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디샌티스가 내친 功臣 품은 트럼프
미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 비서실장에 오르는 수지 와일스가 소셜미디어에 밝힌 자신의 전문 분야는 ‘혼돈에서 질서를 창출하는 재능’이다. 최대 강점으로 ‘주위 상황은 물론 사람들 인식까지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내세웠다. 시장 바닥 같다는 탄식이 나오던 2016년 첫 트럼프 대선 캠프부터 맡아 조직 내부에 규율과 질서를 심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를 침착하게 설득해 메시지를 다듬고 유세 전략을 조율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외부인’인 와일스는 자신의 텃밭 플로리다주에선 전설 같은 인물이다. 정치 문외한이었던 CEO 출신 릭 스콧(현재 재선 상원의원)을 공화당에 입당시켜 7개월 만에 주지사로 당선시켰다. 몇 년 뒤 무명 변호사였던 론 디샌티스 주지사 선거 캠프에 합류한 지 두 달 만에 승리를 이끌어냈다. 불법 이민·세금 등 보수 유권자들 관심사를 최우선 메시지로 앞세우고 현직 대통령 트럼프 지지를 받아내 패색이 짙던 캠프 분위기를 단번에 뒤집어놨다.
갑자기 40년 경력을 통째로 뒤흔드는 시련이 찾아왔다. 디샌티스가 이듬해인 2019년 그를 돌연 주지사 고문직에서 쫓아낸 것이다. 트럼프에겐 “대통령님, 저 사람 위험한 인물이니 쓰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와일스를 미 정가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다. ‘맥베스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디샌티스 부인 눈 밖에 났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신참’ 주군보다 더 돋보이는 ‘고참’ 신하를 옆에 두는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위 반대가 거셌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당시만 해도 관계가 가까웠던 디샌티스 조언을 트럼프가 무시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 와일스의 능력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결정적일 때 ‘사업가’적인 본능으로 필요한 인재를 골라내는 능력이 있었다. 트럼프는 재선 캠프로 와일스를 다시 불러들였고, 와일스는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경합주 대부분에서 바이든에게 패배했는데 민주당 성향이 상당했던 플로리다에서만큼은 승리했다. 4년 뒤인 이번 선거에선 플로리다를 ‘딥 레드(공화당 절대 우위) 스테이트’로 바꿔놨다. 인재 기용의 중요성을 트럼프는 다시 한번 절감했을 것이다.
며칠 전 승리 연설에서 트럼프가 와일스 이름을 일곱 번 외치면서 ‘1등 공신(功臣)’으로 지목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마디 하라는 트럼프 권유를 끝내 고사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트럼프 유세장을 수십 번 찾았지만, 와일스가 나서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모두가 그를 인정했지만, 앞장서지 않고 무대 뒤에서 묵묵하게 바닥을 다졌다.
연일 국정이 휘청이는데도 앞다퉈 자신을 앞세우는 참모들이 득실대는 우리 정치판과 정반대 모습이다. 능력 있는 참모가 발탁되고 그 참모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는 풍경이 신선해 보인다는 건 그만큼 한국 정치가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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