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총독부도 ‘육조거리’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박종인 기자의 ‘흔적’]

박종인 기자 2024. 11. 16.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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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시민 휴식공간 된 광화문광장 100년사

잠시 복잡했던 시작

만 4년 전인 2020년 11월 18일 김학진 당시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시의회에 출석해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공사를 시작했던 당시 박원순 시장은 사망으로 유고 상태였다. 김 부시장은 병가 중이던 당시 시장 권한대행 서정협 1부시장을 대리한 ‘서울시장 권한대행 직무대리’였다. 이듬해 4월 보궐선거를 5개월 앞둔 시점에서 나온 광장 공사 속행 발표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세훈 시장 후보는 당선 후 고민 끝에 “공사 중단으로 발생할 원상 복구 비용 400억원과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고 행정 연속성을 위해” 공사 속행을 결정했다. 그래서 2022년 8월 6일 탄생한 공간이 지금 광화문광장이다. 그 결과 지금 광화문광장은 서울 시민을 비롯한 대한민국 사람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됐다.

역사 복원이라는 명분

2020년 당시 서울시가 내건 광장 재구조화 명분 가운데 하나는 역사 복원이었다. 2018년 광장 설계 공모 심사위원장은 건축가 승효상씨였다. 완공 직전 승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도전이 한양 천도를 결정했을 때 ‘북악산~관악산’ 축 선상에 경복궁이 있었다. 그 축을 따라가면 한양도성 끝에 남대문이 있다. 그게 바른 축이다. 지금 세종대로는 휘어져 있다. 현재 세종대로는 일본 강점기를 거쳐 미국 대사관 쪽으로 편의상 지속해서 넓혔다. 그래서 경복궁~육조거리~남대문에 이르는 길이 더 휘었다. 본래 육조거리를 복원하려면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광장을 붙여야 한다.”(2022년 6월 4일 ‘중앙일보’) 요약하면 식민시대를 거치며 육조거리 방향이 훼손됐으니,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세종회관 쪽 ‘편측광장’으로 재구조화하는 게 맞다는 뜻이다.

광장 건설로 시민들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한다는 명분은 100% 충족됐다. 그렇다면 역사 복원이라는 명분은 어떨까. 다행히 20세기 초부터 21세기까지 광화문통에서 세종로, 세종대로로 이름을 바꾼 육조거리에 관한 지도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식민시대, 못 건드렸던 육조거리

식민시대 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청사를 신축했다. 경복궁건축출장소장 후지오카 주이치(富士岡重一)는 이렇게 말했다. “광화문통이 히라가나 ‘く’(쿠) 자처럼 굽어져 있다. 광화문통을 신청사와 (남향인) 태평통 중심선과 합치되게 개수하면 청사의 위용을 볼 수 있겠다.”(‘조선과 건축’ 1926년 5월호, ‘신청사의 설계개요’. 이순우,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 2012, pp.192, 193, 재인용) 길이 휘어 있었다. 광화문~사헌부(현 지하차도 남쪽) 구간은 남서향이고 그 남쪽은 정남향이었다.

총독부는 논의 끝에 총독부 건물만 정남향으로 신축하고 육조거리는 그대로 뒀다. 대신 상대적으로 폭이 좁았던 육조거리 남쪽 일부를 직선화하고 광장을 만들었다. 광화문통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됐다. 육조 관청의 외행랑들 역시 구조와 용도의 변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용됐다.(김대한 등, ‘일제강점기 경성부 광화문통 공간구조의 지속과 변동’, 대한건축학회논문집 38권5호, 대한건축학회, 2022)

사진④: 1933년 '경성시가도'(부분). 경복궁 안에 건축된 총독부 청사와 육조거리(광화문통)는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총독부는 육조거리를 보존하고 청사만 방향을 틀어서 신축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34년 경성부는 광화문통에 중앙분리대를 만들고 가로수를 심었다. 분리대 동쪽은 차량용 도로, 서쪽은 전차 궤도와 보행자용 공간으로 사용됐다.(1934년 4월 21일 ‘동아일보’)

이 중앙분리대가 역사적인 조선 육조거리 중심축이다. 1933년 ‘경성시가도’를 보면 총독부 청사와 육조거리는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사진④> 조선총독부는 자기네 청사만 정남향으로 건축하고 육조거리를 변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일제가 훼손한 국가 중심축은 없다는 뜻이다. “일본 강점기를 거쳐 미국 대사관 쪽으로 편의상 지속해서 넓혔다”는 승효상씨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육조거리 중심선은 식민시대에 훼손된 적이 없었다.

