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이 방송 들었다며 모인 탈북자들… 그게 제 보람이죠”
[김경화 기자의 달콤쌉싸름]
대북 라디오 방송 20년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
1962년 북한 자강도에서 출생해 두 살부터 열일곱 살에 군대 가기 전까지는 평양에 살았다. 황해남도에서 사병으로 10년, 황해북도에서 장교로 9년 복무했다. 탈북해 중국에서 3년, 한국에 들어와 서울 양천·강서에서 24년을 보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제일 오래 산 나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사람 아닌가요?”
북한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성민(62) 자유북한방송 대표를 지난 8일 강화도에서 만났다. 지난 9월 ‘길면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는 북한 땅이 보이는 이곳에서 인생을 정리하고 있다. 평생 소원이던 시집 한 권과 자서전을 남기는 게 마지막 과업이다. 밤마다 가장 센 진통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지만, 2004년부터 매일 두 시간씩 북녘을 향해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자유북한방송은 올해 스무 살을 맞았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라는 것, 단맛과 쓴맛이 있지만 아예 모르고 눈을 감는다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니에요? 북한에 있는 우리 가족들한테 알려줘야죠. 저 사람들은 자기가 짐승이라는 거 몰라요. 나도 그랬어요. 나 혼자 잘살아서는 사는 게 아니죠. 북녘 사람들 사람답게 살라고 해온 일인데, 그걸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대요.”
평양 출신 탈북자는 매우 드물다. 평양에 산다는 자체가 특권층이라는 뜻. 북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던 부친(김순석)은 김일성종합대 교수를 지냈고, 김 대표 역시 620훈련소 선전대 작가로 복무한 인민군 대위였다. 당과 수령에 충성했지만 어떤 누명을 썼고 국경을 넘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자존심 때문이라니, 사선을 넘어선 이유치곤 낭만적이다. 듣고 보니 지난 24년의 한국 생활, 20년의 자유북한방송도 그랬다. 예고된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기엔 김 대표는 여유로웠고 활기찼고 웃음이 많았다.
◇트럼프-김정은 무조건 만날 것
탈북자들이 모여 만든 첫 민간 대북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은 매일 두 시간 남짓 북한에 단파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다. 김 대표는 지금도 북한과 선이 닿아 있다. 매주 토요일 북쪽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생생한 분위기를 전해 듣는다. 대북 현안부터 물었다.
-트럼프 2기가 곧 시작됩니다.
“어린 김정은이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난 사진 한 장이 북한에 가면 선전 효과가 어마어마합니다. 김일성·김정일이가 미국 대통령 만나는 게 소원이었을지 모르는데 그걸 세 번이나 했죠. 이제 그 꼴을 또 어떻게 봐줄지....”
-미·북 대화가 다시 열릴까요.
“기정사실이라고 봅니다. 김정은은 은근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게 자기 이미지 올리는 데 최고라는 걸 아니까. 트럼프도 김정은을 다스려 인기를 올리겠다는 생각이겠죠. 둘은 철썩 붙는 자석과 쇠붙이예요.”
-남북 정상회담도 할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남북미 대화 국면에 지지율이 높았습니다.
“김정은은 민족의 적이고 북한은 자유 통일의 대상이에요. 김정은과 마주 앉는 건 김정은 좋은 일만 하는 거예요. 북한 사람들이 ‘역시 우리 수령님 위대하다. 미국 대통령, 남조선 대통령 마음만 먹으면 다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그걸 거들어줘서는 안 되죠.”
-현 정권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졌는데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인기가 올라갈 거라고 봐요. 윤 대통령이 추구하는 4대 개혁, 탈북자가 봐도 맞거든요. 요새 좌파들 보면, 곧 죽을 놈인 나도 꿈자리가 사나워요. 야당 떠드는 건 탈북자가 보기에도 상식적으로 안 맞아요.”
지난 7월 14일 ‘북한이탈주민의 날’이 처음으로 법정기념일이 됐다. 김 대표는 그동안 탈북자 지원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 때처럼 원칙 없는 남북미 관계는 탈북자 김성민으로서는 절대 반대입니다. 윤 대통령은 자유 통일의 원칙을 계속 지켜야 할 겁니다.”
-북한은 계속 오물 풍선을 보내고 남북 연결 도로도 폭파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한국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요. 한국 드라마를 통해서요. 우리가 전단 날리고 페트병에 USB 담아 보낸 것들이 너무 많이 퍼졌어요. 김정은은 한국을 차단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위협감을 느꼈을 거예요.”
-체제를 흔들 정도라는 건가요.
“그래서 두 국가론을 만들어냈고, 대한민국을 적(敵)이라고 하는 겁니다. 문제는 오물 풍선인데, 풍선은 원래 하늘에서 터뜨리는 게 목적이에요. 그런데 오물 풍선은 땅에 내리는 게 목표예요. 폭약, 화학물질을 넣는 것을 상정해 연습을 한 것으로 봅니다.”
