거지 생활부터 뒷골목 건달 생활까지 늘 김두한과 함께했던 정진용을 부대장으로 삼았다. 공산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김두한과 그의 500여 부하는 이번에는 ‘공산당 돌격대원’으로 변신했다.
하루는 김두한이 형으로 따르던 박용직이 김두한을 찾아와 꾸짖었다. “너희 부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가 공산당원인 것을 알지 않느냐. 공산당은 너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같은 족속이다.” 박용직의 훈계에 정신이 번쩍 든 김두한은 부하들과 함께 전위대를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해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을 조직했다. 1946년 4월 공식 출범한 대한민청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진영 3영수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훗날 7선 야당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유진산이 회장, 김두한이 감찰부장을 맡았다. 김두한의 부하들은 이번에는 ‘우익 별동대’로 변신했다. 정진용과 그의 부하 100여 명은 우익으로 전향을 거부하고 좌익 청년 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민청)을 조직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주도로 ‘9월 총파업’이 시작되자 대한민청 대원들은 죽창, 곤봉, 권총으로 무장하고 용산역 파업 현장에 투입돼 경찰과 함께 파업 진압을 위해 사투를 벌였다. 전평 본부 습격 작전에서는 트럭 4대분의 노조 관계 서류를 탈취‧소각해 전평의 조직 관리에 치명타를 입혔다. 대구 10월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대구와 그 인근 지역으로 파견돼 현지 경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의 폭도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대한민청에서도 사망자 23명이 발생했다.
1947년 4월 20일, 미국을 방문했던 이승만이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할 예정이었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대한민청에 김포에서 서울까지 이승만의 경호를 요청했다. 19일 밤, 김두한은 좌익 진영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정진용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좌우를 대표하는 협객으로 갈라서기 전, 김두한이 정진용에게 신붓감을 소개해 줄 만큼 두 사람은 우정과 의리가 남다른 사이였다. 김두한은 조선민청의 만행을 꾸짖으며 정진용에게 전향을 권유했다. 정진용은 “두한아, 너와 나는 어차피 원수지간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정치 투쟁에서 우익이 이기면 나는 네 손에 죽게 되겠지. 그렇지만 좌익이 승리하면 너는 내 손에 죽어야 해”라고 잘라 말했다.
20일, 이승만의 귀국은 하루 뒤로 연기되었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김두한에게 “이승만 박사에게 위해를 가할 음모를 꾸밀지 모르니 정진용 일당을 붙잡아서 손을 본 다음, 주동자급을 가려서 경찰에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당일 정진용 일당은 좌익 선전 악극 ‘청춘의 봄’이 상연되는 국제극장의 경비를 서면서, 이승만을 사기꾼이라고 비방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김두한의 명령을 받은 대한민청 대원들은 정진용과 조선민청 대원 20여 명을 권총으로 위협해 납치했다. 그들을 남산 대한민청 본부에 감금하고, 우익으로 전향을 요구하며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구타했다. 정진용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김천호는 병원으로 후송된 후 사망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우익으로 전향하겠노라 약속하고 풀려난 조선민청 대원 김수복은 곧장 미군 방첩대(CIC)로 달려가 김두한 일당의 범행을 신고했다. 김두한과 대한민청 대원 15명은 급파된 미군 CIC에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 중장의 지시로 ‘폭력 조직’ 대한민청은 해산되었다. 재판정에서 피고인들은 김두한의 살해 지시가 없었고, 피해자들이 사망한 원인은 폭행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건강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인 재판부는 폭행에 가담한 김영태와 신영균에게 살인죄가 아니라 폭행치사죄를 적용해 각각 징역 7년과 5년을 선고했다. 김두한과 그 밖의 피고인에게는 암시장에서 ‘담배 2보루 값’에 해당하는 벌금 2만원을 선고했다.
터무니없는 재판 결과에 ‘격노’한 하지 중장은 미군 군사법정에서 재심리를 지시했다. 1948년 3월, 미군 군사법정은 김두한에게 교수형, 나머지 피고인 15명에게는 종신형에서 징역 20년까지 중형을 선고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김두한이 맥아더 사령관의 교수형 집행 승인을 기다리던 동안,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김두한을 사면했다. 미군정에 의해 해산된 대한민청은 청년조선총동맹(청총)으로 간판만 갈아 달고 좌익 척결 투쟁을 이어갔다. 좌익의 불법적 폭력 난동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 우익에는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줄 김두한 같은 협객들이 필요했다.
<참고 문헌>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 메트로신문사, 2003
김봉진,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대구사학 제97집, 2009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선인, 2004
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 금문사, 1976
이경남, ‘분단시대의 청년운동’, 삼성문화개발,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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