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위한 그 발명은 기린 덕분

2024. 11. 1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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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답이 있다
크리스티 해밀턴 지음
최가영 옮김
김영사

1970년대 초, 미국 뉴저지에 사는 헤르타 쇼는 림프부종 진단을 받았다. 셋째 아이 출산 이후 다리가 심하게 붓는 증상에 30년을 시달린 끝에 알게 된 병명이다. 림프부종은 지금도 완치는 언감생심, 증상 완화가 고작이다. 헤르타는 고탄력 압박스타킹을 처방받아 착용했지만, 견딜 수 없이 퉁퉁 부은 종아리를 몇 시간마다 높이 올리고 누워 쉬어야 했다. 남편 프랭크와 함께 여러 전문의를 찾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우연히 동물원을 방문한 프랭크는 기린을 보고 불현듯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키 큰 동물이 온종일 서 있으면서도 다리가 붓지 않을 수 있을까? 광업회사 엔지니어인 프랭크는 논문들을 뒤졌다. 동물학자들은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기린의 피부는 고밀도의 비탄성 콜라겐 섬유와 두꺼운 외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팽창도 수축도 거의 하지 않는다.

지난 8월 새로 태어난 기린이 독일 베를린의 동물원에서 어미 앞에 서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프랭크는 아내의 부츠를 잘라 앞을 트고 종아리를 빈틈없이 조일 수 있게 벨크로 밴드를 여러 개 달았다. 남편이 만든 흉측한 압박부츠를 신지 않겠다고 거부하던 헤르타는 휴가지에서 수시로 다리를 뉘어 쉬어야 했고, 남편의 끈질긴 권유로 마지못해 신었더니 신세계가 열렸다. 몇십 년 만에 온종일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발명된 비탄성 압박용품들은 수많은 환자의 고통을 덜고, 일상생활 복귀를 돕고 있다.

이 책 『자연에 답이 있다』는 생물체에서 영감을 얻은 현대의 과학기술을 소개한다. 생물체를 본뜨거나 착상을 얻은 사례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예로부터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 초 다빈치의 인력비행기 스케치나 19세기 말 릴리엔탈의 실물 글라이더 모두 새와 박쥐의 날개를 모방했다. 중국 권법이 다섯 동물의 움직임을 본떠 강력하다는 전설은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시리즈에도 흔적을 남겼다. 그런 옛 이야기들과 현대의 사례들은 어떻게 다를까.

이제는 완벽한 자연을 단순 모방하기보다 세세한 자연현상에서 핵심 원리를 짚어내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거나, 자연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재조합하는 스타일이 늘어났다. 바닷가재 눈에서 영감을 얻어 시야각이 넓은 X선 망원경을 개발하거나, 금속이온이 잘 달라붙는 바이러스의 껍질을 쌓아 초경량 배터리용 양극재를 만든다. 홍합이 분비하는 접착성 단백질을 합성하도록 콩을 유전자 조작해서 친환경 무독성 접착제를 만든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혹등고래의 혹이 실은 소용돌이를 제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전기를 덜 쓰면서도 풍량을 늘인 송풍기를 만든다. 프랭크 쇼처럼 의아해하는 눈으로 자연을 보았다가 혁신적 착상을 얻은 사례가 가득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물에서 영감을 얻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 살펴보면 당연하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공학기술은 인간의 생활조건에서 출발해 점차 폭을 넓혀온 반면, 생물은 방대한 생태계 곳곳에 산재하는 극단적 조건과 환경에서 수십억 년 진화해왔다. 인간의 기술은 나날이 새로운 환경과 과제들을 접하고 있지만, 생물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그런 문제들에 대처해왔다. 새롭게 떠오른 과학기술 문제를 풀어가는 영감이 종종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은이 말대로 자연은 수십억 년의 세월로 써 내려간 거대한 도서관이고, 인간의 과학기술은 불과 수백 년 읽어낸 기록에 불과하니 말이다.

누가 어떻게 자연을 읽어낼 것인가. 진화가 완벽하지 않듯 일거에 자연을 읽어내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없다. 지은이는 자연에서 황당한 아이디어를 얻어 발전시킨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평범한 생활인부터 천문대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는 천문학자들까지 다양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즐기다 보면 자연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관수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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