◇통일하지 말자? 간첩인가?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통일하지 말자’는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 간첩 아니에요? 나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요. 임종석은 (1989년) 평양에 임수경을 보낼 때부터 북한이 생각지도 못한 일, 김일성이 기대하지도 않은 일을 했어요.”
김 대표가 김형직사범대학에 다니던 때였다. 대학생들도 ‘장군님의 혁명 전사가 남조선에서 저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구나’라고 감격했다고 한다. “임수경이 와서 북한 사람들에게 통일의 희망을 줬거든요. 장군님을 따라 허리띠 조이면 얼마든지 통일할 수 있다는 무력 통일을 말하는 겁니다. 그 허황된 꿈에 부채질을 한 거예요.”
-통일 포기론이 김정은의 두 국가론과 맞닿아 있다고 보나요.
“지금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의 두 국가론에 얼떨떨해 있어요. 갑자기 김일성·김정일의 말을 다 뒤집어 버린 거니까요. 김정은도 내부 설득이 필요해서 헌법 개정 같은 세부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남한에서도 ‘통일하지 말자’고 한다? 김정은을 따르라 말고 달리 해석할 게 있나요.”
-북한에서 두 국가론이 흔들리는 건 아닌가요.
“북한은 김정은이 말하면 그대로 하는 겁니다. 토를 달 수 없어요. 북한 헌법절인 12월 27일에 개헌 내용을 공표할 것 같아요. 그사이 북한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다고 봅니다. "
-김정은이 선조의 뜻을 뒤엎을 정도로 자신감이 붙은 건가요.
“자신감과 체제에 대한 위험. 비중은 후자가 더 크다고 봅니다. 자기가 곤란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더 큰 거예요. 김여정, 김주애도 자리 잡게 해야 하지, 여러 불안이 있을 겁니다.”
-김주애가 후계자인가요?
“북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맞는 거예요. 북한 사람들은 주애가 처음 나올 때부터 후계자라고 봤어요. 그렇게 생각하라고 김정은이 주애를 데리고 나온 거죠. 김정은은 백두혈통 유지가 가장 큰 목표거든요. 북한 사람들은 김주애 이름도 몰라요. ‘사랑하는 자제분’이라고만 하니까. 김일성 때 김정일을 공개하고, 김정일 때 김정은을 내비친 방식이 그랬어요.”
-북한군 러시아 파병은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북한은 17세에 군에 가서 일반병은 10년, 특수부대는 13년 복무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갔겠죠. 아무리 전쟁터여도 외부 소식을 주입해야 하잖아요. 저희가 ‘자유를 찾아서 전선을 탈출하라’ 이런 요지의 콘텐츠를 만들어 우크라이나 대사관 등을 통해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탈북자들의 맏형 된 평양 엘리트
한국에 들어올 때만 해도 북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될 줄은 몰랐다. “탈북자 중에 자주포를 다루던 대위는 내가 처음이다 보니 정착금을 남보다 3배 더 받았어요. 그걸로 탈북자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면서 ‘백두한라회’라는 소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장엽 선생이 ‘김진(김 대표가 북한에 있을 때 본명)이 데려오라’고 했답니다.”
-황장엽 선생이 후계자로 지목했다면서요.
“그건 과장된 얘기일 겁니다. 그렇지만 황 선생 따라 탈북자동지회 사무총장을 하면서 방송도 시작하게 됐지요. 그 할아버지 안 만났으면 내 인생도 달라졌겠죠. 냉면집 하고 돈도 많이 벌고 했을 텐데(웃음).”
-황 선생이 탈북자들의 구심점이었죠.
“지금도 못 잊는 게 있어요. 황 선생 북에 있는 가족과 친척까지 몰살됐다고 소문이 많았잖아요. 저희가 우연히 6촌 되는 분을 찾았어요. 제가 중국까지 직접 가서 그 가족을 모셔왔더니, 황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한테는 다 가족이지. 탈북자가 다 가족이야.’ 어, 미치겠더라고요.”
이 대목에서 김 대표는 눈물을 글썽였다. “여하튼 그런 분이셨어요. 탈북자들을 다 가족이라 생각했고 북한 인권 운동가로 키우려 하셨죠. 북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말해온 인간 중심의 철학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 존경을 받았습니다. 탈북자 중에 제일 훌륭한 사람은 일 열심히 하고 돈 많이 번 사람, 고향 가서 떳떳하게 ‘남조선에서 돈 벌어 왔수다’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죠.”
-자유북한방송 20년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탈북자들이 직접 증언하는 ‘독재의 하수인에게 경고한다’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북한 애들을 살기등등하게 비판했지요. 그것 때문에 미 국무부의 재정 지원이 끊길 수도 있었는데, 예산과 지조 사이에서 고민하다 그래도 방송 계속하자고 결심했어요.”
이 방송을 듣고 탈북했다는 사람이 많이 찾아왔다. 하나원에서 나와 일주일 만에 일하겠다고 온 탈북자도 있었다. “군대 제대한 놈도 6개월은 논다”고 돌려보냈는데 한 달 만에 다시 왔다. 나중에 남파 간첩이라는 게 들통나 북으로 달아났다. 신변 보호를 받을 만큼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북한 주민과의 네트워크를 계속 관리해 왔고 성과도 많았어요. 평양시 주민등록 자료, 공개 총살 동영상, 북한 신종 화폐 같은 ‘특종’도 많이 했지요(웃음).”