사진①: 1953년 6월 25일 '6.25전쟁 3주년 기념식'. 세종로 왼쪽으로 삼군부 외행랑과 중추부 외행랑 일부가 보인다. 식민시대에도 이들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해방과 전쟁, 변함없던 육조거리

해방이 되었다. 1953년 6월 25일 중앙청에서 열린 6·25 3주년 기념식 항공사진(사진①)을 보자. 군중이 몰려 있는 사진 왼쪽을 보면 기와를 얹은 행랑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게 대원군이 만든 삼군부 외행랑이다. 그 아래 중추부 외행랑도 보인다. 삼군부 동서 행랑도 그대로 남아 있다. 즉 식민시대는 물론 해방 후까지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30년대까지 남아 있던 육조거리 동쪽 의정부 외행랑은 건물 신축으로 사라져 있다. 중앙분리대 녹지에는 은행나무인 듯한 어린 가로수가 심겨 있다. 중앙분리대를 중심으로 전차 궤도와 인도로 사용됐던 서쪽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다. 분리대 동쪽은 왕복 도로로 사용됐다.

무엇보다 중앙청과 옛 육조거리인 세종로는 서로 다른 축선에 놓여 있음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중앙청 정문과 현관은 세종로 동쪽 차도 중앙과 일직선이다. 서쪽 삼군부 외행랑에서 도로 동쪽 끝까지 이어진 옛 육조거리는 총독부 축선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육조거리가 원래 서쪽에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총독부 청사가 육조거리 동쪽으로 치우쳐 건축됐다는 뜻이다.

1966년 4월 19일 광화문 지하도 공사 개시를 알리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 별명은 '불도저'였다. /서울역사박물관

격변, 불도저 시장 김현옥

‘왜정시대의 도시계획안을 전적으로 폐기하고 30년 미래를 만든다.’(1950년 11월 22일 ‘조선일보’) 서울 수복 두 달 뒤인 1950년 11월 20일 서울시는 ‘대서울도시계획’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식민 잔재 청산을 통한 수도 재건 계획이었다. 이 계획 첫 항목이 ‘중앙청~황토현 500m 구간 폭 60m로 확장’이었다. 실행은 지지부진했다.

16년 뒤인 1966년 3월 29일 부산시장 김현옥이 서울시장에 임명됐다. 김현옥은 취임 다음 날부터 5주 동안 모두 292건 지시 사항을 내려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1966년 5월 8일 ‘조선일보’) 과연 별명답게 ‘불도저’였다.

1950년 도시 계획 또한 김현옥 재임 시절에 순식간에 실행됐다. 취임 3주가 지난 4월 19일 김현옥은 광화문 지하도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현재 광화문 지하보도의 원형이다. 동시에 세종로와 덕수궁 앞길 태평로를 왕복 8차선으로 넓히는 확장 공사도 시작했다. 지하보도는 그해 국군의 날 전날인 9월 30일 완공됐다.

사진②: 1966년 공사가 한창인 서울 광화문 지하도 신설 및 세종로 확장공사 현장. 비각(사진 오른쪽 기와집)도 이전될 예정이었지만 공사 설계 변경으로 제자리에 남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사진②>는 공사 당시 세종로 주변 풍경을 담고 있다. 마치 거대한 회전교차로처럼 지하도 공사장이 열려 있다. 전차 궤도가 있던 세종로 중앙분리대 서쪽 공간은 근 두 배로 도로 폭이 확장돼 있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세종로는 ‘1966년 80m, 1967년 100m’로 폭이 확장될 예정이었다.(1966년 3월 5일 ‘동아일보’)

600년 동안 불변이던 육조거리에 근본적인 변화가 온 시기가 이때다. 식민시대 조선총독부도 건드리지 않았던 육조거리 구조가 대한민국 필요에 의해 변형되기 시작했다.

