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미국이 세계를 옥죄는 숨은 힘
헨리 패럴·에이브러햄 뉴먼 지음
박해진 옮김
PADO북스
탈냉전과 세계화는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확대했다. 국가와 기업이 효율과 수익의 논리에 따라 국경을 넘어 더 긴밀하게 얽히고설키며, 경제 성장은 가속화됐다. 자유와 번영이 이어지며 국제 평화는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인터넷과 달러를 기반으로 한 국제 금융시스템, 비교 우위에 따른 분업화 등은 이런 국제 체제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지구촌이란 믿음은 굳건해 보였다.
하지만 세계화와 지구촌으로 포장된 국제 체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는 평평해졌고,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부상은 위협으로 다가왔다. 세계화는 뒷걸음질했고,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보호무역주의가 되살아났다. 그 결과 성장과 번영의 시너지 역할을 했던 상호의존성은 상대를 옥죄는 치명적 무기로 돌변했다.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무기화된 상호의존성’이다.
상호의존성이 높아지면 상대를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다. 상대를 치려면 나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그럼에도 힘의 우위는 있다. 상대를 고꾸라뜨릴 치명적 무기를 누가 더 손에 쥐고 있느냐가 이를 좌우한다.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미국이 있다. 책은 미국이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어떻게 무기화하는지를 파헤친 여정이다.
세계가 상호의존성의 노예가 된 것은 미국이 깔아놓은 제국의 기반 시설 때문. 저자들은 미국의 힘은 지하와 해저에 매설한 광섬유 케이블을 따라 이동하면서 인터넷망이나 은행이 글로벌 송금에 사용하는 복잡한 금융 네트워크에 교묘하게 스며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글로벌 무역 및 제조업을 떠받치고 있는 열린 시장 아래에는 지적재산권과 기술적 전문지식으로 이뤄진 무형의 네트워크가 놓여있다. 지하에 숨겨진 제국(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의 배선 및 배관 시스템이 세계를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지하 제국은 보이지 않게 보고, 들리지 않게 듣는다. 지금은 어느 정도 분산되고 암호화를 통한 안전장치도 마련됐지만, 한때 전 세계 인터넷 통신의 대부분은 미국을 거쳤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인터넷은 미국이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는 정보의 바다였고, 미국은 그 바다에서 막대한 정보를 캐내고 마구잡이로 활용했다.
세계 금융거래의 중추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데이터는 미국이 지구촌의 자금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한 로제타석이었다. 미국은 SWIFT 자료를 이용해 숨겨진 해외 금융 거래의 세계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이렇게 손에 넣은 지도는 미국의 강력한 무기가 됐다. 달러 결제 시스템 접근 차단과 자산 동결의 칼을 휘두르며 적국의 경제를 절체절명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란과 북한, 러시아가 제물이 됐다.
지적 재산은 미국이 상호의존성을 무기로 활용하는 또 다른 예. 미국은 동맹국과 함께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했다. 기술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첨단 부품과 장비 접근을 막아 목줄을 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국의 지적 재산은 외국기업이 덥석 물어 삼킬 반짝이는 미끼를 바늘에 걸어 놓은 기다랗고 보이지 않는 낚싯줄로, 되감기를 시작하면 상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는 저자의 묘사는 섬뜩하다.
상호의존성이 무기로 돌변하며 세계화와 분업화에 취해 있던 기업과 국가는 딜레마에 빠졌다. 세상 모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도체 업계의 스위스’를 꿈꿨던 대만의 TSMC는 이제 어느 편이냐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미국에 공장을 짓고, 중국에 첨단 반도체를 수출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유럽은 미·중 갈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략적 자율성’이란 미몽에서 깨어났다. 미국 권력에 대한 의존, 저가의 러시아 에너지와 저가의 중국 노동력에 기반한 산업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통렬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상호의존성이 무기화된 세상은 모든 것을 틀어쥐려는 지하 제국인 미국의 구심력과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중국 등의 원심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전쟁터다. 저자들은 냉전 시기 군비 경쟁처럼 한 국가의 두려움이 상대의 두려움을 증폭시켜 모두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책장을 덮으면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이 ‘무기화된 상호의존성’의 폭발력을 더 키울 수 있어서다. 폭풍우의 먹구름은 짙어지고 있다. 지하 제국, 미국이 촘촘히 짜놓은 경제의 거미줄을 알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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