-처음엔 한국에서 무엇을 할 계획이었나요.
“삼촌이 두 분 계신데 내 또래 자식들이 있을 테니, 만약 그 사람들 힘들면 내가 도와주리라 생각하고 왔어요. 북에서 군 복무 19년인데 뭔들 못 하겠냐며. 또 시집 한 권 내겠다 생각했어요. 당시 북한에선 김정일이 허락해야 시집을 낼 수 있었거든요.”
-탈북자들의 맏형으로 불리는데.
“밥 사주고 나눌 수 있는 거 나누고 그게 전부입니다. 하나 자부하는 건 악질 강도 사건 빼고는 탄원서 다 써줬어요. 50대 초반부터 주례를 섰는데, 지금까지 100커플쯤 했나 봐요. 내 담당 경찰 서너 명이 결혼할 때도 주례를 맡았고요.”
-평양 출신 엘리트가 왜 탈북했나요.
“하자면 긴 얘기인데, 누명을 썼어요. 작가적 양심, 자존심을 뭉개버리니 창피하고 치욕스러워서. 남한에 가서 내가 당한 얘기 북에다 떠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중국에서 금방 공안에 붙잡혔죠.
“그때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중국에서 바나나를 처음 먹어봤어요. 껍질 벗기는 것도 몰랐는데 원숭이가 바나나를 껍질 벗겨 먹는 걸 보고 내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상? 그까짓 거는 그 순간 산산조각 납디다.”
◇맛없는 커피에 오늘도 놀란다
그는 강제 북송되는 열차 화장실에서 몸을 던져 살아남았다. 그날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해 왔다. 의사인 조선족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딸(28)을 하나 얻었다. 강화도 그의 방 침대 맡에 딸 사진이 꽂혀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제일 잘한 게 있다면 딸 잘 키운 것, 그거 하나예요. 돈이 없어 학원도 못 보냈는데 국어는 늘 100점 맞았어요. 연구원인데 제1저자 논문이 댓 개 됩니다.”
-아버지 하는 일을 돕기도 하나요.
“다른 아빠들처럼 자랄 때 신경을 못 썼어요. 처도 그렇고 딸도 어릴 적에는 제가 방송에 나오는 걸 싫어했어요. 지금도 제 기사는 아예 안 본대요.”
-한국에 와서 제일 놀란 게 있다면.
“지금도 매일 놀라요. 엊그제는 칸타라고 편의점에서 파는 커피요. 아니 이렇게 맛없을 수가 있나 하고.”
폭소가 터졌다. 구태여 맛없는 것까지 만들어내는 풍요가 놀랍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음료수 몇 개나 있는지 아는 사람 있을까요. 하나원에서 음료수를 넣어주는데 열 달간 매일 바뀌더라고요. 무한한 정치적 자유는 또 어떻고요. 대선 때였나, 잡지에 주요 정치인 ‘9룡’을 꼽아놨더라고요. 9명이 나가면 한 놈은 되고 8명은 죽겠구나 생각했어요. 이렇게 모든 게 넘쳐나는데 대통령 지지율은 17%가 나오는 이상한 나라죠(웃음).”
-아쉬운 거라면요?
“섭섭한 거, 아쉬운 거 없어요. 여기 와서 못 해본 것도 없어요. 자유북한방송 오래 하는 거 만만치 않다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지켜졌고요.”
인터뷰하는 동안 그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다. 하도 사람에 부대끼다 보니 공기 좋은 곳으로 피했는데, 요즘도 손님이 많다. 지난 6월 그의 생일에는 100명쯤 모였다고. 2017년 뇌종양 수술을 받고 깨어나니 ‘폐암에서 전이됐고 그게 더 심각하다’고 했다. 두 번째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 얼마 전 병원은 그의 간에도 3cm짜리 병변이 9개로 늘었다고 진단했다.
“이번에 시한부 판정 받았을 땐 나흘간 물도 못 마셨어요.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6개월이나 남았다는 뜻이잖아요. 차근차근 정리하고 남은 역할 하고, 좋은 책 내고 갈 거예요.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이렇게 살기 위해 한국에 왔노라, 말하고 싶어요.”
이날 아침 썼다는 시 ‘盟誓(맹세)’는 이렇게 흘러간다. “다름 아닌 내 것임에도/ 날 때부터 우리에게 없었던 그것/ 시장통의 물건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부모들이 빼앗긴 그것/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盟誓.” 그가 쓴 시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짐승도 죽을 때 되면 난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평양에 살 때 옥류관 냉면은 원 없이 먹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냉면집은 필동면옥. 기자도 ‘평냉’을 그곳에서 배웠다 하니 다음엔 거기서 만나자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톡이 왔다. “서울 나가면 연락드릴게요. 필동! 기대하세요.”
오늘도 김 대표는 마이크 전원을 켤 것이다.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보내드리는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