1966년 세종로가 서쪽으로 확장됐다.(기세황, ‘1960년대 이래 세종로와 태평로의 확폭과 도로변 건축물 처리 방식’, 대한건축학회논문집 39권8호, 대한건축학회, 2023)

시민회관 앞에 그어진 도시계획선을 기준으로 바깥쪽 건물들은 모두 철거됐다. 옛 삼군부와 중추부 외행랑이 이때 철거됐다. 하지만 옛 육조거리 중심선인 식민시대 중앙분리대는 유지됐다.

1966년 서쪽으로 확장된 세종로. 이때 삼군부 행랑이 철거되고 육조거리 구조가 대대적으로 변형됐다. 이후 공사가 이어지며 중심축을 되찾았다. 사진에 보이는 중앙분리대가 중심축이다. /서울역사박물관

1968년 또 변화가 있었다. 충무공 탄생일 전날인 4월 27일 중앙분리대, 그러니까 옛 육조거리 중심선 남쪽 끝에 이순신 동상이 건립됐다. 12월 11일 식민시대 경복궁 동쪽으로 이건됐던 광화문이 복원됐다. 위치는 옛 총독부 청사 정면이었다. 위치도 제자리가 아니고 자재 또한 철근콘크리트라 말이 많았다. 하지만 새 시대를 상징한다는 옹호 여론도 적지 않았다.(강난형 등, ‘1960년대 광화문 중건과 광화문 앞길의 변화’, 건축역사연구 24권4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15)

사진③: 1969~1972년 사이 어느해 국군의 날 행사 장면. 세종로는 서쪽으로 대폭 확장돼 있고 중앙청 정면에 광화문이 복원돼 있다. 중앙청과 광화문은 세종로 동쪽 도로와 일직선에 놓여 있다. 1968년에 건립된 이순신 동상이 옛 육조거리 중심선인 중앙분리대에 서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사진③>에는 1969~1972년 사이 어느 해 국군의 날 시가행진 장면이 기록돼 있다. 중앙청 정문~복원된 광화문~세종로 동쪽 도로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충무공 동상이 있는 옛 육조거리 중심축과 1902년 만든 비각(사진 오른쪽 기와집)은 구한말~대한민국까지 변하지 않았다. 세간에 나도는 가짜 뉴스와 달리, 공사 과정에서 이전될 뻔했던 비각도 공사 설계 변경으로 제자리에 남았다.(1966년 5월 17일 ‘조선일보’)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시는 세종로 동쪽 폭을 두 차례에 걸쳐 확장했다.(기세황, 앞 논문) 이로써 세종로는 폭 100m짜리 거대한 도로로 변했다.

2024년 현재 세종대로와 광화문광장. 세종대로 서쪽에 광장이 조성돼 있다. 제 위치에 복원된 광화문~세종대왕상~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잇는 선이 옛 육조거리 중심축이다. 지금은 이 축선이 광장 동쪽으로 배치되고 새로운 중심축이 탄생했다. /박종인 기자, 그래픽=송윤혜

2024년 광화문광장과 새 중심축

이제 맨 앞 세종대로 사진을 보자. 중앙청이 사라지고 광화문이 달라졌다. 중앙청은 1995년 철거됐다. 광화문은 2010년 재복원됐다. 위치도 제자리를 찾았고 각도도 남서향으로 수정됐다.

이 광화문 중심과 세종대왕상, 충무공 동상을 이으면 일직선이다. 이 축이 식민 시대~대한민국 시대 중앙분리대였던 옛 육조거리 중심축이다. 조선은 물론 식민 시대와 해방 후, 전쟁 후, 고도성장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단 한순간도 바뀐 적이 없는 중심선이다.

그리고 2022년 새로운 중심선이 그려졌다. 도로 가운데 있던 광장이 세종대로 서쪽으로 재구조화됐다. 육조거리 원래 중심축은 폐기됐다. 그리고 차도와 인도를 양쪽으로 분리해놓은 공간 설계는 ‘동쪽 차량 공간~서쪽 보행자 공간’이라는 식민 시대 공간 설계와 흡사하다.

광화문광장이 편측으로 조성된 덕분에 시민들은 쉽고 안락한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미래에 물려줄 유산이다. 그 유산 속에 이런 역사가 있음을 짚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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